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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휘 Dec 24. 2021

가난의 냄새

용돈


 이 글은 니가 가난하냐 내가 가난하냐 경쟁하자는 것도 아닌 가난을 인정하며 현실과 꿈 사이 갈등하는 사람들을 응원하는 글이다. 이 글로 인해 나에게 더 솔직하며 더 좋은 사람으로 다가가는 한걸음이라 자부한다. 가난은 결코 자랑이 될 수 없다. 가난을 밝히는 순간 주변에서는 어느 순간 동정의 눈빛과 동정의 손길이 나를 반겨 줄 것이다. 이것은 배려가 아닌 보이지 않는 칼날로 찌르는 행위이다. 당신의 칼날을 신문지에 싸며 이 글을 읽었으면 한다. 


 가난의 정의는 '살림살이가 넉넉하지 못함. 또는 그런 상태'이다. 넉넉하지 못하다는 것은 추상적인 의미로써 사람마다 기준이 모호하다. 청소년기 때는 가난에 대한 생각은 "돈, 옷차림"이 전부였다. 허나 지금은 돈이 아닌 "가난에 대하는 마음가짐"이라 생각한다. 세상 누구도 가난을 원하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가난에 대한 선택지가 있다면 가난을 선택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가난은 선택이 아니므로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부모님을 탓하기도 하지만 부모님도 원치 않는 결과물일 것이다.

 언젠가 6살 차이 나는 친동생이 부모님에게 용돈을 받는 모습을 목격하였다. 동생에게 "나 때는 용돈이 없었어."라고 우스갯소리로 말을 한 적이 있다. 동생은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몰라도 진짜다. 청소년기에 우리 집은 용돈이라는 개념은 다른 집과 다르게 특이했다. 일주일, 한 달 간격으로 주기적으로 받는 것이 필요할 때마다 돈을 받는 시스템이었다. 달리 말하면 학용품, 친구들과의 유흥이 아닌 이상 돈을 쓰지 않았으며 달리 말하면 쓸 수 없었다. 돈 없이 노는 것도 한계가 있다. 가끔 친구들과 놀 때 만원씩 받았지만 규칙적인 용돈은 받은 적이 없다. 불규칙적으로 돈을 요구하다 보니 부모님은 못주는 경우가 허다했다. 돈이 없는 채 약속 장소로 가는 마음은 사형 선고를 받은 사형수마냥 생각이 많아지며 발걸음이 무겁다. 허나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십시일반 친구들이 돈을 낼 때 웃음으로 무마하며 이 순간을 넘기는 것이다. 나도 제값을 내고 당당하게 놀고 싶다. 현실은 먼지만 날리는 텅 빈 지갑이다. 친구들에게 광대를 자초하며 웃음을 주면 그제서야 내 마음은 풀린다. 돈 없이 학교 운동장 모래 가득한 철봉에서 놀다 보면 철봉 밑에 떨어진 100원짜리 동전과 마주하는 행운은 가끔 찾아온다. 


 이 행위가 반복되며 나도 모르게  하루 이틀 산더미처럼 응어리가 쌓여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늦은 저녁 장사하는 엄마에게 "우리 집은 왜 가난해?" 이 한마디를 내뱉은 순간 눈에서 응어리를 토해내듯 눈물이 쏟아졌다. 엄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안아주었다. 엄마 품에 안겨 얼마나 울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응어리를 다 토해내며 난 그 순간 다짐했다. 가난하게 살지 않을 거라고.


 지우고 지워도 없어지지 않는 것은 가난의 냄새는 존재한다. 이 냄새는 눈으로 보이지 않지만 느낄 수 있다.
돈이 없어서 가난할 수 있다 허나 마음마저 가난하다면 가난을 끊을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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