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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 24 기묘일 02]

-사람을 알아보는 연암의 안목

by 백승호

1. 내가 객점 주인에게 물었다.

“이 마을에도 수재秀才(과거 응시생)나 서당 훈장이 계시는지요?”

객점 주인이 대답했다.

“외지고 오가는 사람도 적은 이런 촌구석에 어찌 훈장노릇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작년 가을에 마침 수재 한 명이 세관 관리를 따라 연경에서 내려오는 도중에서 이질에 걸려 이곳에 남아 머무르게 되었지요. 여기 사람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는데, 마을 사람들이 온 힘을 다해 그를 돌보았지요. 겨울이 지나고 봄이 되어서 겨우 낫게 되었지요. 그 선생은 문장도 뛰어나고, 동시에 만주글자로 상소문도 쓸 줄 안답니다. 그는 한동안 임시로 이곳에 머물러 있었는데, 한두 해 동안 글방을 열어 이곳 아이들을 성심껏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병을 치료해 준 큰 은혜를 갚으시겠다는 거지요. 지금도 저 관제묘에 계십니다.”


내가 물었다.

"그럼, 잠깐 주인이 저를 안내 좀 해 주실 수 있을까요?"

객점 주인이 말했다.

"다른 사람의 안내를 받을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주인은 손을 들어 관제묘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지붕이 높다랗게 솟은 큰 사당이, 바로 거기입니다."


2. 내가 물었다.

"그 선생의 성함은 어떻게 되시는지요?"

객점 주인이 대답했다.

"이 마을 사람들은 모두 그를 부富 선생이라 부릅니다."

내가 물었다.

"부 선생의 연세는 얼마나 되었소?"


객점 주인이 대답했다.

"나리께서 직접 가셔서 물어보십시오."

그러고는 주인은 캉炕 안으로 들어가서 붉은 종이 수십 장을 들고 나와서 집어 보여주면서 말했다.

“이것이 그 부 선생께서 손수 써 주신 글씨입니다."

그 붉은 종이의 왼쪽 가장자리에는'아무개의 친척이 당신께 아립니다. 모년, 모월, 모일에 어른께서 참석하셔서 잔치를 빛내 주시길 공손히 청하옵니다.'라고 가느다란 글씨로 쓰여 있었다.


객점 주인이 말했다.

"이것은 제 아우가 지난봄에 데릴사위를 들일 때, 그 선생에게 부탁해서 쓴 청첩장입니다."

청첩장의 글씨를 대충 살펴보니, 겨우 글자 모양이나 갖춘 정도의 솜씨였다. 다만 수십 장의 종이에 쓴 글씨의 크기가 크지도 작지도 않은 것이 마치 실에 구슬을 꿰어 놓은 것 같기도 했고, 한 목판으로 글자를 찍어 낸 것 같기도 했다.

余問店主, 「此邨裏可有秀才塾師麽。」 店主曰, 「邨僻少去處, 那有學究先生, 去年秋間 偶有一個秀才, 從稅官京裡來的, 一路上染得暑痢。 落留此間, 多賴此處人, 一力調治, 經冬徂春, 快得痊可。那先生文章出世, 兼得會寫滿州字情願。 暫住此間, 開了一兩年黌堂, 敎授些此邨小孩們。 以酬救療大恩, 現今坐在了關聖廟堂裡。」 余曰, 「可得主人暫勞鄕導。」 店主曰, 「不必仰人指導。」 擧手指之曰, 「這個屋頭出首的大廟堂是也。」 余問, 「這個先生姓甚名誰。」 店主曰, 「一邨坊都叫他富先生。」 余問, 「富先生多少年紀。」 店主曰 ,「大公子儞自去問他。」 店主因走入炕裡, 手拿紅紙數十片拈示。 道,「此乃那富先生親手墨蹟。」 那紅紙左沿, 細書,「某位舍親尊台, 某年月日, 恭請台駕, 電莅敝筵。」 店主道, 「俺門兄弟, 前春招婿時, 倩他請席。」 刺紙大約, 僅能成字, 而數十紙所寫字樣, 無大無小, 如珠貫絲, 如印一板。

