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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d Mirror Oct 13. 2021

두 번째 독립을 위한 소셜 펀딩

2005년 10월에 첫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보험설계사라는 직업은 사실 직장인이라기보다는 프리랜서, 개인사업자에 가까운 일이었지만, 대학을 졸업하고 첫 사회생활을 하는 새내기에게는 직장생활을 하는 직장인의 마인드였다. 마인드는 직장인인데, 일은 이미 성공을 이루어 어느 정도의 위치에 올라간 개인사업자처럼 했으니 성과가 제대로 나올 리가 없었다.



결국 5년 가까이 한 보험설계사 일을 마무리할 때쯤에는 성과를 내지 못해서 월급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었지만 사람은 계속 만나고, 씀씀이가 꽤 커진 나의 지출 습관으로 인해 통장에 들어오는 돈보다 나가는 돈이 더 많았다. 저축으로 돈을 모으기는커녕 카드 돌려막기와 현금서비스 등 쓸 수 있는 것은 모든 걸 다 썼다가 결국 제2금융권에서의 대출까지 뻗어가 40% 가까이 되는 이자를 감당하며 1천만 원 이상의 빚을 진채 매일매일 숨 막히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결국 나는 부모님에게 SOS를 요청했고, '엄마 용돈은 안 줘도 돈은 알아서 잘 모으고 있겠지' 하고 생각하고 있던 어머니에게 큰 배신감을 남기며 첫 번째 사회생활을 마무리하게 되었다.



그래도 첫째로 태어나 엄마에게 어느 정도의 신뢰를 받으며 살아온 나인데, 그동안의 신뢰가 와장창 무너진 사건이었다. 이렇게 첫 직장을 나온 후로는 6개월 이상 꾸준히 다닌 회사가 없었다. 나오자마자 스타트업에서 일을 했고, 5개월 후엔 스타트업에서 일을 하다가 만난 대표님의 권유로 또 다른 일을 하게 되는 등 주로 인맥과 소개를 통해 회사를 옮겨 다녔다. 이 시기에는 이상하게 내가 가는 회사마다 회사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는 상황에 처해 1년을 다니기가 힘들었다.


서른 초반. 다른 집 아이들은 안정적인 직장에 다니고 있는데 제대로 된 직장도 없이 아르바이트나 전전하는 나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엄마와 그런 엄마에게 인정받고 싶지만 하는 일마다 잘 되지 않는 나. 서로의 못마땅한 면을 바라보던 두 사람은 눈만 마주치면 싸우곤 했다.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이렇게 살다가 둘 중에 하나는 죽겠구나 싶은 순간에 이르렀다. 수중에 모아 놓은 돈 한 푼 없었지만, 엄마와 따로 살기 위해 끊임없이 SH 공사의 문을 두드렸다. 그러던 2012년의 가을, SH 공사에서 원룸 임대 당첨 소식이 들려왔다. 원룸 임대 주택에 들어가기 위해 필요한 금액은 13,617,000원이었다. 이 돈만 있으면 10월 29일에 SH 공사의 원룸 임대 주택에 들어갈 수 있었다. 


지금처럼 서울시에서 청년들을 위한 대출이 가능한 시스템도 전혀 마련되어 있지 않은 상황이었으므로 직장도, 꾸준히 들어오는 월급도 없던 내게 은행 대출은 정말 꿈만 같은 존재였다. 이미 엄마에게는 한 번 손을 벌린 전적이 있었으므로 말조차 꺼내기 어려운 상황이었을뿐더러 엄마가 나의 독립을 반길리 없었다. 하지만 독립이 너무나도 간절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당첨되는 순간 이 돈을 어디서 어떻게 마련하면 좋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불현듯 떠오른 생각. 


아, 10만 원씩, 130명에게 펀딩을 받으면 어떨까?

하고 말이다. 텀블벅 등 소셜펀딩이 한창 시작되던 시기였고, 사람들에게 소셜 펀딩이라는 단어가 그리 낯선 단어는 아니었다. 그렇게 130명의 서포터스를 찾는 독립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2012년 10월 10일 블로그에 [소셜펀딩] 신*의 독립 프로젝트 - 130명의 서포터스를 찾아라! 는 이름으로 글을 올렸고, 펀딩을 받게 되면 2012년 12월부터 매달 최소 1명에게 10만 원씩 연 단리로 4%씩 상환하겠다는 내용이었다. 3년 내에 모두에게 상환을 마무리하겠다고 밝혔다. 서포터스 신청은 2012년 10월 11일부터 2012년 11월 10일 밤 12시까지 한 달간 받았으며 애초에 130명이 모이지 않으면 프로젝트를 취소하겠다고 공지했다.



그리고 서포터스 마감일은 2012년 11월 10일 밤 12. 두둥. 30명의 서포터스가 나의 독립을 응원해 주었다. 다양한 응원의 메시지와 함께 어린 시절 친구, 회사 동료, 나를 전혀 모르고 있던 페이스북 친구까지 전혀 상상하지 못한 사람들이 나의 서포터스가 되어 주었다. 천만 원이 부족해 애초에 계획했던 SH 공사 원룸은 포기해야 했지만, 처음 공지한 내용과 달리 프로젝트를 취소하지 않고 돈을 보내주시면 그 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집에 들어가 보겠다고 서포터스에게 계좌번호가 담긴 메일을 보냈다. 그리고 최종 스물 세명의 서포터스가 입금을 해 주셨다. 


결국 내 생에 처음으로 가족의 도움 없이 독립을 이루어낼 수 있었다. 은평구에 있는 보증금 200만 원에 월세 30만 원짜리 집을 구했다. 독립과 함께 내 삶은 조금씩 나아졌고, 2014년 9월 23일 스물세 번째 서포터스에게 마지막 입금을 하면서 독립 프로젝트의 막이 내려졌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

사실 첫 번째 독립은 고등학교를 마치고 대학교에 들어오면서 100% 부모님의 도움으로 했던 독립이었다. 나를 가장 힘들게 하는 가족들, 가족들로부터 심리적으로나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내게는 이미 힐링이었다. 두 번째 독립도 마찬가지였다. 독립이 그토록 절실했던 이유는 가족과의 상황 안에서 더 이상 내 감정을 컨트롤할 수 없는 상황에까지 이르렀기 때문이었다. 



사람과의 관계 때문에 힘들었던 첫 번째 직장에서 심리 상담을 받을 때도 그랬다. 회사를 그만두게 되면서 나를 옥죄고 힘들게 하는 상황이 종결되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심리상담을 더 이상 받을 필요가 없어졌다. 

스스로 어찌할 수 없었던 힘든 감정들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그러한 힘든 감정들을 끊임없이 양상 해내는 상황에서 벗어나는 길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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