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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쪼북 Jun 14. 2023

아빠의 장례식-1

병어. 병어. 병어. 병어. 병어



새벽 내내 선잠을 자고 병원으로 출발했다.

그리고 아빠를 만났다. 어제와 다름없는 모습이었지만 목에서 울리는 그릉대는 가래소리 대신 건조하기 짝이 없는 침묵이 어제와 같지 않음을 실감케 했다. 

어제와 오늘, 생과 사의 차이는 크지 않았다. 하지만 그 실낱같은 차이에서 스며 나오는 슬픔은 결코 작지 않다.


"아빠. 잘 가.."





사망선고를 받은 뒤, 1층 로비로 내려오자마자 많은 서류에 사인을 해야 했다. 보호자로서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서 슬퍼할 정신도 없었다. 사망진단서를 발급받아 장례식장예약을 해야 했고, 상조회사에도 따로 연락을 줘야 했다. 요양병원 측에서 병원 잔금 영수증 등을 준비하는 동안 남편과 나는 소파에 앉아 친지들에게 부고 사실을 알렸다. 대부분의 가족들은 우리의 사정을 알고 있었기에 별다른 말 없이 위로해 주었다.

정신없이 연락을 돌리고 있는 와중, 요양병원 직원이 내려와 아빠의 유품을 건네준다. 두 달 전 사다 드린 돋보기와 A4용지 10장. 요양병원에서 따로 마련해 준 듯한 12색 크레파스세트가 전부였다. 애처로울만치 가벼운 그것들을 멍하니 받아 드니 그 안에 무언가가 빼곡하게 적혀있다. 이래서 돋보기를 가져다 달라고 했을까. 무슨 내용인가 살펴보는데 웃음이 픽 하고 삐져나왔다. 우리에게 편지를 썼나? 하는 얼빠진 기대를 잠시 했었지만, 아빠는 역시 고수 중의 고수. 정말이지 마지막까지 예측불허다. 


그 안에는 병어, 조기, 연어초밥, 갈치조림 등 생전 아빠의 페이보릿 음식들과 본인의 이름 등이 반복되어 적혀있었다. 원래 아빠의 필체는 흐르듯 휘갈기는 느낌의 필기체였는데 , 지금은 무언가를 잊지 않으려고 꾹꾹 써 내려간 듯 초저학년 수준의 엉성한 모양새가 되어있었다. 때문에 형체가 멀쩡한 글자들은 별로 없었다. 뒤로 갈수록 자음과 모음들이 제 짝을 찾지 못하고 마구 흩어지고 있었다.-지리멸렬-이라는 표현이 딱 맞는 활자를 모방한 것들의 행진. 그럼에도 아빠가 하고픈 말의 의도는 명징했다.


'여행가방 여행가방 여행 가방..가...ㄱ..'

'수요일 애들 온다..애들..ㅇ..'

'연어초밥 연어초밥 연어초밥..ㅊ..ㅊㅂ..'

'병어 병어 병어 병어, 갈치 갈치 갈치 갈치, 조기 조기 조기 조기 조기 ㅈ지ㄱㄱ'

'아버지 어머니 아버지 어머니 아버지 어머니'


머릿속 흩어져 가는 기억들과 자아 붕괴의 현실에서 가장 그립고 절박했던 것들을 끄집어내어 글로 적기까지 얼마나 힘들었을까. 애달픈 마음에 한 글자 한 글자 꼭꼭 씹어 읽어보았다.

여행 가방은 언젠가 이 병원을 나설 수 있으리란 희망이었을 테고, 연어초밥은 가장 좋아하던 음식이었다. 아빤 우리 부부의 단골 가게에서 판매하는 초밥만 늘 고수하였고, 큼지막한 연어초밥을 한입 가득 넣은 후 "아이고 맛있다."며 행복하게 웃었다. 때문에 연어초밥은 아빠의 가장 좋았던 기억 중 하나일 것이다.

-수요일 애들 온다-는 그중 유일하게 완성된 문장이었다. 우리가 변호사를 데리고 온다고 약속했던 날을 무척이나 기다리고 있었음이 느껴졌다.

병어와 갈치, 조기에서는 조금 심술이 났다. 군산 출신인 아빠는 유독 바다 생선을 좋아했다. 어릴 적부터 식탁에는 고기보다 생선이 자주 올라왔고 대부분 그 지역에서 많이 먹는 생선들이었다. 그래서 이 생선들로만 a4용지 대부분의 면적을 구성한 것은 그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의 방증이겠거니 생각했건만 병어.라는 단어가 약 20개 정도 반복되는 구간을 읽어 내릴 때, 나는 내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병어라는 단어 사이에 매직아이처럼 숨겨져 있는 저것은!!