3. 나는 마음속으로 그 수재는 송나라 인종 때 정치가였던 부정공富鄭公 부필富弼후손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곧바로 시대를 불러서 함께 관제묘를 찾아갔다. 사당은 조용했고 인기척이 없었다. 주위를 둘러보며 구경을 하고 있는데, 오른쪽 행랑채에서 아이들이 글을 읽는 소리가 들렸다. 돌연 한 아이가 문을 열고 머리를 내밀고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걸어 나와서는 우리를 쳐다보지도 않고 그냥 걸어갔다. 나는 그 아이를 뒤따라가면서 물었다.

"너희 스승님은 어디 계시느냐?"

아이가 말했다.

"뭐라고요?"

내가 말했다.

"부 선생 말이다."

아이는 조금도 잘 새겨들으려 하지도 않고, 입으로 뭐라고 중얼거리더니 소매를 펄럭이며 가 버린다.

내가 시대에게 말했다.

"그 선생은 분명히 이곳에 있을 것이다."

그래서 곧바로 오른쪽 행랑채 쪽으로 가서 문을 열어보았다. 네댓 개의 빈 의자만 놓여 있을 뿐 사람의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4. 내가 문을 닫고 막 돌아서려고 하는데 아까 그 아이가 한 노인을 데려고 온다. 아마 부 선생이라는 사람 같았다. 그는 방금 이웃에 바람을 쐬러 나갔는데, 아이가 급히 가서 손님이 왔다고 알려서 돌아오는 모양이었다. 언뜻 얼굴을 바라보았더니 시문을 짓고 읊는 선비의 기품은 전혀 없었다. 내가 앞으로 다가가서 공손히 읍하자, 노인이 느닷없이 내 허리를 껴안고는 절구질을 하듯이 들었다 놓았다. 그리고 다시 손을 잡고 흔들면서 얼굴 가득히 웃음을 지었다. 처음에는 크게 놀랐고, 그다음에는 상당히 불쾌했다. 내가 여쭈었다.

"당신께서 부공富公이신지요?"

그 늙은이는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영감께서 어디에서 이 미천한 관리의 성을 들어 아십니까?"


내가 말했다.

"저는 오래전에 선생의 우레와 같은 명성을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습니다."부 선생이 물었다.

"선생께서는 성함은 어떻게 되시는지 알고 싶습니다."

내가 이름을 써서 보여 주었다. 그도 이름을 써 보이면서 말했다.

“이름은 부도삼격富圖三格이고, 호는 송재松齋이며 자는 덕재德齋라고 합니다.”

내가 물었다.

"삼격이라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부 선생이 대답했다.

"저의 이름입니다."

내가 물었다.

"고향과 벼슬을 하신 곳이 어디입니까?"

부 선생이 대답했다.

"저는 만주양람기滿洲鑲藍旗사람입니다."

부 선생이 물었다.

"선생께서는 이번에 가면 면가面駕(황제를 배알함)하시는지요?"

내가 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부 선생이 말했다.

"만세야萬歲爺(황제)께서 직접 당신들을 맞아들여 만나는 것인지요?"

내가 말했다.

"황제께서 만일 우리를 접견하신다면 선생을 추천해서 작은 벼슬이라도 얻을 수 있도록 해보겠습니다."

부 선생이 대답했다.

"만일 그렇게 해 주신다면, 박공차公의 큰 은덕은 결초보은해도 다 못 갚겠지요."


5. 내가 물었다.

"나는 강물에 막혀서 이곳에 머무른 지가 벌써 며칠이나 되었소. 정말 할 일 없이 온종일 시간을 보내기가 어려운데, 부 선생에게 어찌 좀 볼 만한 책이 있으면 며칠 빌려볼 수가 있겠습니까?"

부 선생이 말했다.

