뭘 자꾸 물어봐! 갖다 버리라고 하셨다니까
갖다 버려라.
저 문장의 주어는 바로 나다.
그렇다. 아빠는 남편에게 나를 버리라 하셨다.
재가서비스 일주일째. 요양보호사의 아침 보고로 나의 아침이 시작된다. 그럭저럭 조용한 삶이 이어지고 있었다. 지난 사건 이후 아빠가 온갖 성질을 내며 오지 말라 엄포를 놨으나 그렇다고 진짜 안 가면 난리가 날게 뻔하므로 남편이 이틀에 한 번 정도는 드시고 싶어 하시는 음식-대부분 연어초밥-을 포장해서 갔다. 그날도 무얼 사갈까요 물어보는 남편의 전화에 대뜸 "내 딸은 어디다 숨겨놨냐?"라고 답하신 아빠.
발길을 끊은 지 2주. 드디어 내 안부를 궁금해하셨다는 사실에 약간은 감격스러워졌다. 그러나 나와 아빠를 격리한 이유에 대해 아빠가 납득할 만한 마땅한 명분이 없었기에 준비해 둔 변명을 대접하라 남편에게 미리 전달해 뒀고 그 내용은 이렇다.
' 혹시 아빠가 나 궁금해하면 그냥 아프다고 해. 몸이 안 좋아서 입원해 있다고. 아빠는 나 아프다고 하면 겁먹으니까 약발이 먹힐 수도 있어'
솔직하게 아버님이 너무 괴롭혀서 못 온다고 말하자는 남편을 말리며 내가 내민 카드는 공갈 비슷한 거라 할 수도 있겠다. 근데 따져보자면 아예 공갈은 아니지 뭐! 입원하기 일보 직전 상태는 맞으니까. 그리고 딸이 아파 입원을 했다면 걱정부터 하지 않을까. 하고 떠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요양보호사는 아빠가 치매라고 100프로 확신하는 눈치였지만 내 입원(?) 소식에 딸을 걱정하는 아빠로 돌아온다면 우리 아빠는 치매가 아님을 희망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걸 이 기회에 다시 시험해 보고 싶었다.
"아버님. 숨긴 건 아니고요.. 아파서 입원했어요. 앞으로도 저만 들를 수 있을 것 같아요."
"에잉, 걘 아픈 데가 뭐 그리 많냐. 쓰잘데기없는거 갖다 버려라!!"
남편이 별생각 없이 메시지로 옮긴 버리라는 말이 믿기질 않아서 앞 뒤 꼬리에 무슨 말이 더 붙어있진 않을까 하고 몇 번이고 물어봤다.
"뭘 자꾸 물어봐. 쓸모없으니 갖다 버리라고 하셨다니까. 지금 아버님한테 너는 안중에도 없어. 몇 번을 말해."
라는 별 반전 없는 대답에 실소로 시작한 감정선이 급작스러운 하강곡선을 그리며 결국 저 바닥까지 처박혀버렸다. 벌을 받는가 보다. 이상한 나라의 떨어져 점점 자신을 잃어가는 아빠를 또 한 번 시험해 보려는 알량한 마음의 대가를 받는 것 같다.
초기-아니 핰ㅋㅋ나 진짜 ㅋㅋㅋ나를 갖다 버리면 오빠랑 아빠랑은 생판 남남인데 어쩌려고 나를 버리래? 며느리라도 이렇게 쉽게 갖다 버리란 말은 못 하겠다ㅋㅋㅋ
중기-근데 진짜 정말 아빠가 나를 갖다 버리라고 했서????
말기-아.. 근데 어떻게 나를 버리라고 할 수 있지..? 내가 아빠한테 어떻게 했는데..