바로 남편의 이름이다. 

남편의 이름과 병어는, 뒷글자의 모음만 다르다. 나는 강력하게 오타라 주장하고 싶었지만, 이 수많은 병어 속에서 이 단어만! 심지어 모음 하나만! 오타가 났다는 게 더 부자연스럽지 않은가.


"그래! 먹는 것만 잔뜩 적어놓은 거 좋다 이거야.. 근데 여기에 왜 오빠 이름이 있어???? 내 이름은..?"


남편은 그저 빙긋 웃을 뿐이다.


"나 참. 어이가 없네."

인정할 수 없지만 어쩌겠는가. 나는 투덜거리며 아빠의 유품을 챙겨 아빠의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아빠가 아주 어릴적 나에게 보낸 편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겨준 편지(?)




일 년에 한 명씩 보낸 여자



집과 걸어서 오갈 수 있는 가까운 거리에 위치한 대학병원 장례식장에 아빠를 모셨다.

빈소 예약을 위한 서류작성을 하던 중 남은 빈소가 하필 가장 작은 곳과 가장 큰 곳 딱 두 곳뿐이었고 금액차이가 100만 원가량이 났기에 고민을 좀 해야 했는데코로나로 인해 조문객들의 테이블이 좀 떨어져야 하지 않나 싶어 큰 곳으로 예약하려다 남편의 만류로 작은 곳을 예약했다. 아빠 마지막 가는 길에 무슨 허세를 부리고 싶었는지 큰 곳을 예약하지 못한 게 내심 불만이었으나 결과적으로 아끼게 된 100만 원의 쓰임새는 다른 곳에 있었으니. 이것은 조금 후에.

상조회사 직원이 챙겨준 상복을 입고, 음식을 주문하고, 이제 좀 쉬자 하고 누워 한두 시간쯤 쉬고 나니, 친한 친구들이 소식을 듣고 가장 먼저 달려왔다. 중학교부터 단짝인 친구는 전화를 받을 때도 울먹거리더니 장례식장 입구에 들어섬과 동시에 눈물을 터트렸다. 집에 놀러 올 때마다 아빠가 좋아하는 빵을 두 손 가득 들고 와선 "아버님 잘 지내셨죠~" 하며 넉살 좋게 안부를 묻는 그 친구를 아빠는 늘 이뻐했다. 결혼식 때도 움직이기 힘든 나 대신 아빠를 살뜰히 챙기고 다녔다. 그런 내 친구가 펑펑 우는 모습을 보니 부둥켜안고 함께 울고 싶었으나 당황스럽게도 눈물이 안 나왔다. 눈물을 내보려고 표정을 찡그려봤으나 콧잔등만 알싸해질 뿐이다.



한차례 조문객들이 지나가고 엄마가 도착했고 엄마를 보니 그제야 눈시울이 시큰해져 아끼고 아끼던 눈물 한두 방울이 흘러내렸다. 엄마는 아빠와 나의 관계에 있어 철저한 방관자였으나, 도리어 그 점이 조력자로서의 입지를 가능케 했다. 모든 걸 다 지켜보고 있지만 폭풍에 휘말리지 않은, 그렇기에 내 말을 들어줄 수 있는 여유가 있는 사람. 온몸으로 폭풍을 버텨낼 때는 방관자인 엄마가 참을 수 없이 미웠고 증오스러웠으나, 모든 게 다 지나간 지금은 그럴 힘도 없었다. 타인의 위로를 온전히 흡수해야 버틸 수 있었다. 엄마는 그런 나의 어깨를 도닥거리며 고생했다.라고 말해주었고 나는 그 위로를 받아들였다. 


뒤이어 언니도 도착했다.

처음으로 언급하는 언니의 족보를 설명하자면 나는 재혼가정의 자녀였고 둘 다 이전의 결혼에서 낳은 자식들이 있었는데 그중 엄마에겐 3명의 자식이 있었다. 오빠 둘에 언니 하나. 그중 둘째인 언니는 나와 유난히도 친했다. 아빠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비슷한 생김새, 비슷한 목소리, 비슷한 취향 등으로 성인이 된 후에는 큰 이질감 없이 자연스레 친해질 수 있었고 그랬기에 아빠 앞에서 종종 언니 이야기를 종알대기도 했었는데, 그럴 때마다 아빠는 갑자기 눈이 그렁해지더니 "그 아이도 참 불쌍한 애구나. 언제 꼭 한번 보고 싶다"라며 언니를 궁금해했다. 얼탱이가 없어서 속으로 '참나.. 딸내미나 그리 애틋하고 불쌍하게 생각해보슈'라고 대충 둘러대고 넘어가기 바빴는데 결국 아빠는 본인의 장례식장에서 언니를 처음 만날 수 있게 되었으니 인생 참 미묘할 노릇이다.