"별로 없습니다. 예전에 연경에 있을 때, 제 친척인 절공折公이 명성당鳴盛堂(북경의 유리창)이라는 이름으로 책을 판각하는 가게를 새로 열었지요. 그때의 책목록들이 마침 행장 속에 들어 있는데, 만일 소일로 삼아 보시겠다면 빌려 드리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영감께서는 지금 잠시숙소로 돌아가셔서 진짜 청심환과 조선 부채 중에 품질이 좋은 것을 골라서 답례로 주신다면 만남의 징표로 삼아 영감께서 진실한 마음으로 교분을 맺겠다는 뜻을 보이시면, 그때 책 목록을 빌려 드려도 늦지 않겠지요."

나는 그의 생김새와 말투를 보니 뜻이 비루하고 용렬하여 더불어 말을 섞을 위인이 못되었다. 오래 앉아 있을 수가 없어서 바로 인사를 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부 선생은 문밖까지 배웅을 나와 공손히 읍을 올리며 또 물었다.

“귀국의 비단을 살 수 있을까요?"

나는 대답도 하지 않고 바로 돌아왔다.

意其秀才爲富鄭公苗裔, 卽喚時大, 同去尋那廟堂裡來。 寂無人聲, 周回觀玩, 右廂裡有小兒讀書聲。 俄有一兒開戶, 探頭一張, 因走出, 不顧而去。 余追問童子, 「儞們的師父坐在那裡麽。」 童子道, 「甚麽。」 余曰, 「富先生。」 童子畧不採聽, 口裏喃喃, 拂袖而去。 余謂時大曰, 「那先生必在這裡。」 遂直向右廂, 一推開戶, 有四五副空椅, 並無人跡。 余闔戶恰裁轉身, 那童子引一老者而來, 想是富也。 適纔閒走比鄰, 那童子忙去報客而回也。 乍觀面目, 全乏文雅氣。 余向前肅揖, 那老者不意抱余腰脅, 盡力舂杵, 又把手顫顫, 滿堆笑臉。 余初則大驚, 次不甚喜, 問,「尊是富公麽。」 那老者大喜道, 「儞老那從識僚賤姓。」 余曰, 「吾久聞先生大名如雷灌耳。」 富曰, 「願聞尊姓大名。」 余書示之。 富自書其名曰, 「富圖三格, 號曰齋, 字曰德齋。」 余問,「甚麽三格。」 富曰, 「是吾姓名也。」 余問,「貴鄕華貫在何地方。」 富曰, 「俺滿洲鑲藍旗人。」

富問, 「儞老此去 當面駕麽。」 余曰, 「甚麽話。」 富曰 「萬歲爺要當接見儞們。」 余曰, 「皇上萬一接見時, 吾當保奏儞老得添微祿麽。」 富曰, 「倘得如此時, 朴公大德, 結草難報。」 余曰, 「吾阻水留此已數日, 眞此永日難消。 儞老豈有可觀書冊, 爲借數日否。」 富曰, 「無有, 往在京裏時, 舍親折公, 新開刻舖, 起號鳴盛堂。 其群書目錄, 適在槖中, 如欲遣閒時, 不難奉借。 但願儞老此刻, 暫回携得眞眞的丸子, 淸心元, 高麗扇子, 揀得精好的作面幣, 方見儞老眞誠結識, 借這書目未晩也。」 余察其容辭志意, 鄙悖庸陋, 無足與語, 不耐久坐, 卽辭起。 富臨門揖送, 且言,「貴邦明紬可得賣買麽。」 余不答而歸。


[해설] 위선을 꿰뚫는 연암의 사람 보는 안목

1. 박지원의 『열하일기』는 단순한 여행기가 아니라 인간과 세상을 관찰하고 풍자한 사회 비평문이다. 그는 청나라를 여행하면서 수많은 인물들을 만났지만, 그 가운데 ‘부 선생’ 이야기는 유독 눈길을 끈다. 연암은 한때 명망 있는 수재로 알려진 이 인물을 만나면서, 겉과 속이 다른 인간의 실상을 날카롭게 드러낸다. 이러한 인물 묘사는 단순한 풍자에 그치지 않고, 연암이 평생 견지해 온 인간관과 가치관을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인품과 사람을 보는 기준이 잘 드러난 『나의 아버지 박지원』의 기록을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

2. 『나의 아버지 박지원』 20쪽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실려 있다.

