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를 다시 쓰기
슬럼프인가. 슬럼프라 하기엔 한 게 너무 없다. 번아웃인가. 번아웃이라 하기엔 일이 너무 없다. 일이 하도 없어서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맨날 지겹고 맨날 심심하고 맨날 딴생각이 솔솔.
희대의 노잼 시기가 왔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아무것도 할 게 없는 그런 시기. 여행을 가도 좋은 소식을 들어도 돈을 써도 집안을 정리해도 약속을 잡아 나가 놀아도 아무 생각이 들지 않는다. 재미도 없고 의미도 없고 아무 감흥이 없다. 다른 사람들은 뭐하나 다들 재밌게 사나.
한 해가 또 이렇게 지나간다. 그리고 새해 첫날, 또 평범한 아침이 왔다. 어제와 똑같은 오늘, 내일도 오늘이랑 똑같을 것 같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매일매일 똑같을 것 같다. 숨이 막힐 듯 답답했다. 앞으로 살아갈 수많은 날들이 이런 단조롭고 지루한 일상의 연속이면 어떡하지? 극한의 공포다.
우리는 대체 언제쯤 이곳을 떠날 수 있을까? 새로운 도시로 이사 갈 수 있을까?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시작을 하면 내 마음도 달라질까? 제발, 이번 여름에는 제발!!! 이곳만 아니면 어디든 좋겠다. 안 좋은 기억 힘든 순간들이 너무 많은 곳. 내가 하와이를 싫어하는 이유, 내가 새로운 곳 새로운 시작을 갈망하는 이유이다.
나는 어떤 일을 할 때 그 전의 준비기간에 그 솜사탕 같고 뭉게구름 같고 그 몽글몽글한 그런 느낌이 참 좋다. 무지개 같고 유니콘 같고 온 세상이 오색찬란하게 보이는 그런 순간 뭔가 다 잘 될 것만 같고 좋은 일만 일어날 것 같고 인생이 탄탄대로로 펼쳐지고 꽃길만 걸을 것 같은 그런 느낌.
아무튼 그런 기대감이 너무너무 크게 가지면 현실이 나의 기대감을 채워주지 못할 때 엄청난 상실감을 느낀다. 내 인생의 스토리. 실제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충분히 행복하고 감사해야 할 만큼, 어느 누군가에게는 평생을 간절히 원했을 수도 있는 그런 상황인데도 나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는 이유로 행복한 기억으로 남지 못했다.
하지만 현실은 똑같았다. 실제는 똑같았다. 세상은 원래대로 돌아가는데, 내가 녹아있는 설탕을 본 게 아니라 솜사탕을 본 것. 어두운 면 보다 밝고 빛나는 것들을 본 것. 내가 가는 길은 1년 4계절 똑같았는데 봄에는 꽃을 여름에는 푸른 나무를 가을에는 단풍을 겨울에는 소복한 눈을 본 것.
그러다 갑자기 내 기대치만큼 내가 행복하게 '느끼지' 않는다는 이유로 역시 현실은 시궁창이구나 하면서 시멘트 바닥을 보고 눌어붙은 설탕을 보고 어둠 속으로 파고 들어간다. 꿈과 희망, 노력, 성취, 보람, 인정 모두 충분히 받고 있으면서 그것들을 모았다가 버렸다가 하면서 감정 기복이 심하게 출렁였다. 왜 그랬을까? 그냥 그땐 그랬다. 그리고 지금도 왔다 갔다 한다.
실제 나의 삶은 변함이 없었다. 나는 여전히 아침에 일어나서 출근하고 퇴근하면 집에 왔다. 밥 먹고 뭐 좀 하다 보면 잘 시간. 그리고 또 아침 일찍 일어나 회사, 집을 반복하며 쳇바퀴 같은 인생을 산다. 모임도 나가고 이것저것 해보려고 해도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 마음을 채우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렇게 점점 나의 풍선은 바람이 빠져 쭈글쭈글 해졌다. 나를 채우는 모든 것들 내가 이미 갖고 있는 보지 못하고, 내 기대에서 채워지지 못했던 것들 내 풍선에서 빈 공간들을 보며 공허함 허탈함 상실감을 느꼈다.
하루는 너무너무 감사함에 마음이 꽉 채워질 때도 있었고 하루는 이게 맞는 건가 나는 여기까지 밖에 안되나 하는 마음에 조금 실망을 느꼈다. 내가 이제까지 해온 것들을 보며 스스로 뿌듯하다가도 다른 사람들은 뭐하나 요즘에는 뭐가 유행인가 하는 마음에 무의식적으로 비교를 하기도 했다. 어느 날은 의욕이 넘쳐서 촘촘하게 인생계획을 세우고 나를 선언하다가도 어느 날은 열심히 살아서 뭐하나 오늘도 하루 종일 일했는데 일단 좀 눕자 하면서 잠만 쏟아질 때도 있었다.
아무튼 지금의 상태는 나의 기대감을 채우기 위해 노력하고 실천하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파악하고 노력하기 위해 준비 중이다. 미래에 대한 불안을 현재를 살기 위한 원동력으로 활용하기. 지금 여기서 할 수 있는 것을 찾기.
지금 우리는 현재를 즐기기도 하지만 미래를 위해 준비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우리가 나중에 자가를 마련한다면 받을 수 있는 모기지를 위해 신용을 준비할 수도 있고, 미래에 차를 구입하기 위해 어떤 차가 좋을지 고민해볼 수도 있고, 이직을 위해 현재의 직장에서 경력을 쌓고 미국 직장 문화를 체험하는 기회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아무튼 우리는 지금 빚은 없으니 마이너스는 아닌 것이다. 빚이 없다는 것만으로도 정말 큰 안정감을 준다. 남편과 내가 계속 일하면서 차근차근 자산관리나 계획을 세워 우리가 원하는 미래를 위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지금은 망상이지만 언젠가는 이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