어떻게 딸을 갖다 버리라고 할 수 있는지, 아빠에게 더 이상 나는 필요한 존재가 아닌 걸까? 서러움이 북받친다. 거기다 말 그대로 남편이 나를 버리는 상황은 현시점에서 가장 무서운 배드엔딩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난폭치매(의심)+개털도 없는+성질 더러운 장인과 가진 건 그런 아빠밖에 없는 나. 그런 우리 부녀를 남편이 버리면 정말 끝이다. 바닥이다 바닥. 늘 남편이 이 상황에 지쳐 우리 관계를 파국 내버리면 어떻게 하지.. 하는 불안함을 갖고 있던 나는 결국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남편에게 추태를 부릴 수밖에 없었는데,
"오빠.. 아빠가 버리라고 했어도 나 버리면 안 돼. 내가 다 미안해. 잘할 테니까 나 버리지 마.. 알았지?"
많은 뜻과 감정을 터질 듯 꾹꾹 눌러 담아 무겁게 전달한 처절하고 염치없는 그러나 절실함으로 꽉 봉인해 건넨 나의 카톡 메시지에 남편은 간결하게 대답했다.
"ㅡㅡㅋ"
요양보호사의 재가서비스 이후 아빠의 '밥. 밥. 밥'타령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남편에게 매일매일 오늘은 몇 시에 오냐, 빵이 먹고 싶다 매운탕이 먹고 싶다 죽은 싫다 등 먹고 싶은 걸 줄줄이 늘어놓던 아빠의 전화도 뚝 끊겨 남편이 먼저 전화를 걸어야만 했다. 그때마다 '밥 잘 먹고 누워있다' 등 몹시 편안한 말투의 아빠와, '어르신 엄청 정신이 맑으신데요? 별일 없이 잘 지내고 계세요'라는 요양보호사의 보고를 들으며 헐레벌떡 결정한 선택이지만 나쁘진 않구나 하는 안도감도 들었다.
그러나 일주일 넘게 지켜본 결과 아빠는 요양보호사를 2시간 꽉꽉 채워 요리 도우미의 역할로만 있게 하셨다.
어느 날은 병어 찜이 드시고 싶으시다며 체크카드를 건네주어 장을 보게 시켰다는 말에 기함을 금치 못했다. 예전의 아빠라면 상상도 못 할 일이다.(나에게도 카드는 절대 안 맡기심) 그러나 탐식에 대한 욕망은 '있었습니다만, 없었습니다' 수준의 이성을 제치고 새로운 이슈를 우리에게 노나 주었고 그것의 일장일단이 꽤 명확했으므로 우리 부부가 손 쓸 도리가 없었다. 장점은 요양보호사의 음식 솜씨가 좋은 것이고 단점은 그 음식이 죄다 맵고 짠 것 그래서 아빠의 입맛에 따-악 맞은 것이다.
"안 서방, 아주머니 음식 솜씨가 아주 좋다. 내가 너네 주려고 반찬을 좀 싸 달라고 했으니 다음에 오면 가져가거라"
식사를 잘 챙겨드시니 이따금 이렇게 여유가 생길 때도 있으시다. 이 여유가 정상의 범주에 있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다음날 아침 어김없이 요양보호사의 브리핑이 시작되었다. 여전히 평화로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맘을 놓을 수도 없었다.
"할아버지 오늘도 식사 잘하시고 티비보시는거까지 보고 나왔어요. 그런데 어째~내가 돌봐드리다 보니까 할아버지 치매 아닌 것 같아요. 어찌나 정신이 맑으신지 내가 하는 말 다 알아들으시고 대답도 잘하시고.. 이런 분을 요양병원에 모시고 간다고요? 아이고 너무한다.. 노인들 요양병원 가면 얼마 못 버텨. 이렇게 아끼는 아버지 떠나면 슬퍼서 어쩔 거야. 할아버지는 이렇게 집에서 깔끔하게 돌봐드리면 문제없을 것 같은데 내가 도와줄 테니 병원 보내는 문제는 좀 더 생각해 봐요 응?"
아빠가 드시는 약 봉투 안의 약이 줄지 않는 것 같다는 남편의 이야기를 듣고, 약이 줄어야 진료 명목으로 아빠를 설득해 병원에 데려갈 수 있으니 아침약만큼은 꼭 챙겨달라 부탁을 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던 나는, 치매라고 100프로 확신해 놓고 갑자기 태세 전환해 버린 요양보호사의 태도에 말문이 턱 막혔다. 병원을 갈 상태냐 아니냐는 이미 결론 났고 현재 의논할 사항이 아니다. 단지 어떻게 보내느냐 이거에 대해 머리를 싸매며 고민하고 있는데 갑자기 뜬금없는 소리에 물음표가 만발이다. 나는 적절하게 선을 긋고 말을 이었다. "아니에요. 아빠는 병원에 가셔야 해요."
