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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 26 경진일 신사일]

7월 4일 경진일과 75신사일

by 백승호

7월 4일 경진일 庚辰日

어젯밤부터 오늘 새벽까지 비가 엄청나게 내려 길을 나서지 못하고 머물렀다. 『양승암집」을 보기도 하고 바둑도 두면서 시간을 보냈다. 부사와 서장관이 와서 상방에 모였다. 또 다른 사람들을 불러 물 건널 방도를 물었다. 한참 있다가 모두 돌아갔다. 별다른 좋은 방법이 없는 모양이다.

自昨夜達曙大霔, 留行. 看楊升菴集, 或圍碁消閒. 副使書狀來會上房. 又招行中廣詢渡水之策. 良久盡罷去 似無善策也.


[해설]

7월 4일 ― 체우통원보

조선 사신단은 6월 29일 중국의 변방 지역인 통원보(通遠堡)에 도착했다. 그러나 7월 1일부터 장대비가 내려 길이 끊기고, 7월 2일에도 앞 계곡의 물이 불어나 건널 수 없다는 보고가 이어졌다. 연암은 이 며칠간의 ‘지체된 시간’을 시로 남겼는데, 그것이 바로 「체우통원보(滯雨通遠堡)」, ‘비 때문에 통원보에 머무르며’이다. 연암집 4권에 실려 있다.

체우통원보(滯雨通遠堡)

塞雨淋淋未肯休[새우림림미긍휴] : 변방에 비 주룩주룩 그칠 줄 모르네

皇華使者滯行輈[황화사자체행주] : 어명 받든 사신들 행차 길이 막혔구나

遊談從古羞牛後[유담종고수우후]: 예부터 말하길 소의 꼬리 되는 게 부끄럽다는데

眷屬還憐恃馬頭[권속환련시마두] : 마두들에게 의지하는 일행들이 도리어 가엾구나

醉裏相看非故國[취리상간비고국] : 취한 속에서 서로 바라봐도 내 고국이 아니라니

人間何世又新秋[인간하세우신추] : 어느 시대 세상인지 초가을이 또 왔네

前河報道闕舟楫[전하보도궐주즙] : 앞 강에 배 없다 기별이 전해 오니

長日無聊那可由[장일무료나가유] : 긴긴 날 지루하여 어찌해야 할까?

이 시는 변방에서 장마로 발이 묶인 사신단의 심정을 담담하게 제시하고 있다. 연암은 “비가 그칠 줄 모르고 길이 막힌 현실”을 안타까워하지만, 그 감정에는 불만보다는 겸허한 체념과 안타까움이 배어 있다. ‘권속환련시마두’라 하여 함께 고생하는 일행들을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이는 연암의 다정함과 인간적 따뜻함이 잘 드러나고 동행하는 사람을 진심으로 배려하는 연암의 마음이 잘 드러난다. ‘취리상간비고국’에서는 타향에서 느끼는 낯섦과 고독이 드러난다. 취한 채 서로를 바라보아도, 이곳은 고국이 아니다. 이 절묘한 한 구절 속에 사신의 외로움과 세월의 무상함이 압축되어 있다. ‘인간하세우신추’에서는 계절의 순환 속에서 느끼는 감회를 제시하고, 자연과 인생을 함께 관조하는 철학적 정조가 엿보인다. 마지막의 ‘전하보도궐주즙, 장일무료나가유’에서는 길이 완전히 끊긴 현실과 무료한 나날의 답답함이 절제된 어조로 표현된다. 그러나 이 무료함이야말로 연암이 세계를 관찰하고, 『열하일기』를 써 내려간 사색의 시간이었다. 「체우통원보」는 한 인간이 자연과 시간 앞에서 느낀 고독과 겸허, 그리고 멈춤 속에서 피어난 사색을 담은 ‘여유의 미학’이라 할 수 있다. 그는 현실의 제약을 한탄하지 않고, 그 속에서 자신을 성찰하는 내면의 자유를 얻었다.




7월 5일 신사일 辛巳日

1. 날은 맑았지만, 물에 막혀서 길을 나서지 못했다.

