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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쪼북 Jun 10. 2023

빠이빠이

노인 환자와 노인 간병사



"내가 힘들다 싶을 땐 말해줄 테니까, 천천히 대화 나누셔도 돼요~"


나이 지긋한 간병사의 다독이는듯한 목소리에 묻은 따스함이 저 너머에서 전해져 왔다.

아빠의 첫 요양병원 간병사는 젊은 외국인 남자였다. 하지만 아빠의 과격한 액팅 아웃으로 인해 이틀 만에 집중치료실로 옮겨졌고 따라서 우리는 바뀐 간병사에 대해 전혀 정보가 없었다. 그저 또 비슷한 남자 간병사겠거니. 추측만 할 뿐이었다.


요양병원의 간병사 대부분은 외국인이었는데 그들은 어떠한 사명감을 가지고 아빠 같은 이유 없는 고함과 폭력을 휘두르는 타국의 노인 환자들을 보살필까? 의문이 들었다. 분명 돈을 떠나 쉽지 않은 일이겠지. 그런 마음이 드니 당장이라도 병원에 전화해서 간병사가 어떤 분인지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어쩌면 무례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위축이 되었다. 이 병원은 간병사를 통해서만 환자와 영상통화나 연락을 해볼 수 있는 분위기였기에 한 번쯤 그쪽에서 먼저 연락이 오지 않으려나 싶던 차였는데, 시아버지의 장례를 마친 썬이 간병사의 연락처를 받아 나에게 넘겨주었고 나는 조금 머뭇거리다 떨리는 맘으로 먼저 연락을 했다.

"할아버지 오늘은 컨디션이 괜찮은 것 같아요. 영상통화 한번 해보실래요?"

일말의 귀찮음도 느껴지지 않는 적극적인 목소리에 마음이 놓였다. 그래서 다행히도 그분의 배려로 아빠의 면회를 하기 전 두어 번의 영상통화를 할 수 있었는데 간병사는 그때마다 아빠의 느리고 두서없는 말들로 인해 길어지는 통화를 참을성 있게 기다려주었다. 괜히 민폐스러운 마음에 "이제 됐어요~끊을게요" 라며 서두른다 치면 "오늘 할아버지 말도 잘하시시고 상태 좋은데 좀 더 통화하셔도 돼요. 나는 괜찮아요" 하며 아빠 옆에 앉아 각도도 이리저리 맞춰주는 센스까지. 끊기 전에는 다음 영상통화 날짜와 시간을 정하기도 했는데 미리 약속한 시간을 조금이라도 넘어가면 오히려 그쪽에서 칼같이 연락이 왔다 "할아버지 기다리시는데.." 하며 말이다. 또한  "오늘은 할아버지 컨디션이 괜찮아서.." "오늘은 할아버지 기분이 별로라서.."등 아빠의 기분 상태를 체크하여 스케줄을 주도하며 어쩔 땐 나보다 더욱 적극적인 모습이었다. 같은 병실이었던 관계로 해당간병사에게 시아버지의 돌봄을 맡긴 썬 역시도 '천운일만큼 좋은 분'이라는 의견엔 이견이 없었다. 요양병원에서 터져 나오는 뉴스 때문에 무서워서 절대 병원에 가기 싫다던 아빠는 종종 간병사를 자기 아들이라며 나에게 자랑을 하기도 했다. 아빠! 아빠는 이 와중에 간병사도 잘 만나고. 참 운도 좋수다.





