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남편이 완전체라면, 누가 그를 완전체로 만드는가?
“By all means marry; if you get a good wife, you'll be happy. If you get a bad one, you'll become a philosopher.” - Socrates
나는 악착스럽게도 미안하다는 소리를 듣고 싶어 했다. 그리고 남편은 고집스럽게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남편의 입장에서는 잘못한 게 없는데 사과를 강요받아서 답답한 상황이었을 것이다. 나는 어떻게든 남편을 꺾으려 했고, 남편은 곧 죽어도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나는 상처받았다고 엉엉 울었고 화가 났다고 입을 닫아버렸다. 그런데 남편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평소같이 밝은 목소리로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방금 전 서로를 죽일 듯이 노려보던 사람이, 서로의 마음에 칼질을 해대던 사람이, 서로에게 가장 잔인한 말들을 쏟아붓던 사람이... "나 요거트 먹을 건데 너도 먹을래?" 하면 나는 이 사람이 소시오패스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은 거의 매번 그런 식이었다. 이 사람은 진지한 대화가 불가능한 사람인가? 약간 멍청한가? 감정이 메말랐나? 진짜 소시오패스 인가? 내가 대성통곡을 해도, 대체 왜 그러냐고 닦달을 해도, 나한테 얼마나 뭘 더 원하냐고 탓을 해도... 대화가 끝나면 바로 일상으로 돌아갔다.
나중에 심리 관련 수업을 들으면서 알게 되었다. 그것이 남편의 방어기제였다. 남편은 우리의 갈등이 남편의 일상에 주는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 감정을 구분 compartmentalize 하는 능력이 뛰어났던 것이다. 부부관계에 문제가 있다고 해서 자신의 일상까지 망가지게 놔둔다면 결국 결혼도 일도 자기 자신도 전부 잃게 되니까. 스스로 그렇게 자신의 인생에서 중심을 잡고 있었던 거였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조금 전까지 싸웠다가 이제 그만 싸우자 하고 바로 밝은 모습으로 돌아가는 모습은 정말이지 충격이었다. 여전히 감정이 남아있는 나에게는 바로 없던 일처럼 돌아가기가 힘들었다. 나는 여전히 울고 있었고 나는 여전히 속이 타들어갔으니까. 하지만 감정을 스스로 조절하고 불필요한 싸움을 피하는 방법을 남편 덕분에 배우긴 했다.
남편은 내가 자신에게도 친절하게 대해주길 바랬지만 나는 남편을 쳐다볼 수 조차 없었다. 그게 나의 방어기제였다. 나는 여전히 상처받았는데, 웃고 있는 가해자를 대면할 용기가 없었다. 울분을 토해내도 모자랄 판에 억지웃음을 지을 수는 없었다.
<How I met your mother> Season 1 Episode 22
그러다 옛날에 유행했던 미드가 생각났다. 오랜 연애를 했던 커플인 릴리와 마샬은 싸우다가도 일시 중지하고 다시 엄청나게 사이좋게 랍스터를 먹으러 가는 장면이 있었다. 남편은 저런 걸 원한 걸까? 저런다고 문제가 해결되나? 어차피 문제는 그대로 있고 그냥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것 아닐까?
그러다 다시 생각났다. 남편은 미국인이다. 나와는 사고체계가 아예 다른 사람.
소극적 수용력. 남편은 놀랍도록 불확실한 상황을 잘 견디는 사람이다. 문제가 있어도 해결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 나는 문제가 있으면 끝까지 파고들어 어떻게든 해결을 보려는 성격이었고 남편은 문제를 문제라고 여기지도 않는 사람이었다.
남편은 나를 위로(?) 하기 위해 자신이 알고 있는 가장 최선의 방법으로 나에게 다가오고 있었고, 나는 그런 남편이 나의 기분 따위는 안중에도 없고 배려조차 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폄하했던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닫고 나는 조금 더 상처를 덜 받는 방식으로 대응할 수 있었다.
"나는 지금 혼자 있고 싶어. 나에게 한 시간 정도 시간을 줘."
내가 남편이 보기 힘들 때 저 인간 소시오패스 아니야? 라는 생각보다 내가 필요한 게 무엇인지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남편에게 조금 마음이 풀리면 밝게 다가오는 그에게 점점 덜 어둡게 대할 수 있게 되었다. 차마 나도 밝게 맞장구 쳐주지는 못했다. 내가 자아분열 올까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