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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횸흄 Jul 28. 2023

<판관 포청천>의 등장

중드를 보는 이유


‘카이펑 유거 뽀칭톈’으로 시작하며 ‘왕조와 마한’을 부르다 ‘류~촨~ 짜이 민지엔’으로 끝나는 노래를 아시는지? 아니면 ‘개작두를 대령하라!’의 호령은? 난 어제 들은 듯 생생하다. 중드 이야기를 하자면 <판관 포청천>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현재 중드를 즐겨보지 않더라도 ‘포청천’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축구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도 월드컵은 보는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포청천’을 봤거나 적어도 그 존재라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얼굴 하나를 떠올릴 것이다. 그래, 바로 지금 당신이 떠올리는 그 얼굴 말이다. 그러니 중드에 빠진 사람이 <판관 포청천> 이야기로 본격적인 중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축구팬이 월드컵 이야기로 축구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처럼 자연스럽다.  


얼마 전 위화의 소설 [형제]를 읽다가 ‘진세미’라는 인물에 대해 옮긴이가 주석을 붙인 부분에서 혼자 흐뭇해했다. ‘난 <판관 포청천 찰미안>을 봐서 진세미가 누군지 주석을 보지 않아도 알지롱’하는 마음에서. 진세미 뿐이랴? 그가 배신한 조강지처 진향련의 이름과 그 역할을 한 고운 얼굴의 여배우까지 기억이 난다. 그 내용을 SNS에 올리니 중드를 즐겨보지 않는 동네 엄마가 ‘부마처형사건’이라고 댓글을 달아 깜짝 놀랐다. 나보다 8살이나 어린 사람인데도 그걸 알고 있다니! 역시 포청천은 30년 동안 쉬지 않고 무한 반복했구나!


30년 전엔 지금처럼 채널이 다양하진 않았지만 해외 드라마를 꽤 많이 볼 수 있었다. 그것도 TV 수신료만 낸다면 모두가 공짜로! 지금은 채널이 너무 많아서 취향에 따라 시청률이 분산되지만 당시 인기 많은 주말드라마는 시청률이 50%를 넘기는 일도 적지 않아 드라마를 보는 것이 곧 시대 공통의 경험이 되었다. <말괄량이 삐삐>, <천재 소년 두기>, <천사들의 합창>, <브이>, <맥가이버>, <sos 해상구조대> 그리고 <판관 포청천>과 같은 해외 드라마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중 <판관 포청천>의 등장은 신선했다. 그전까지는 해외 드라마도 서양의 드라마가 인기를 끌었었는데 중화권 드라마라니! 그것도 <삼국지>, <수호지>, <서유기>가 아니라 <판관 포청천>? 어사 박문수 이야기 같기도 한데 잘생긴 호위무사가 화려한 무술까지 보여주니 볼거리가 많았다. 보고 싶다고 언제든 프로그램을 볼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으니 당연히 많은 사람들이 본방 사수를 했다. 그 덕분에 누가 왕조고, 마한이며, 장룡, 조호인지 따지는 것부터 드라마 한 편이 방영된 후에는 사소한 것 하나하나가 다 이야깃거리였다. 한번은 법정이 열리면 포졸들이 양편으로 나란히 긴 막대기를 두드리며 내는 소리가 무슨 소리인가로 동생과 갑론을박한 적이 있다. ‘웨~’인가 ‘매~’인가 하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다툼이었다. 나중에 자막판으로 보니 ‘정숙하라’는 내용이었다. 이런 사소한 것까지 이야깃거리가 될 정도로 전 국민이 한때 ‘판관 포청천’에 빠져있어 주연 배우인 진차오췬(금초군)은 ‘진녹천’이라는 국내 건강 음료의 광고도 찍었고 전조 역의 허지아진(하가경)과 내한하여 방송도 했었다. 그래, 물 들어올 때 노 저으라더니 인기가 많으면 뽕을 뽑는 건 지금의 아이돌이나 그때의 포청천이나 마찬가지구나! 다른 점이 있다면 지금의 아이돌을 아는 이에 비해 그때 포청천을 아는 사람이 훨씬 많았다는 점이다. 세대를 아우르는 국민 공통의 추억이었다.


