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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이 Mar 19. 2022

13 전 연인에 관한 고찰

과거를 다시 쓰기

나는 남편의 전여친 / 여사친 문제에 상당히 예민하게 반응했었다. 왜냐하면 남편은 전 연인도 자신의 인생의 한 부분이고, 헤어졌어도 친구로 남을 수 있다는 입장. 그 사람이 정말 좋은 사람이었기에 연인 사이로 발전했던 것이고 그런 좋은 사람과 계속 연락하는 것은 당연하다 연인으로서의 관계는 끝났지만 친구로 충분히 남을 수 있으므로 헤어졌다고 끊어낸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반면 나는, 우리나라에서는, 또는 적어도 내가 아는 사람들에서는 연인 사이라는 것은 단 둘이서만 독점적으로 누릴 수 있는 특권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전 연인과의 추억이나 선물 사진 편지 등을 정리하고 새로운 연인에게 집중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겨졌다. 전 연인의 존재를 알고 있긴 하지만 알면서도 모르는 척, 그 과거의 추억까지도 꺼내지도 않는 그런 상황이 상대를 배려하는 것이라고. 전 연인과 관련된 말들은 암묵적으로 아무도 묻지도 답하지도 않는 그런 금기어가 되었다.


그런데 남편은 정 반대였다. 그런 과거가 있기에 현재의 자신의 모습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고, 그 순간에 자신이 느꼈던 감정이나 기억을 잊어버리려 억지로 노력한다 해서 잊혀지는 것도 아닌데 그럴 필요가 있냐고. 그리고 설사 내가 잊어버렸다 해도 그 순간에 있었던 일들이 없었던 일들이 되는 것도 아니지 않냐고. 구구절절 맞는 말이긴 하지만 유교걸 입장에서 남편의 자유분방한 사상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에게는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아주 구체적이고 정확한 정답을 알고 있(다고 착각했)었다. 평생을 함께할 운명, 내 인생에 단 하나뿐인 사랑, 일편단심, 일심동체, 유일무이. 그래서 인생에 가장 사랑했던 사람, 마음속의 단 한 사람은 현재의 배우자뿐이어야 한다고 믿었던 것 같다. 그런데 아무리 과거에 있었던 인연이라고 하더라도 그 사랑을 누군가와 나눠야 한다는 것이 불가능하고 용납할 수가 없다고 느꼈나 보다.


나에게는 사랑이란 단 하나니까. 내가 남편에게 내 모든 사랑을 바쳤는데 남편은 나에게 그만큼 헌신적이지 않다고 생각됐나 보다. 얼마나 불합리한 관계인가. 그래서 내가 피해자처럼 느껴지고 남편이 절대로 전여친을 생각도 떠올리면 안 되고 만나서도 연락해서도 안 된다고, 그럴 시간이나 여유가 있으면 와이프인 나한테 써야만 한다고 생각했나 보다.


그걸로 이판사판 공사판으로 개판을 치며 엄청나게 싸운 것이 어언 1년이 지났다. 그리고 그거보다 더 큰 일들이 있었기에 더 이상 전여친 얘기를 아예 꺼내지도 않고 묻어두다가 문득 생각났다. 남편이 그 사람과 바람이라도 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은 바꿔 말하면 남편이 바람을 피울 것이라고 내가 의심하는 것이지 실제 남편의 의도는 알 수가 없다. 그런데도 나는 왜 전여친 얘기에 치를 떨며 싫어했을까. 지금 법적으로도 물리적으로도 남편의 곁에 있는 것은 나인데, 왜 그 존재만으로도 위협을 느꼈을까. 나는 배우자라는 법적으로도 독점적인 우위를 차지하고서도 왜 나에게 자신이 없었을까. 나는 무엇이 두려웠을까.


되돌아보니 정말 전 연인과의 관계가 현재의 내 모습에 상당한 영향을 끼친 것은 사실이다. 물론 모든 관계가 그렇듯이 좋은 면도 많았고 배울 점도 많았고 고칠 것도 많았지만. 나는 하나의 관계가 끝나면 뒤도 보지 않고 바로 도망쳐왔었다. 그리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이전 사람이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모든 흔적을 지워버리고 다시 시작하고 싶어 했었다.


그런데 내게 도움이 되었을 수 있었던 상황은 또 다를 수도 있겠다. 과거의 그 관계가 어땠는지, 무엇을 잘했고 배웠고 기억하고 싶은지, 나는 무엇을 원했는지 내가 어떤 상태일 때 가장 행복했는지 등등 한 번쯤은 고민해볼 수 있었는데 그러지 못했다. 헤어짐을 실패라고 여기고 실패에서 배우고 도움받을 생각을 못했다.




그렇게 전 연인에 대한 기억을 모두 지우고 부정하니 그 시간을 지나왔던 나까지 잃어버린 기분이었다. 나는 항상 왜인지 모르게 내가 부족하다고 느껴지고 더 잘하기 위해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었다. 이제 와서 돌아보면 나는 항상 뭔가를 바쁘게 하고 있었다! 그것은 정말 사실이다. 그런데 내가 전 연인과 함께했던 시간들을 모두 부정하니, 그 당시 내가 이루었던 성취도 같이 부정하고 있었던 것 같다. 우리가 함께 여행 간 곳, 함께 나눴던 인생 이야기들, 서로에게 배우고 가르치며 쌓아갔던 공부, 서로의 일을 응원하고 지지했던 순간들 모두.


내가 어떤 일을 성취했을 때 전 연인이 응원해줬던 일이라도 결국 그 일을 해낸 것은 나이다. 내가 해낸 일이며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내가 어느 곳을 여행했을 때 함께 갔던 사람이 전 연인이라도 내가 그곳에서 보고 느낀 것들은 여전히 사실이다. 내가 그 시간에 그곳에 있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내가 전 연인과 함께하면서 그에게서 배운 점들 고마웠던 점들 행복했던 순간들 모두 사실이긴 사실이다. 아무리 부정하려 해도 그런 순간들이 있긴 있었다.


전 연인과의 관계를 이별 후에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 나는 이 진리를 몇 번의 이별을 겪으면서도 깨닫지 못하고 결혼하고 나서야 깨달았다. 그렇다면 마찬가지로 남편과 이혼하더라도 남편 덕분에 얻은 깨달음, 남편 덕분에 겪은 이민 경험과 해외취업, 남편 덕분에 알게 된 새로운 세상과 새로운 사람들, 남편 덕분에 느꼈던 또 다른 모습의 사랑과 행복 모두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경험이 지금의 나를 만들며 앞으로도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다.


나의 첫사랑이던, 비보이였던, 풋볼 선수였던, 군인이였던 간에 그 사람들과 함께였던 내가 있었다. 그들의 연인이 아니라 한 개인으로서의 내가. 과거의 어떤 일들도 이미 지나간 일이다. 후회하고 부정하기보다는 과거를 인정하고 그보다 더 성장하며, 그런 때도 있었지 하면서 행복하게 추억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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