점방 주인이 방 한편에 있는 캉炕의 연기가 빠지는 방고래를 열고 기다란 가래로 재를 긁어냈다. 나는 그 틈에 얼른 캉炕의 구조를 대강 살폈다. 먼저 한 자 가량 높이로 캉炕바닥을 쌓아서 평평하게 만든다. 그런 다음, 벽돌을 깨뜨려 바둑돌 놓듯이 굄돌을 놓고 그 위에는 벽돌만 깐다.

벽돌 두께는 원래 가지런했기 때문에 그걸 깨서 굄돌로 받쳐도 기우뚱거리지 않고, 벽돌의 생김새가 본래 가지런하므로 나란히 깔아 놓으면 틈이 생기지 않는다. 방고래 높이는 겨우 손이 드나들 정도이고, 굄돌은 번갈아가면서 죽 이어져 서로 불목이 된다. 불이 불목에 이르면 안쪽에서 불꽃을 빨아들이듯 순식간에 넘어가기 때문에, 불꽃이 재를 휘몰아서 방고래 안으로 미어지듯 한꺼번에 들어간다. 여러 불목이 서로 잡아당기는 형국이 되어, 도로 나올 새가 없이 쏜살같이 굴뚝으로 빠져나간다. 굴뚝의 깊이는 한 길이 넘는다. 이게 바로 조선말로 '개자리 大座라고 한다. 재는 항상 불길에 휩쓸려 나와 방고래 속에 가득 쌓인다. 그래서 3년에 한 번씩 고래목을 열고 재를 쳐내야 한다. 부뚜막 앞에 땅을 한 길 가량 우묵하게 파서 만들고, 아궁이를 위로 향하게 만든 다음 땔나무를 거꾸로 집어넣었다.

부뚜막 옆에는 큰 항아리처럼 생긴 구덩이가 있는데 그 위에 돌덮개를 덮어서 바닥과 평평하게 한다. 구덩이 안쪽은 텅 비어있었는데, 여기서 바람이 일어 불길을 방고래까지 몰아넣었다. 그래서 연기는 조금도 아궁이 밖으로 새어 나오지 않는다.

阻水留行 店主開其內炕烟溝 持長柄鍬子扱灰 余於是略觀炕制大約 先築炕基高尺有咫 爲地平 然後以碎甎碁置爲支足 而舖甎其上而已 甎厚本齊 故破爲支足 而自無(孼-子+足)蹩 甎體本匀 故相比排舖 而自無罅隙 烟溝高下 劣容伸手出納 支足者 遞相爲火喉 火遇喉則必踰若抽引然 火焰驅灰闐騈而入 衆喉遞呑迭傳 無暇逆吐 達于烟門 烟門一溝深丈餘 我東方言‘犬座’也 灰常爲火所驅 落滿阬中 則三歲一開烟炕一帶 扱除其灰 竈門坎地一丈 仰開炊口 爇薪倒揷 竈傍闕地如大瓮 上覆石盖 爲平地 其中空洞 生風 所以驅納火頭於烟喉 而點烟不漏也


2. 또 굴뚝을 세우는 방법은 큰 항아리만 한 땅을 파고 벽돌을 사리탑처럼 쌓아 올려 지붕 높이에 맞춘다. 연기가 그 항아리 속으로 들어가 연기를 쭉쭉 빨아들인다. 이 방법은 정말 절묘한 방식이다. 대개 굴뚝에 틈이 생기면 한 줄기 바람에도 아궁이의 불이 꺼지는 법이다. 우리 조선의 온돌은 항상 불이 밖으로 삐져나와서 방이 고루 따뜻하지가 않다. 그 잘못은 모두 굴뚝에 있는 것이다. 조선의 굴뚝은 싸리로 엮은 용수에 종이를 바르거나 혹은 나무판자로 통을 만들어 세웠다. 처음 세운 굴뚝의 흙 축대에 틈이 생기거나, 종이가 낡아 떨어지거나, 혹은 나무통이 벌어지면, 연기가 새는 것은 막을 길이 없다. 또 바람이라도 한 번 크게 불면 연통은 아무런 기능도 하지 못한다.