그때만큼은 아니지만 포청천 시리즈는 30년이 지난 지금도 찾는 이가 많다. 아직도 아시아N에서는 포청천의 다양한 시리즈가 돌아가며 방송 중인데 현재는 <1995 판관 포청천>(2023년 현재)를 방송 중이다. 본방 사수를 고집하지 않는다면 볼 수 있는 방법은 더 많아진다. 덕분에 우리 엄마는 30년째 포청천을 꾸준히 시청 중이다. 어디 그런 사람이 우리 엄마뿐이랴? 언젠가 직장 동료들과 대화하다 중드 이야기가 나왔는데 중드를 안 본다던 동료도 포청천만큼은 안다며, 얼마 전에 본인 어머니도 보시더라며 반색하는 것을 봐도 그렇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인기를 얻은 <판관 포청천>은 1993년에 우리나라에 첫발을 디뎠다. 대만에서 제작된 드라마였는데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진차오췬(금초군), 허지아진(하가경), 판홍슈엔(범홍헌)이 각각 포청천, 전조, 공손책 역을 맡았다. 중화권에서는 이전부터 인기가 많은 캐릭터라 대만에서는 그보다 훨씬 전인 1974년에 처음 방영되었다고 한다. 당시 인기 배우였던 티렁(적룡)도 포청천 역할을 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선 <영웅본색>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소싯적에 무협계에서 최절정의 인기를 끈 배우니 포청천이라는 역할은 우리나라의 장희빈처럼 인기의 척도가 되는 역할이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에는 진차오췬(금초군)의 포청천이 먼저 인기를 끌었고 가장 많은 작품에서 주인공을 맡았으니 일반적으로 ‘포청천은 곧 진차오췬(금초군)’을 뜻했다. 그렇다, 아까 전에 당신이 떠올렸던 바로 그 얼굴이다. 시간이 흘러 세대교체 및 색다른 설정 등 다양한 시도를 하는 모양이지만 <포청천 개봉부전기>처럼 젊고 색다른 모습을 그린 포청천이 아니고서는 진차오췬(금초군)을 뛰어넘는 포청천을 만나긴 어려울 듯 하다. 최근 방영하는 다양한 배우 버전의 포청천을 봤는데 아무래도 자꾸만 아는 ‘그 얼굴’이 떠올라 몰입이 어려웠다. 그래도 더 이상 진차오췬(금초군)은 건강상의 이유 등으로 포청천을 새로 찍을 수는 없을 듯 하니 아쉬움을 뒤로 하고 새로운 배우의 등장을 기대해 본다.