긴급면회를 허락받고 도달한 병원 앞

간병사에게 드릴 하얀 봉투는 주머니에, 두 손에는 음료수 박스를 하나씩 들고 비장하게 병원 주차장에 들어섰다. 이렇게 바리바리 챙겨가지고 올 상황이 아니지만 필요서류 때문에 종종 병원에 왔어도 언제나 단호하게 게이트 스루를 당했기에 이번 기회에 (?) 다 챙기자는 생각에 짐이 많아진 것이다. 남편과 나는 양손 가득 선물을 들고 어기적거리며 걷다 정문 쪽 흡연장에서 키가 크고 홀쭉한 노인을 만났다. 백발의 머리를 짧게 스포츠스타일로 짧게 깎고 안경을 낀 모습이 어디선가 본 것 같아 자꾸 힐끔거리다 눈이 마주치고 말았는데 그가 먼저 우리를 알아보곤 가볍게 목례를 한다. 누가 봐도 '면회객'의 모습을 하고 있는 우리가 누구의 보호자인지 단숨에 알아챈 눈치다. 간병사는 목소리와는 달리 나이가 많아 보였다. 꼿꼿한 허리와 눈빛이 아니었다면 그저 요양병원 환자 1이었겠거니 하고 스쳐 지나갈 정도였으니 말이다. 이것은 마치 노인이 노인을 돌보는 모양새가 아닌가. 나는 조금 서글펐으며 항변하고 싶어졌다. 

그의 자격요건(저 나이의 노인이 일선에서 일을 해도 되는가)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인생이란 본인이 생각하는 절대적 가치를 위해 옳다 생각하는 방향으로 열심히 달린다 해도 결국 마지막 관문에서 근소한(때론 우리가 알지 못하는 다양한 이유들로) 차이로 신세가 훌떡 뒤집힐 수 있다.라는 걸 바로 눈앞에서 목도할 때. 그 잔인한 현실을 바로 인정하기엔 나는 너무 어렸고 그래서 서글픈 것이었다. 왜 비슷한 나이에 우리 아빠는 산송장처럼 누워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하는 채로 저러고 있는 걸까. 이 위화감은 나의 첫 번째 정신과 상담. 백발의 의사 선생님이 앉아있던 진료실로 들어갔을 때와 비슷한 기분이었다.


'우리 아빠도, 사회 구성원으로서 필요인력으로써 가치를 뽐내는 삶을 살고 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임종 전 면회일지도 모르는, 3개월 만의 첫 면회를 가면서 드는 생각이 이런 거라는 게 아빠에게 미안할 따름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었음에도 아빠가 내게 가지고 있는 기대치만큼 (본인을 집에 데리고 가서 정성껏 돌보고 수발해 주는 착하고 속 깊은 딸의 모습), 나 역시 아빠에 대한 기대치를 아직도 못 버린다는 점 마저 비슷한 우리 부녀의 모습에 실소가 났다.




빠이빠이


데스크가 있는 1층으로 들어와 소독액을 짜서 손을 닦고 있는데 낯선 이방인에게 꽂히는 물음표 가득한 시선들에 뒤통수가 따끔했다. 상태가 양호하고 대화가 가능한 노인들은 그들의 간병사와 함께 앉아 티비를 보거나 하는 식으로 휴게시간을 보내는듯했는데 그들의 시선이 모두 우리에게 향했다.  아빠의 병실은 3층. 홀을 지나 엘리베이터를 향해 가는 길이 지난하다.

"여기 들어오시면 안 돼요!!"라는 경계심 가득한 경고에 "아버지가 안 좋으셔서 면회 예외 허용받았습니다."라는 해명을 환자, 간호사, 식당 아주머니로 추정되는 직원들에게까지 대여섯 번 정도 하고서야 겨우 올라올 수 있었고 한 간호사는 엘리베이터가 3층에 도착할 때까지 의심 가득한 표정으로 우릴 따라와서 담당 간호사에게 상황을 전달받고서야 내려갔다. 그런 그들의 모습에 불쾌감이 생기기보다는 억지로 몰래 들어오려는 보호자들이 있었나? 있었다면 그들의 마음 역시 이해가 가서 그냥 쓴웃음만이 지어졌다.

