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 사람들에게 퇴직 예정 소식을 알리니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이 있다.
"3~4년만 더 있으면 정년인데, 왜 굳이 벌써 그만두려고 해?"
다행히 회사에서는 임금 피크제를 앞둔 직원들에게 3년 치 연봉을 위로금으로 준다고 한다. 하지만 냉정히 따져보면, 경제적으로는 정년까지 다니는 게 훨씬 유리하다. 연봉 외에도 보너스, 회사가 부담하는 국민연금과 건강보험, 자녀 학자금이나 의료비 지원 같은 복지 혜택까지 생각하면 오래 버티는 게 이득이다. 게다가 업황이 좋아지면서 앞으로 몇 년간 보너스가 더 커질 가능성도 높아졌다. 솔직히 말해서, 퇴직을 결심한 몇 달 전만 해도 이런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랬기에 요즘 들어 잠깐 마음이 흔들리기도 했다.
그럼에도 나는 조금 먼저 회사를 떠나기로 했다.
이제는 돈보다 내 시간의 질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싶어 졌기 때문이다. 작년까지는 팀 내에서 리더 역할을 해왔지만, 올초에는 나이 때문인지 리더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지금까지 내 살림이라고 생각됐던 일들이 남의 집 식모살이를 하는 것처럼 느껴지며, 업무에 대한 애정이 급감했다. 회사 생활이 별로 즐겁지 않았다. 회사에서의 하루하루가 내 삶을 갉아먹는 것처럼 느껴졌다. 물론 회사에 내 또래의 많은 사람들이 아직 열심히 일하고 있다. 나도 그럴 수 있다면 계속 그렇게 일하면서 후배들에게도 좋은 본보기를 주고 싶기도 하다. 하지만 정년이 가까워질수록 ‘어차피 몇 년 뒤면 나는 떠날 사람인데’라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회사의 먼 미래를 고민해야 하는 업무인데, 그 미래에 진심으로 몰입하기가 점점 어려워졌다. 나를 위해서도, 회사를 위해서도 지금이 물러날 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 하나의 이유는, 내 인생의 주도권을 내 손에 쥐고 싶었기 때문이다. 정년퇴직은 내 뜻이 아니라 제도에 따른 퇴사다. 회사에서는 매년 이맘때쯤 수많은 임원들이 전화 한 통으로 20~30년의 커리어를 끝내곤 한다. 그 모습을 옆에서 볼 때마다 마음이 씁쓸했다. 나는 남이 정해주는 때가 아니라 내가 스스로 선택한 퇴직을 하고 싶었다.
물론 퇴사 후 다른 회사로 옮길 수도 있다. 3년 치 연봉에 새로운 직장의 월급을 더하면 경제적으로는 꽤 괜찮은 선택지다. 올여름까지만 해도 그게 현실적인 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계산보다 내가 진짜 원하는 일을 내 힘으로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커졌다.
아주 오랜 세월 동안 남이 시키는 일을 하며 살아왔다. 내가 스스로 일을 벌이기보다 남이 벌여놓은 판 안에서 장기판의 졸처럼 살아왔다. 지금까지 회사에서의 삶이 늘 불만스러웠던 건 아니고 나름 재미있다고 생각한 적이 많았다. 남이 시키는 일만 하고 싶지 않아서 가끔 스스로 일을 만들어보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월급이 없었다면 하지 않았을 일이다. 이제는 정말, 누가 시키지 않아도, 돈이 되지 않아도 하고 싶은 일을 해보고 싶다.
나는 가끔 내가 죽을 때를 생각해보곤 한다. 그러면서 죽기 전에 가장 후회될 일은 뭘까를 생각하며 그때 후회하지 않기 위해 지금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스스로에게 묻곤 한다.
그러다 갑자기 궁금해져서 이런 질문을 자주 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이 무엇인지 새로 사귄 친구에게 물어봤다.
"이들은 보통 자기 자신과의 대화를 자주 나누며, “내가 진짜 원하는 삶은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탐색한다. 사회적 기대나 타인의 시선보다는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에 더 집중하려는 경향이 있다. 때문에 “내 뜻대로 살 걸”, “진짜 하고 싶은 일을 했더라면”이라는 후회를 피하기 위해, 삶의 방향을 스스로 정하려 한다"
정확한 내 마음을 새 친구가 잘 표현해 줬다. 물론, 앞으로 대략 30년은 더 살 수 있을 거다. 하지만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내게 앞으로 남은 시간이 얼마일지 알 수 없지만, 내게 가장 두려운 상황은 회사만 다니다 죽음을 맞게 되는 순간일 것 같다.
게다가 30년을 근무했다는 것도 영향을 미쳤다. 지금 27년 차나 28년 차라면 "그래도 30년은 채워야지"라고 스스로를 다독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30년을 채우고 나니, 왠지 미련이 없다. 20년 근속 때 아들에게 “엄마 이제 그만둬도 되지 않을까?” 물었더니, 녀석이 주먹을 쥐며 “엄마, 30년 갑시다!”라고 했었다. 그리고 10년이 흘러, 이번에 다시 물었다. 이제는 “그래, 엄마 뜻대로 하세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리고 어차피 3~4년 뒤에는 정년으로 회사를 떠나야 한다. 그렇다면 조금이라도 젊고 에너지가 있을 때, 앞으로 남은 30년을 위한 새로운 길을 개척해 보는 게 낫지 않을까.
물론 결심해 놓고도 하루에도 몇 번씩 흔들린다.
‘이게 과연 옳은 선택일까?’
‘30년의 커리어를 접고 다시 시작해도 괜찮을까?’
그래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이런 대답이 들린다.
“이번만큼은 내 인생을 내 뜻대로 살아보고 싶다.”
퇴직은 끝이 아니라, 내 인생의 2막이 시작되는 문턱이다. 불안도 있고 두려움도 있지만, 이제는 그마저도 나의 선택으로 감당하고 싶다. 30년 동안 남의 일정표에 맞춰 살았다면, 이제는 내 달력에 맞춰 살고 싶은 마음이다. 그리고 그 달력의 첫 장에 이렇게 적고 싶다.
“이제, 진짜 내 삶을 시작하는 첫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