수많은 포청천 시리즈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포청천 칠협오의>이다. 다른 시리즈에서는 주로 개봉부, 황궁 중심으로 사건이 펼쳐졌는데 이 이야기에는 제 3의 집단인 협객들이 등장한다. ‘칠협오의’란 남협 전조, 소협 애호를 포함한 일곱 명의 협객 즉 ‘칠협’과 금모서 백옥당을 포함한 다섯 명의 의형제 집단 ‘오서’를 일컫는 말이다. ‘칠협오의’를 처음 만난 것은 <판관 포청천 >시리즈가 아닌 <칠협오의>라는 또다른 포청천 드라마를 통해서였다. 이 드라마는 당시 포청천 시리즈가 인기를 얻자 다른 채널에서 들여온 드라마로 다른 배역은 기억이 나지 않는데 전조와 백옥당의 얼굴은 기억이 생생하다. 포청천도 전조도 나와 당신이 단번에 떠올리는 그 얼굴이 아니지만 연기도 내용도 괜찮았는데 각인이라는 게 참 무서운 거라 그땐 굳이 '진짜 포청천', '가짜 포청천'이라며 차별하여 말하곤 했다. 그래도 우리 엄마는 이 드라마에 나오는 백옥당이 포청천에 나온 사람 중 제일 잘생겼다고 하니 매니아층은 얻은 듯 하다. 실제로 중드 팬들 중엔 <판관 포청천>의 포청천과 전조보다 이 시리즈의 주연진을 더 인정하고 좋아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칠협오의> 그리고 <포청천 칠협오의>는 전조가 임금에게 4품 호위 무사직과 ‘어묘’라는 칭호를 얻으면서 갈등이 시작된다. ‘오서(다섯마리의 쥐)’가 있는데 ‘어묘(황제의 고양이)’라니 다섯 쥐는 화가 나고 그중 특히 막내 쥐인 금모서 백옥당은 참을 수가 없어 황궁을 턴다. 어쩔 수 없이 전조와 백옥당의 1 : 1 대결 구도가 되지만 안타깝게도 두 드라마 모두 외모에서부터 전조를 백옥당이 이기기가 어려워보였다. 내용상으로 보면 백옥당도 제임스딘 정도의 반항아 이미지가 느껴져야 하는데 협객으로서의 카리스마나 매력이 전조에 비해 많이 약했다. 이후 다른 드라마에서 그려낸 백옥당도 역할에 썩 어울리지 않았다. <포청천 개봉부전지>나 <포청천 백옥당전기>의 백옥당은 앞의 두 작품보다 더 아쉬웠다. 시작도 하기 전에 고양이의 승리이다.  21세기에 와서야 비로소 <강호협객-오서요동경>에 천샤오(진효)가 백옥당으로 등장하면서 그 아쉬움이 달래졌다. 그렇지! 이 정도는 되어야 전조를 이길 수 있지! 30년 산 아쉬움을 날아가는 순간이다!


외모 얘기를 더 해 보자면 전조 역할을 빼놓을 수 없다. 앞서 <칠협오의>라는 다른 버전의 포청천 시리즈 이야기를 했는데, 그 드라마의 전조 역할인 자오언쥔(초은준)의 외모와 연기는 전조라는 본래 캐릭터와 참 잘 어울렸다. 그래서 포청천을 즐겨보는 팬들 중에도 전조 역할에 자오언쥔(초은준)을 더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런데 왜 우리나라에서는 유독 허지아진(하가경)이 압도적으로 인기를 많이 얻었을까? 지금 두 드라마를 동시에 방영하고 젊은 세대에게 전조 인기 투표를 하면 결과가 뒤집어질 거라고 확신할 정도로 자오언쥔(초은준)의 외모는 세련되고 잘생겼다. 그런데도 당시엔 한참 기울어지게 허지아진(하가경)의 인기가 높았다. 내 나름의 분석을 한 결과 허지아진(하가경)의 미간에는 ‘협’의 정신이 잘 느껴지기 때문인 것 같다. 그렇다, 지금 당신이 떠올리는 바로 그 전조의 표정 말이다! 자오언쥔(초은준)이 냉정하고 차분한 전조라면, 허지아진(하가경)은 의협심이 넘치는 전조였고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의 정서엔 그런 모습이 더 전조답다고 느꼈던 모양이다. 현실 세계에서 만나기 어려운 협객의 모습을 응축적으로 보여준 전조의 모습에 대리만족한 게 아닐까? 외모는 시대를 탄다. 허지아진(하가경)이 시대를 잘 타고 연기한 덕에 우리는 ‘포청천이 곧 진차오췬(금초군)’이듯 ‘전조는 곧 허지아진(하가경)’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래, 바로 지금 떠올리는 투샷 말이다!