아버지는 어릴 적부터 말과 의론이 엄정하셨다. 겉으로만 근엄하고 속마음은 그렇지 못한 자나 권력의 부침에 따라 아첨을 하는 자들을 보면 참지 못하셨으니, 이 때문에 평생 남의 노여움을 사고 비방을 받는 일이 아주 많았다. 외삼촌 지계공(이재성)이 쓴 제문에 이르기를.


가장 참지 못한 일은 위선적인 무리와 상대하는 일.

그래서 소인배와 썩은 선비들이 늘 원망하고 비방했었지.

라고 하였으니 가히 아버지의 진면목을 드러냈다.

또 세상의 벗사귐은 오로지 권세와 이익만을 좇았다.

그리하여 여기에 붙었다 저기에 붙었다 하는 세태가 꼴불견이었는데,

아버지는 젊을 때부터 이러한 세태를 미워하셨다.


3. 이 인용문에서 알 수 있듯, 연암이 가장 경멸한 것은 위선이었다. 겉으로는 도덕을 말하면서 속으로는 이익을 좇는 사람, 권력의 흐름에 따라 태도를 바꾸는 사람을 그는 가장 싫어했다. ‘부 선생’ 이야기는 바로 이런 인간형을 풍자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연암이 머물던 시골 객점의 주인은 ‘부 선생’을 문장이 뛰어난 수재라고 자랑했다. 그러나 실제로 만난 부 선생은 교양도 예의도 없이, 손님을 맞이하자마자 끌어안고 들었다 놓는 무례한 인물이었다. 대화 속에서도 그는 학문적 깊이가 전혀 없었으며, 연암이 책을 빌려달라 하자 “좋은 청심환과 조선 부채를 선물로 주면 빌려주겠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행동은 학문을 거래의 수단으로 삼는 천박한 태도이며, 연암이 혐오하던 ‘썩은 선비’의 전형이었다.

4. 이 장면에서 연암은 직접적인 비난 대신, 담담한 서술과 세밀한 행동 묘사를 통해 인물의 실체를 드러낸다. 마을 사람들이 떠받드는 ‘수재’의 허상을 스스로 폭로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는 연암 특유의 풍자 방식으로, 사실의 묘사를 통해 진실을 드러내는 문체라 할 수 있다. 연암에게 진정한 학문은 글씨체나 지식의 양이 아니라, 인품과 진심이 드러나는 삶의 태도였다. 그런 점에서 부 선생은 단지 한 사람의 일화가 아니라, 위선과 허식을 비판하는 상징적 인물로 읽힌다.


5. ‘부 선생’ 이야기는 연암 박지원이 사람을 평가할 때 무엇을 중시했는지를 분명히 보여준다. 그는 겉으로 드러나는 명예나 지식보다 진심과 품성을 더 높이 보았다. 『나의 아버지 박지원』에서 말하듯, 그는 “위선적인 무리와 상대하는 일”을 가장 참지 못했으며, “권세와 이익만을 좇는 세태”를 미워했다. 그러한 성정이 바로 부 선생에 대한 냉철한 시선으로 이어졌다. 연암은 한 인간의 허위 속에서 시대의 부패한 가치관을 꿰뚫어 보고, 진정한 선비 정신이란 무엇인가를 묻는다.

『열하일기』의 이 짧은 일화는 그가 평생 지키고자 한 신념인 진실한 마음, 위선에 대한 단호한 거부를 가장 생생하게 보여주는 장면이다. 연암의 눈은 언제나 겉모양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과 진실을 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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