우여곡절 끝에 병실로 도착하자 간호사들은 전달사항에 오류가 있었다며 양해를 구하며  데스크에서 가장 잘 보이는 입구 쪽에 위치해 있는 아빠의 자리로 안내해 주었다.(아빠가 문제아라는 것이 여실히 증명되는 자리 배치이다)


3개월 만에 보는 아빠의 모습은 마치..미이라 같았다. 너무너무 말라버린 모습에 뒤집어쓴 방호복의 부시럭대는 소리가 하나도 들리지 않을 만큼 충격이었다. 저 멀리 보이는 아빠는 침대 헤드를 조금 올린 채로 누워 입은 반쯤 벌리고 눈을 끔뻑끔뻑 대며 허공만 보고 있었다. 무얼 보는 걸까? 이곳은 티비도 없었다. 모두가 비슷한 모습으로 누워있었고 그랬기에 환자들이 내는 소음은 0에 수렴했다. 그야말로 적막강산.

우리가 들어서자 그제야 병실에 온기가 들 정도였다. 


"아빠. 아빠 우리 왔어"

아빠의 고개가 우리를 향해 살짝 움직이더니 초점 없이 까맸던 눈동자가 순식간에 반짝인다.

"아빠 놀랬지? 아빠 보고 싶어서 왔어"

얼마나 이 말을 하고 싶었던가.

아빠의 얼굴에 화색이 돈다. 방금 전까지 뻐끔거리며 누워있던 사람인가 싶을 정도다.


"이게 누구야.. 아이고.. 아이고... 여기 아무나 못 들어오는데.. 내가 여기 온 이후로 다른 사람을 한 번도 못 봤어.. 너희들은 어떻게 온 거냐.. 아이고 잘 왔다 잘 왔어.. 너무너무 보고 싶었다.."


"다 들어오는 수가 있지. 아빠딸이 누구야~"


아빠가 위독하여 병원에서 우리만 들여보내줬다.라고 차마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는지라 너스레를 떨었다. 상황을 알 턱이 없는 아빠는 '내가(내 딸이) 특별해서 병원에 들어왔다'라는 사실에 도취되어 주변 환자들에게 들으라는 듯 "아니 여긴 진짜 아무나 못 들어오는 곳인데!!"라는 말을 한 이십 번 정도 외치며 연신 싱글벙글했고 그 모습이 너무 아빠 같아서 웃음이 나왔다. 예전 같았으면 "아빠.. 조용히 좀 해.."라고 말렸겠지만 오늘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씩 웃으며 돌아서는데 아빠의 맞은편에 앉아계신 할아버지 한 분이 아까의 아빠와 똑같은 모습으로 누워계셨는데 왠지 자꾸 눈이 마주치는 기분에 죄책감이 들어 몸을 다시 돌려야만 했다. 이 병실에 있는 모든 환자에게 조금씩 미안함을 담은 채 나는 정성스레 아빠의 얼굴과 손을 쓰다듬었다. 아빠와의 스킨십이 무척 어색하지만 왜인지 그래야 할 거 같아 다리도 주물러드리려고 이불을 살짝 들었는데 너무 충격적으로 말라버린 다리가 보였다. 조금 오바를 보태면 무릎뼈와 정강이뼈의 형태를 알 수 있을 만큼이었다.

아빠는 정말 완벽하게 쪼그라든 작고 약한 노인이 되어있었는데, 그래도 병원 측에서 설명했던 것보다는 건강한 모습이었다. 임종직전의 노인이라고 하기엔 뚜렷한 인지상태라 모든 대화가 막힘없이 술술 이어졌다.



"아빠 사랑이(아빠의 고양이) 보고 싶지? 내가 다음 면회 때는 꼭 데려올게. 그때까지 건강하게 잘 있어야 해"

"그래 우리 사랑이 꼭 데려와라. 너무 보고 싶다."