캐스팅이 좋건 나쁘건 간에 포청천과 오서의 이야기가 재밌었던 건 배신과 음모로 발생하는 자극적인 사건들이 아니라 의리과 정의, 우정과 사랑을 보여주기 때문이었다. 또한 정치 세계와 강호의 세계가 서로의 세계를 존중하며 공존한다는 것도 무척 신선했다. 강호는 강호의 규칙이 있고 나라에는 국법이 있지만, 서로를 해치지 않는 한 각자의 존재를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무협을 볼 때마다 강호와 나라로 나뉘어진 채 아무렇지 않게 세상이 굴러가는 게 신기했다. 그런데 <포청천 칠협오의>를 보니 대충 어떻게 된 관계인지 알 것 같았다. 


이런 모습은 내가 중국사를 공부하면서 느꼈던 송나라의 모습과 비슷했다. 책에서 배운 송나라는 주변국들의 침입을 자주 받아 늘 아슬아슬했지만 평화롭게 공존을 도모했다. 단순하게 어떤 나라와 척을 지고 싸워서 문제가 해결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현재 우리나라를 떠올려 보라. 그렇게 해서는 국제 관계가 엉망이 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송나라가 다른 어느 시대보다 영리했다고 생각한다. 비록 남송 시대에 들어와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되었지만 말이다. 무관이 득세할 때보다 문관이 득세할 때 황권이 더 약해지는 걸 보면 칼보단 펜이, 아니 칼보단 입이 더 무서운 것 같다. 현대 국가의 외교 관계를 보는 것 같다. 중국은 이미 그런 시간들을 오래 살아왔구나 알게 되기도 했다.  


지금도 여전히 무한 반복과 다양한 버전을 낳는 나의 첫 TV 중드 <판관 포청천>. 중드 키즈는 포청천 덕분에 중국의 한 시대를 풍성하게 이해하게 되었다. 송나라는 교과서 속 벽란도에서 만나는 나라가 아니라 포청천의 나라이다! 정의가 있고 태평성세인 그 시대의 배경과 인물이 정의에 굶주린 대한민국 사람들에게 재미와 대리만족을 줬다. 하지만 지금도 포청천과 비슷한 수사물들이 꾸준히 제작되는 것을 보면 정의에 대한 사람들의 희망은 1990년대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시대를 초월하는 모양이다. 


중드는 인물도 많고 회차도 길어 사뭇 복잡해 보이는데 알고 보면 전개는 단조롭다. 복잡한 심리 묘사보다는 정의면 정의, 사랑이면 사랑을 향해 직진한다. 작품성으로 보자면 한국 드라마를 보는 편이 수준이 더 높은 게 사실이다. 그렇다면 나를 비롯해 왜 사람들은 중드를 보는 걸까? 중국과의 사이가 좋지 않은 지금 우리 드라마에서 중국풍의 사소한 것 하나에도 예민한 때에도 중드의 물량공세는 그 어느 때보다 거세다. 그 말은 찾는 이가 많다는 뜻인데 왜 그럴까? 그 이유를 스스로에게도 물어봤는데 답은 저마다 다르겠지만 내 답은 이렇다. 중드가 지닌 단조로운 스토리 라인이 사람들에게 휴식을 주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어느 중간에서 시작해도 고만고만한 긴장과 재미를 주는 드라마가 중드 아니던가? 그래서 나 역시 고구마구간은 건너뛰며 보기도 하고 졸면서 보다가 깨도 굳이 뒤로 돌아가지 않는 게 중드 아니던가? 어쩌면 내가 중드를 보는 이유도 그런 데에 있는 지도 모른다. 내가 사는 세상은 드라마가 보태지 않아도 충분히 복잡하니까 드라마라도 편히 보자는 마음 말이다. 현실 도피 아니냐고 몰아붙이면 할 말은 없다. 그래도 포청천을 보는 동안은 복잡한 머릿속이 단순해지는 건 사실이니까. 가끔은 현실을 직시할 만한 드라마를 찾아보려 하지만 아직은 나를 좀더 지켜주고 싶다. 대신 현실을 열심히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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