又烟門之制 闕地如大瓮 甎築狀如浮圖 高與屋齊 烟落瓮中 如吸如吮 此法尤妙 大約烟門有隙 則一線之風 能滅一竈之火 故我東房堗 常患吐火 不能遍溫者 責在烟門 或杻籠塗紙 或木板爲桶 而初竪處土築有隙 或紙塗弊落 或木桶有闖 則不禁漏烟 大風一射 則烟桶爲虛位矣


3. 우리나라는 가난하지만, 책 읽는 것은 좋아한다. 수많은 형제들이 오뉴월에도 코끝에 항상 고드름이 달릴 지경이니, 이 방식을 배워 가서 한겨울의 고생을 덜 한다면 좋겠다.

이런 생각을 하는데, 변계함이 한마디 한다.

“이곳 캉 구들은 좀 이상해서 우리나라 온돌만 못한 것 같아요.”

내가 물었다.

"뭐가 못하다는 것인가? “

변 군이 말했다.

"우리는 기름 먹인 종이 네 장을 반듯하게 깔아서 옥돌 같은 빛을 내고 반질 반질하여 얼음처럼 매끄럽습니다.

어떻게 중국 온돌하고 비교하겠어요?"

내가 설명했다.

"이곳 구들이 우리나라의 구들보다 못하다는 건 맞는 말이야. 하지만 중국 캉의 구들 놓는 방법을 그대로 모방하여 우리나라 온돌방에 적용하고, 그 위에 기름 먹인 장판지를 깐다면 그걸 누가 막겠나? 우리나라 온돌에는 여섯 가지 문제점이 있는데 아무도 이걸 말하는 사람이 없단 말이야. 내 한번 얘기해 볼 테니 떠들지 말고 조용히 들어 보게나.

진흙을 이겨서 귓돌을 쌓고 그 위에 구들장을 얹어서 구들을 만드는데, 그 돌의 크기나 두께가 애초에 가지런하지 않으니 조약돌로 네 귀퉁이를 괴어서 흔들거리지 않게 할 수밖에 없지. 그렇지만 불에 달궈지면 돌이 깨지고, 발랐던 흙이 마르면서 늘 부스러진다네. 그게 첫 번째 문제점이네. 구들돌 표면이 울퉁불퉁해서 우리나라 구들집의 모양이 움푹한 데는 흙으로 메워서 평평하게 하니, 불을 때도 골고루 따뜻하지 못한 게 두 번째 문제점이네. 불고래가 높은 데다 널찍해서 불길이 서로 맞물리지 못하는 게 세 번째 문제점이라네. 또, 벽이 부실하고 얇아서 툭하면 틈이 생기지 않는가? 그 틈으로 바람이 새고 불이 밖으로 내쳐서 연기가 방 안에 가득하게 되는 게 네 번째 문제점일세. 불목이목구멍처럼 되어 있지 않아 불길이 안으로 빨려 들어가지 않고, 땔감 끝에서만 불이 타오르는 게 다섯 번째 문제점이네. 또 방을 말리려면 땔감 백 단을 때야 하는 데다 그 때문에 열흘 안에는 입주를 못하니, 그것이 여섯 번째 문제점일세. 그에 반해, 중국 온돌의 구조를 보게나. 자네와 함께 벽돌 수십 개만 깔아 놓으면, 웃고 떠드는 사이에 벌써 몇 칸 온돌이 만들어져 그 위에 누워 잘 수도 있을 걸세. 어떤가?"

我念‘吾東家貧 好讀書 百千兄弟等鼻端 六月恒垂晶珠 願究此法 以免三冬之苦’ 卞季涵曰 “炕法終是恠異 不如我東房法” 余問“所以不如者何等” 卞君曰 “何如鋪得四張附油芚 色似火齊 滑如水骨耶” 余曰 “炕不如房則是也 其造堗之法 但效此而施之於房 鋪得油芚 有誰禁之 東方堗制 有六失而無人講解 吾試論之 君靜聽無譁 泥築爲塍 架石爲堗 石之大小厚薄 本自不齊 必疊小礫 以支四角 禁其躄蹩 而石焦土乾 常患頹落 一失也 石面凹缺處 補以厚土 塗泥取平 故炊不遍溫 二失也 火溝高濶 焰不相接 三失也 墻壁踈薄 常苦有隙 風透火逆 漏烟滿室 四失也 火項之下 不爲遞喉 火不遠踰 盤旋薪頭 五失也 其乾爆之功 必費薪百束 一旬之內 猝難入處 六失也 何如與君共鋪數十甎 談笑之間 已造數間溫堗 寢臥乎其上耶


4. 밤에 여러 사람과 술을 몇 잔 마셨다. 밤이 깊자, 취해서 돌아와 잠자리에 들었다. 내 방은 정사의 맞은편인데, 가운데를 베 휘장으로 가려서 방을 나누었다. 정사는 벌써 깊이 잠들었다. 몽롱한 상태에서 담배를 막 피워 물었을 때다. 머리맡에서 별안간 발자국 소리가 난다. 깜짝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거기 누구냐?”