엄마와 언니의 관계는 조금 더 미묘하다.

엄마는 이전의 결혼에서도 자식을 두고 떠났다. 떠남의 이유도 같다. 아마도 언니의 아빠도 우리 아빠와 비슷한 결의 사람이었던 것 같다. 나는 엄마를 여자로서 이해했으나 자식으로서는 용서하지 못한다. 그것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언니의 경우 내밀한 속마음은 모르겠으나 엄마를 한동안 받아들였다가, 밀어냈다가를 반복하는 걸로 보아 나와 같은 양가감정이 있는듯했다. 그런 엄마와 그런 언니가 아빠 장례식장에서 소주를 3병째 까고 있으니 이거야말로 장관이다.


언니의 아버지. 그러니까 엄마의 전 남편은 작년 겨울에 지병으로 소천하셨다. 아빠와 비슷한 모습으로.


"일 년마다 남편을 하나씩 보낸 여자구만"


평생을 한량 같은 남자들의 뒤치다꺼리만 하며 먹고살기 위해 발바닥이 부르트도록 일만 하며 살았으나 결국 남편과 자식을 버리고 도망간 천하의 나쁜 년이라는 억겁의 꼬리표만 두 개 달고 살던 여자만 살아남아 마지막 남편의 죽음을 지켜본다라. 영화로 만들면 대박적인 블랙코미디 한편 나오겠다며 나와 언니는 깔깔깔 웃었다. 정색을 하며 부르르 떨던 엄마 역시 덩달아 웃었다.

그리고 두 여자는 쉴 새 없이 술을 마셨다. 코로나로 집합 금지명령이 내내 시행되다 조건부 해제된 지 하루였다. 이곳에서 코로나가 번지는 상황은 생각하기도 싫어 친척어른들은 부르지 않았기에 빈소는 다소 썰렁했는데, 본격적인 조문객이 오기 전 적막함 속에서 엄마와 언니가 얼굴이 시뻘게지도록 술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은 어째서인지 내 마음을 따듯하게 녹여주었다.


아빠는 평생을 외롭게 살았다. 그나마 친가와도 인연을 끊은 지 오래고 그래서 가족도, 친구도 없다. 그런 아빠 마지막 가는 길,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언니와, 죽기 직전까지 괘씸하다 버럭 댔지만 서류상으론 아직 부인인 엄마가 자리를 지키고 있으니 아빠로서도 그리 서글픈 여행길은 아닐 것이다. 엄마와 언니가 느즈막까지 술판을 벌이는 사이 보고 싶은 지인들이 많이 왔다. 아빠 덕분인가 싶을 정도로 오랜만에 보는 친구들의 얼굴도 많았다. 슬퍼할 겨를이 없었다. 모두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냐며 나를 위로해 주었다. 저녁 즈음 남편과 함께 도착한 썬은 불안장애로 카페인을 못 먹게 된 나를 위해 디카페인커피와 간식 등을 챙겨 왔고 '티벳 사자의 서'라는 책도 함께 선물해 주었다. 망자의 혼을 위해 기도를 할 수 있게 도와주는 책으로 썬은 시아버지 장례식을 치르는 틈틈이 이 책에 나오는 구절을 영전 앞에서 읊어드렸다고 했다. 아빠와 엉망진창이별을 하며 모든 게 부서지고, 망가졌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나를 불쌍히 여겨 신이 보내준 게 있다면 그게 바로 썬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녀는 많은 도움과 위로가 되었다. 그렇게 장례식장에서 아빠의 영정사진을 마주하게 될 때마다 나 역시 틈틈이 아빠를 위해 기도했고 대부분 내용은 이랬다.


'다음생에선 부디 다복하고 사랑 많은 집에서 태어나 존경받고 사랑받는 존재로 행복하게 사시길'


언니는 밤즈음 되어 홍조 띤 얼굴로 집으로 돌아갔다.

"내일 또 올게!"라며.


그렇게 장례식 첫째 날이 지나갔다.

슬프지도,아프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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