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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이 Sep 22. 2024

꽃길만 걷게 해 줄게

무방비 상태에서 듣는 그 한마디

꽃길만 걸으라는 표현이 유행어처럼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이 세상 어느 길이라도 꽃길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꽃도 있고, 흙도 있고, 돌도 있고, 가끔가다 벌레도 있고, 쓰레기도 있고, 노숙자도 있고, 어딘가엔 벽도 있고, 막다른 길도 있겠지.


어느 길을 걷던 꽃을 보며 걸으면 그것이 꽃길이었다.


나는 남편과 같은 길을 걸으면서도, 남편이 아름다운 꽃을 보며 걸을 때 나는 쓰레기와 벌레만 보며 걸었다. 나에게는 꽃을 볼 여유조차 없었나 보다.


아파서 제대로 앉지도 못하면서 마감이 있다고 꾸역꾸역 컴퓨터를 켜고 일을 했다.

이번 달에 휴가를 많이 썼고 다음 달에도 휴가 낼 일이 있다고 약을 먹어가며 출근을 했다.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는데 내가 일을 미룰 수가 없었던 것인데...

아프다고 집에서 쉬는 남편에게 원망의 불똥이 튀었나.


나는 왜 아픈데도 계속 일을 해야만 했을까?

나는 왜 여전히 나 자신을 1순위로 두지 못할까?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가는 길, 근처 꽃집에 들러 꽃 향기를 맡고 가자는 남편

차도 없어서 쓰레기 가득한 거리를 걷고 버스를 타야 하는데... 그 와중에 꽃 향기를 맡자는 사람.


최악의 상황에서도 언제나 긍정적인 면만 볼 줄 아는 사람이다.

해맑고, 밝고, 순수한... 그런 사람

남편과 함께 있으면 분명 정서적으로 편안하고, 감정적으로 안정적이게 된다. 


동시에 급변하는 사회에서 이렇게 도태되는 건 아닌지 불안감에 휩싸이기도 한다.


결국 내가 원하는 삶은 평균적인 삶이라, 남들 하는 대로 노오력을 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리는 걸까?

말로는 쉬어가도 괜찮고, 다른 길을 가도 괜찮다고 해도, 실제로는 누구나 가는 그 길을 갈망하고 있었던 걸까?


그러면 남편이랑 결혼했으면 안 됐는데.

아무리 남편이 2년 안에 이직할 거라고 호언장담을 했어도, 상황이 바뀌고 어쩔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날 거라고 예측했어야 했는데.




<캐나다 체크인> 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이효리가 "가족 중심적이라 차분하고, 에너지를 고요히 간직하고 있는 느낌" 이라 좋다는 말을 했다.


큰 사건 없이 잔잔한 일상을 보내는 사람들

현재에 만족하고 지금을 살아가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 사이에 내가 있다.

지금 나에게는 영원히 반복될 단조로운 일들을 겸허히 수용하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남편은 남편의 시간대로 살아가고 있다.

나는 내 시간대로 살아가면 된다.


이사 갈 줄 알고 승진 신청도 안 했던 건 나의 결정이었다.

남편의 일정에 억지로 나를 맞춘 것도 나의 선택이었다.


나는 내 인생을 살아가야 했었는데, 남편의 아내로만 살며 스스로를 낮추고 있었다.

그 희생에 고마워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중심을 나에게로 다시 잡아 내 인생을 다시 설계해야 한다.


스스로에게 매 순간 질문해야 한다.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은가?




그리고 어제 자기 전, 남편은 말했다.


그래도 우리가 함께 있어서 할 수 있어서 고맙다고

집에 오면 내가 있고

서로 볼 수 있고

손을 잡고 안아 줄 수 있어서 참 좋다고


하긴 한국과 미국으로 장거리 연애를 했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겠지




남편은 내가 원하는 위로를 해주지는 않지만

가끔 정말 예쁜 말을 해준다.


일평생 예쁜 말을 갈망하는 나에게는

무방비 상태에서 듣는 그 한 마디에

쉽게 떠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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