“도이노음이오都爾鹵音伊吾.”

대답 소리가 하도 이상하게 들려서 나는 다시 고함을 질렀다.

“거기 누구냐?”

더 큰 소리로 대답한다.

"소인은 도이노음이요."

이 소란에 시대와 상방 하인들이 모두 늘라 잠이 깼다. 뺨을 때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등을 떠밀어서 문 밖으로 끌고 가는 것 같았다. 알고 보니 그는 밤마다 우리 일행의 숙소를 순찰하면서 사신 이하 모든 사람의 수를 헤아리는 갑군이었다. 깊은 밤 잠든 뒤의 일이라 지금까지는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갑군이 자신을 '도이노음'(되놈) 이라 하다니, 정말 배꼽 잡을 일이다. 우리나라 말로 오랑캐를 '되놈'이라 한다. 갑군이 ‘도이’ 라고 한 것은 ‘도이島夷’의 와전이고, ‘노음鹵音’은 낮고 천한 이를 가리키는 말이니 이는 조선말 '놈'의 와전이다. ‘이오伊吾’란 웃어른에게 여쭙는 말이다. 그래서 그는 조선 사람이 알아듣도록 '되놈이요' 라고 말했던 것이다. 갑군은 여러 해 동안 사신 일행을 모시는 사이에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말을 배웠는데, '되놈'이란 말이 귀에 익었던 모양이다. 한바탕 소란 때문에 그만 잠이 달아나고 말았다. 이어서 수많은 벼룩 떼가 날뛰었다. 정사도 잠이 달아났는지 촛불을 켠 채 날을 새고 새벽을 맞았다.

夜與諸君略飮數杯 更鼓已深 扶醉歸臥 與正使對炕 而中隔布幔 正使已熟寢 余方含烟矇矓 枕邊忽有跫音 余驚問汝是誰也 答曰 “擣伊鹵音爾幺” 語音殊爲不類 余再喝 “汝是誰也” 高聲對曰 “小人擣伊鹵音爾幺” 時大及上房廝隷 一齊驚起 有批頰之聲 推背擁出門外 盖甲軍 每夜巡檢一行所宿處 自使臣以下點數而去 每値夜深睡熟 故不覺也 甲軍之自稱擣伊鹵音 殊爲絶倒 我國方言 稱胡虜戎狄曰擣伊 盖島夷之訛也 鹵音者 卑賤之稱 爾幺者 告於尊長之語訓也 甲軍則多年迎送 學語於我人 但慣聽擣伊之稱故耳 一塲惹鬧 以致失睡 繼又萬蚤跳踉 正使亦失睡 明燭達曙


[해설]

7월 5일 ― 캉(炕)과 조선의 구들(온돌), 그리고 굴뚝

1. 박지원은 『열하일기』에서 중국의 캉(炕)과 조선의 구들(온돌)을 세밀히 비교하며, 일상 속 기술에도 문명의 합리성이 깃들어 있음을 보여준다. 그가 머물던 통원보의 여관에서 주인이 방고래를 청소하는 장면을 본 것은 우연이었지만, 연암은 그 틈에 즉시 캉의 구조를 자세히 살피며 과학자의 눈으로 그 원리를 분석했다.