우리 집 고양이 이야기, 가게 이야기(가게는 내가 운영하고 있다고 뻥을 쳐야만 했다.), (아빠가 남긴 돈으로) 차량을 구매한 이야기 등등. 15분 정도의 대화 속에서 아빠는 마치 한순간도 대립이 없었던 사람처럼 무척이나 따스하고 인자한 모습이었다. 우리에게 고통스러웠던 시절이 과연 존재하긴 했던 것일까. 약간 혼동될 만큼 말이다. 아빠는 내가 찾아온 것이 꿈이라는 듯. 아니 어쩌면 본인이 요양병원에 누워있는 것이 꿈이라는 듯 상기되어 있었다. 그리고 꿈과 현실의 경계를 거니는 듯한 기분이 드는 건 아빠뿐만이 아니었다.

지금 이 날이 오기까지 거의 일주일에 두어 번씩 아빠는 내 꿈에 나타났다. 항상 병실 안에서 손을 부여잡고 "우린 절대 아빠를 버린 게 아니야. 그러니까 버림받았다고 생각하지 마. 늘 생각하고 있어"라고 말하다가 깨는 꿈이다. 그러나 매번 아빠의 대답은 듣지 못했다. 그런 꿈을 꾼 날이면 가열하게 악몽에 시달린 날보다  마음이 더 답답해져 왔다. 그렇게 인내는 길었고 고통은 지난했다. 그러나 결국 나는 이 자리에서 하고 싶던 말을 할 수 있게 되었고, 감격스러움에 몸이 떨려왔다.


"아빠. 알지? 난 아빠를 버린 게 절대 아니야. 너무 보고 싶었어. 매일매일 아빠 생각을 했어"

아빠의 눈에 언뜻 물기가 스쳐가는 듯했다. 곧 바싹 마른 입술이 들썩이며 다정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도 보고 싶었다"


내 마음은 언젠가부터 물기 하나 없이 바싹 말라버린 사막이었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갈라지고 해진 마음에 눈물이라는 파도가 휘몰아쳐 균열 곳곳이 쓰라렸다면 지금은 그마저의 물기도 기대할 수 없을 만큼 지쳐있었다. 아빠의 대답에 눈물이 핑 돌았지만 어째서인지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엉엉 울고 싶었지만 내가 여기서 아빠를 붙들고 운다면 그대로 무너져버릴 것 같다는 마음이 눈물샘을 틀어막고 있는 듯했다. 그리하여 한없이 인자해지고 순해진 우리 아빠를 이곳에 다시 두고 나가야만 하는 잔혹한 비극과 오늘처럼 행복한 날이, 오늘처럼 따스한 날이, 아빠와의 이별을 하기 전의 마지막 날일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만 같았다. 이런 불행은 왜 나에게만 일어나는지  늘 가져왔던 불만이 걷잡을 수 없이 터져 나와 병실 바닥에서 대자로 드러누워 대성통곡을 할 것만 같았기에 나는 울지 못했다. 그저 슬픈 눈으로 뼈밖에 남지 않은 아빠의 다리를 쓸어내리는 게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다음 주에 또 올게. 우리는 앞으로 쭉 면회시켜 준다고 했어"

'아빠가 언제 떠날지 모르니까'


어디에도 뱉어낼 수 없는 감정을 다시 마음으로 꾹 밀어 넣은 채 터질듯한 팽만감을 견뎌내며 돌아선다. 아빠와 하고 싶은 말을 충분히 다 했다고 생각하고 뒤돌아서려는데 아빠가 해맑은 표정으로 손을 흔든다.

나의 꼬꼬마시절. 아빠는 어린 딸에게 유독 '빠이빠이'라는 표현을 강조하여 가르쳤다. 내가 손을 흔들며 앳된 발음으로 빠이빠이-라고 하는 모습이 귀여워서 그런 건지 모를 일이지만, 그래서 그런지 앨범에는 뜻도 모르고 시키는 대로 손을 흔드는 모습의 내 사진이 꽤 많다.



나 역시 손을 흔든다. 안녕 아빠.


빠이빠이.

딸은 그때는 몰랐으나 지금은 안다.

아빠는 그때는 알았으나 지금은 모른다.


빠이빠이의 뜻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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