또한 아빠의 약은 어느 날은 먹고 어느 날은 빼먹고 해도 되는 약이 아니다. 많은 양의 이뇨제와 항혈전제 등, 꼭 드셔야만 하는 필수 약물이다. 약 처방은 여유롭게 받아 준비해 놓을 테니 아침 약 챙겨주실 때 한 봉지씩 따로 빼돌려달라 요청했으나 그 뒤로도 요양보호사의 반응은 쭉 미적지근했고 약도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다. 문제는 또 있었다. 요양보호사를 통해 들은 정보를 취합해 보았을 때 요양병원만큼은 절대 가지 않겠다.라는 아빠의 입장은 여전히 올곧았고 버티고 버티다 못 견딜 만큼 몸이 안 좋아지면 요양병원이 아닌 본인이 입원했던 ㅅ병원으로 재입원하실 계획을 갖고 계신 듯했다.
그러나 나는 약을 대리 처방받기 위해 아빠가 난장판을 피웠던 악몽 같은 ㅅ병원 로비에서 조금 전 순환기내과 담당의가 했던 말이 과연 우리에게 좋은 소식인지 나쁜 소식인지 구분하기 위해 두뇌 풀가동을 해야 했다.
"이제 이 병원은 코로나 전담병원이 돼서 응급실을 폐쇄했어요. 있는 병상들도 빼고 있는 상황이라, 어르신은 이곳으로 못 오시고요, 요양병원이나 타 병원으로 가시는 게 맞지 않을까 싶네요."
며칠 전이었다면 이것은 우리에게 좋은 소식이었을지도 모른다. 죄책감 없이 바로 요양병원으로 보낼 수 있는 명분이 하나 더 늘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가려고 점찍어둔 고양시의 ㅈ요양병원은 집에서 방문하는 환자는 받지 않겠다는 입장이었고 따라서 아빠가 하고 싶은 대로 ㅅ병원으로 입원시킨 다음 ㅈ요양병원으로 바로 이동을 해버리는 건 어떨까. 하는 나름 기지를 발휘해 세운 비상대책도 쓸모가 없게 되었으니 무척 아주 무척 나쁜 소식이었다.
좋은 소식이라곤 하나도 없고 나쁜 소식만 줄줄이다. 이 병원이 아니면 대체 어느 병원에 입원을 시킨단말인가 막막해졌다. 과연 아빠를 요양병원에 보낼 수 있긴 한 건가. 갑자기 태세전환해 버리고 미온적 태도의 요양보호사와 줄지 않는 약봉투. 나빠져가는 아빠의 몸상태와 반대로 좋아지는 인지능력. 그리고 요양병원의 코로나방침과 코로나전담병원이 되어버린 진료병원. 어디 하나 빠져나갈 구멍이 없이 빽빽해져 버린 난제들의 벽에 가로막혔다. 로비에서 지끈대는 관자놀이를 눌러가며 한참을 앉아있다가 이대로 아빠가 좋아지면 이 모든 고민들이 해결되지 않을까? 요양보호사 말대로 치매가 아니라면..? 하는 헛된 희망을 도피처로 삼고 행복 회로를 돌리는 찰나 요양보호사에게 전화가 왔다.
"할아버지가 대변을 여기저기다 다 흘려놓고 화장실은 완전 똥 범벅이라 그거 치우느라 한참이 걸렸어요. 설사가 심한 거 같은데 집안이 난리가 났어. 응응 내가 깨끗이 다 치우긴 했는데 오는 길에 설사약 좀 타와서 잡숫게 해야 할 거 같아요."
불안과 평화를 적절하게 버무려놓은 조용한 나날들도 때가 되었다는 듯 막을 내리고 다시 고통과 번뇌의 나날이 도래했음을. 거세게 울리는 심장박동으로 느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