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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인 Dec 11. 2021

핀란드 랩소디 02

도대체 무슨 병이길래....

집으로 돌아오니 시간은 저녁 무렵이 다되어가고 있었다.

그래 어쨌든 병원에 다녀왔겠다 약도 받아 왔겠다. 약 먹으면서 살살 출장 다녀오지 뭐.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여러 가지로 분주해서 나는 아직 내 출장 짐도 싸지를 못했다.


그래도 뭐 한두 번 가는 출장도 아니고

애들 데리고 가는 것도 아니고 어른 둘이 가는 출장인데 그냥 입던 옷에 속옷이나 몇 벌 챙기지 뭐. 가볍게 생각하고 일단 들어가서 좀 눕기로 했다.


약 때문인지 병원에서 그 난리를 친 때문인지 속도 메슥거리고 몸이 병원에 갈 때보다 더 안 좋은 것 같았다.

일단 좀 누워야지. 좀 자고 나면 괜찮을 거야.      

이불속으로 기어들어가서 한참을 잤나.. 어둠 속에서 눈을 떴다.


마침 시간이 새벽이라면 딱 좋다.

이제 일어나서 대충 짐 싸고 애들 학교 다닐 거 챙겨놓고 정리 좀 하고 떠나리라.

그런데. 몸을 일으켜 거실로 나오려고 침대 밑으로 첫발을 떼자마자 핑하는 어지러움과 함께 나는 그대로 바닥에 꼬꾸라졌다.

머리를 땅에 부딫힌게 아니라  

이 온몸을 덮치는 기분이었다.


떼굴떼굴 구른다는 것이 이럴 때 쓰는 표현이구나.  두통이 좀 가라앉을까 싶어서 머리를 흔들어도 보고 이리저리 누운 자세를 바꿔도 보고 그러다 보니 나도 모르게 떼굴떼굴 구르게 되었다


마치 어마어마한 거인이 내 머리를 잡고 호두알처럼 빠자작하고 으스러뜨리는 그런 느낌이었다.


좀 자고 나면 괜찮을 줄 알았다.

몸이 이렇게 계속 안 좋을 리가 있나.

이런 감기도 있나.

감기란 모름지기 몰라도 7일.

알아도 7일 이라지 않았나.

게다가 이렇게 머리만 지독하게 아픈 감기도 있나? 다른 데는 다 멀쩡하고.  열도 안 나는데

머리만 엄청 아픈 이런 희한한 기도 있나?

지나가라 지나가라.

감기든 치질이든 병명 같은 건 궁금하지도 않다.

무엇이 되었든 염치가 있어야지.

오늘은 좀 봐주라


그런데 이 두통이 희한했다.

머리를 땅바닥에 처박고 있으면 좀 나아지는데 머리가 땅으로부터 30cm 이상 올라오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통증이 온 머리를 쥐어짜듯이 밀려왔다.

머리가 몸보다 내려오면 괜찮고 쳐들면 아프다니.

교만한 자에게 내리는 신의 단죄나

전래동화에 등장하는 웃기는 천벌도 아니고

이게 무슨 해괴한 고통이란 말인가.


폐병환자에게 '담배 금지'는 지당한 처방이지만

이 병에 걸리면 '일어서기 금지'인 건가?

그런 병도 있나?

나는 일단 심호흡을 하고 방바닥에 벌러덩 누운 채로 심호흡을 했다.


아... 당당하고 꼿꼿한 자세로 직립하기 못하고 땅바닥을 전전하는 인간이 되어 올려다본 방천정은

에베레스트 정상만큼이나 아득하고 멀어 보였다.

저 위에 공기가 어떠했더라? 평생 누워만 있었던 사람처럼 벌떡 일어나지 못하는 상황이

억울하고 분했다.


그런데 낙담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새벽부터 설쳐도 모자라다는 그 유명한

'아침 비행기'였다.

국제선이라 과정도 거창해서 시간에 안 늦게 가려면 동트기 전에 집에서 나서야 한다.


머리가 아픈 것도 모라자 이제 복잡하게 꼬이기 시작했다.

어쩌나. 일단 출장을 포기할까.

하지만 그때는 장사가 한창 잘되던 무렵이었다.

한국에서 구할 수 있는 물건들이 아니라서 더 문제였다.


게다가 영국에서는 두어 달에 한 번씩 서는 큰 장이 펼쳐질 판이었는데 이 시기를 놓치면 남들이 다 사고 남은 찌끄레기들을 모으러 가야 할 판이었다. 그건 정말 싫다.

다른 이유보다 그게 더 배가 아팠다.

쌤 많은 사람이 지 팔자를 볶는다 더니.

내가 딱 그 짝이었다.


어렵게 잡은 비행 스케줄과 거기에 맞춰서

다 예약해놓은 기차 편과 렌터카. 숙소들.

아... 그걸 다 다시 한다고? 오노.

날짜가 임박해서 취소하는 것이니 환불이 될 리도 없고 적지 않은 비용을 포기하는 것도 억울해 죽겠는데

그 귀찮은 과정을 다시 다 해야 하다니.


귀찮음과 억울함에 치밀어 올라오는 짜증은 이 두통의 고통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을 것 같았다.


하루 이틀 미룬다고 당장 몸이 괜찮아 질리도 없고 어찌어찌 비행기만 잘 타고 가서

하루 이틀 누워있다가 남은 일정을 소화해도 되지 않을까?


그래 우선 짐부터 싸자.

나는 며칠 전부터 짐 싸 달라고 건넌방에서 입 벌리고 누워있는 내 출장용 슈트케이스에

주섬주섬 짐을 꾸겨넣기 시작했다.


머리를 쳐들 수가 없으니 그야말로 낮은 포복자세로 바닥을 뱀처럼 기어서 하나하나 가방으로 옮겼다.


깊은 밤이라 아무도 못 보기에 망정이니 누가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면

저 여자가 자다 말고 기어 나와

뭐 하는 건가.


열이 나고 아프다더니 머리가 돌아버렸구나 했을 것이다.     

 

나중에 모든 사태가 지나가고 영국에 가서 짐을 풀어보니.

그때 내가 얼마나 황당하도록 정신없고

두통이 심했었는지 짐들이 말해주고 있었다.


정작 필요한 속옷이나 화장품, 생필품 등은 하나도 없고 무슨 하와이안 셔츠에  예전에 사놓고 포장지도 뜯지 않은 레이스 나시랑 레인보우 겨울용 수면 양말에 넣은 기억도 없는 참치 통조림까지.  


아마 뭔가를 쑤셔 넣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넣기는 넣는데 내가 뭘 넣는지 아무 생각이 없는 상태였던 것 같다.      



앤틱을 누가 살까-22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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