2. 중국의 캉은 벽돌을 일정한 높이로 쌓아 바닥을 평평하게 만든 뒤, 그 아래에 불길이 통하는 통로를 촘촘히 연결한 구조였다. 불길은 좁은 불목들을 따라 흡입되듯 이동하며 열이 방 전체로 고르게 퍼졌다. 이렇게 불길이 순환하니 방은 빠르게 데워지고, 땔감도 적게 들었다. 불이 지나간 재는 방고래 속으로 흘러들어 가 쌓이므로, 3년에 한 번만 고래목을 열어 재를 치우면 되었다. 벽돌의 두께가 일정하고 표면이 평평하여 바닥이 고르게 열을 받았고, 방 전체의 온도가 일정하게 유지되었다. 연암은 이런 점에서 캉의 구조가 “참으로 절묘하다”라고 칭찬하며, 그 속에 이용후생의 이치를 보았다. 즉, 단순한 편리함이 아니라 사람의 삶을 따뜻하게 하는 합리적 기술이라는 점에서 감탄한 것이다.


3. 반면 조선의 구들은 진흙을 다져 그 위에 돌을 얹어 만드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돌의 크기와 두께가 고르지 않아 균형을 맞추기 어렵고, 불에 달궈지면 돌이 깨지거나 진흙이 부서졌다. 불길이 한쪽으로만 퍼져 방이 고르게 덥지 않았으며, 불고래가 높고 넓어 불꽃이 서로 이어지지 못했다. 벽이 얇고 허술해 바람이 틈으로 스며들면 불길이 역류했고, 연기가 방 안으로 새어 나와 냄새와 그을음을 남겼다. 연암은 “우리 동방의 구들은 항상 불이 토해져 방이 고루 따뜻하지 않다”라고 지적하며, 그 원인이 굴뚝의 구조에 있다고 보았다.

중국의 굴뚝은 큰 항아리만큼 땅을 파서 벽돌로 빽빽이 쌓아 지붕 높이까지 세운 구조였다. 굴뚝 속의 빈 공간에서는 자연스럽게 바람이 일어나 불길을 빨아들였기 때문에, 연기가 새거나 불이 꺼지는 일이 없었다. 연기가 굴뚝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흡입형 구조였던 것이다. 이에 비해 조선의 굴뚝은 싸리로 엮은 통에 종이를 바르거나 나무로 만든 원통형 구조였는데, 종이가 낡거나 나무가 벌어지면 틈새로 연기가 새어 나갔다. 바람이 세게 불면 연통의 기능이 완전히 마비되어, 오히려 연기가 방 안으로 밀려 들어오기도 했다. 연암은 이러한 굴뚝의 허술함을 “온돌의 가장 큰 결함”으로 판단했다.


4. 그러나 그는 중국의 문물을 맹목적으로 숭배하지 않았다. 오히려 “캉의 방법을 그대로 본받되, 우리 현실에 맞게 적용하면 된다”라고 말하며 단순한 모방이 아니라 법고창신의 태도를 보였다. 즉, 옛것을 본받되 그 형식을 그대로 따르지 않고, 새로운 시대와 현실에 맞게 창조적으로 변통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 온돌의 여섯 가지 결함을 조목조목 지적하면서, 외양의 번지름함에 만족하는 변계함의 말을 부드럽게 반박했다. 연암에게 중요한 것은 과거의 자존이 아니라, 백성의 생활을 이롭게 하는 실용의 합리성이었다. 그는 기술의 우열을 논하려 한 것이 아니라, 그 기술이 인간의 삶을 얼마나 편리하게 하고 따뜻하게 만드는 가를 따졌다. 이것이 바로 이용후생의 실학정신이자, 그의 사상의 중심이었다.


5. 결국 캉과 구들의 비교, 굴뚝의 분석은 단순한 기술 관찰이 아니라 문명을 새롭게 이해하려는 사상적 탐구였다. 연암은 타문화의 장점을 인정하되, 그것을 그대로 모방하지 않고 이치에 따라 변통하려는 개혁적 태도를 보였다. 즉, 그가 본 중국의 난방 기술은 ‘우월한 문명’이 아니라 배움의 자극제였고, 조선의 온돌은 ‘비교의 대상’이 아니라 개선의 과제였다. 이처럼 박지원은 일상의 기술 속에서도 인간의 생활을 향상하는 길을 찾았다. 그에게 “캉과 구들의 차이”는 단지 난방의 문제가 아니라, 법고창신으로 새 시대의 합리적 문명을 모색하고, 이용후생으로 백성의 삶을 따뜻하게 만들려는 실학자의 신념을 실천한 구체적 사례였다.

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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