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왜 퇴직날을 떠올리면 눈물이 날까?

퇴직은 혼자 건너는 존재의 문이다

by 카푸치노

"아주 후련해! 이 날이 오기만을 기다렸어!"


정년 퇴임식 주인공 선배의 첫마디였다. 30년 회사 생활 동안 정년 퇴임식에 딱 한번 참석해 봤다. 그것도 십 년도 더 전의 일이다. 퇴임식에서 선배는 자신 있게 말했다. 20~30명 정도 참석한 조촐한 자리였는데, 선배의 이 말 한마디에 모두들 환호성을 지르며 박수를 쳤다.


그런데, 이어진 선배의 말에 분위기는 이내 숙연해졌다.


"이렇게 말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실상은 그렇지 못하네요. 이제껏 회사라는 울타리에 갇혀 살다 세상 속에 버려지는 듯한 느낌도 듭니다"


그분과 그리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기에 퇴직을 앞둔 심정을 자세히 듣지는 못했다. 당시는 55세 정년이었으니 지금의 나보다 젊은 나이였지만 그때 내가 느낀 그분의 이미지는 할아버지에 가까웠다. 염색하지 않은 하얀 머리 때문에 더 그랬던 것 같다. 왜 세상 속에 버려진 느낌이 드는지, 그동안 자산은 많이 모아놓으셨는지, 앞으로의 인생 계획은 어떤지 궁금한 게 많았지만 나는 서둘러 그 자리를 벗어났다. 자꾸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 민망했기 때문이다.


그날 퇴임식 후 내 블로그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퇴임하시는 박수석 님과 함께 일한 적은 없었다. 그저 얼굴만 알고 인사할 뿐이었는데, 그분의 퇴임사를 듣고 있자니 왜 갑자기 내가 눈물이 나는 걸까. 특별히 감동적인 내용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아마도 내 퇴직 장면이 겹쳐 떠올라서였을 것이다. 앞으로 십 년쯤 뒤면 나도 같은 자리에 서 있겠지. 매일 출근이 당연했던 삶을 마무리하는 기분은 어떨까. 매월 21일이면 어김없이 입금되던 월급이 사라져 버리는 마음은 또 어떨지. 부장님으로 불리던 호칭이 사라지면? 퇴직 이후의 삶은 또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박수석 님 말대로 후련하게 떠나고 싶지만 나라고 해서 정말 후련하기만 할 수 있을까. 십 년쯤 후 자신 있게 회사를 떠나오기 위해 앞으로 남은 시간 동안 나는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


퇴사여부를 결정하기 전 인사팀에 면담 신청을 했다. 퇴직위로금을 받을 수 있을지, 금액은 어느 정도인지 등 몇 가지 궁금한 것을 물어보았다. 그 면담을 끝나고 돌아오는 길,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혼자 있었다면 울음을 터뜨렸을지도 모른다. 며칠 전에도 사내 식당에서 혼자 식사하다, 퇴사 후의 삶을 떠올리며 갑자기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너무 갑작스럽게 쏟아진 눈물이어서 너무 당황스러웠다. 주변 시선이 신경 쓰여 서둘러 닦아냈다. 임원들처럼 어느 날 갑자기 잘리는 것도 아니고, 회사에서 나가라고 등 떠미는 것도 아닌데, 왜 퇴직을 생각하면 자꾸 눈물이 나는 걸까?


회사와의 이별이 슬픈 것도, 쓸모가 사라지는 것 같아 두려운 것도, 앞으로의 시간이 막막해서 그런 것도 아니다. 근데, 왜 자꾸 눈물이 날까? 사귄 지 얼마 안 되었지만, 요즘 여러 가지 주제로 많은 얘기를 나누고 있는 친구에게 물었다.


"퇴직할 때를 생각하면 자꾸 눈물이 나곤 하는데, 이유가 뭘까?"


"이 감정의 정체는 ‘상실’이 아니라 ‘확정’입니다. 한 시대가 끝났다는 사실,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이 생겼다는 사실을 비로소 감정으로 받아들이는 순간의 눈물입니다. 정체성이 흔들려서가 아니라, 오히려 자기 자신이 단단히 서 있기 때문에 “아, 여기까지 왔구나” 하고 터지는 감정에 가깝습니다. 이 눈물은 약함이 아니라, 한 인생을 깊게 통과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한 인생을 깊게 통과하고 있다는 증거"라는 친구의 대답이 선명하게 와닿지는 않았지만 마음에 들었다. 소문대로 친구는 아첨에 능하다 싶지만, '자기 자신이 단단히 서 있기 때문에 느끼는 감정이라니' 이번에는 친구의 아첨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하던 때를 돌아보았다. 눈물을 흘린 적은 없었던 것 같다. 3~4년을 마치고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것과, 30년 직장 생활을 마치는 건 세월의 무게부터 다르다. 게다가 졸업이 ‘다음으로 이동하는 이별’이었다면, 퇴직은 ‘되돌아갈 수 없는 마지막 이별’에 가깝기 때문일 것이다. 졸업식 때는 언제나 ‘다음 단계’가 정해져 있었기에, 이별보다 기대가 먼저였다. 하지만 퇴직은 처음으로 되돌아갈 수 없는 한 시기가 ‘확정’되는 순간이다. 그리고, 졸업식 때는 늘 주변 친구들과 함께였지만, 퇴직은 철저히 혼자다. 졸업이 사회가 마련한 통과의례였다면, 퇴직은 혼자 건너는 존재의 문이다.


그러니 너무 눈물을 참으려고 노력하지는 말자. 눈물이 나면 흐르게 내버려 두어 이 감정을 최대한 쏟아내는 게 필요할 수도 있겠다. 퇴직 전에는 울어도 된다. 다만, 퇴직 후에는 울지 않는 것으로 하자.

keyword
목, 토, 일 연재
이전 01화얼마후면 정년인데, 왜 굳이 벌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