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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인 Dec 12. 2021

핀란드 랩소디 03

어쨌거나 이륙

뿌옇게 아침이 밝아 오고 있었다.

사실 그날 아침의 기억이 정확하지 않다.

고색창연한  영화 장면처럼 중간중간  회로가 반짝하고 들어올 때의 기억이 난다.

나는 죽더라고 출장을 가다 죽을 거라고 남편에게 말해서 남편 표정이 우그러지던 장면.

짐을 주섬주섬 끌고 기듯이 차에 오르던 장면.

공항에 도착해서 구역질을 하면서 겨우겨우 보딩을 하고 다시 바닥인지 의자인지 길게 뻗는 장면.

집을 나서서 차를 고 공항까지 가서 파킹을 하고  짐을 들고 체크인 카운터로 가서 보딩을 하고 출국 수속을 하고 짧지 않은 시간을 대기했다가 비행기를 타기까지.

엄청 복잡한 시간이다


근데 이 과정이 기억이 없었다

나는 당연하고도 확실하게 정신이 혼미해져 있었다.

쓰러지기라도 하면 남편이 앰뷸런스부터 부를 테니 그건 절대 안 된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남편이 끌어 땡기는대로 고분고분 쫓아다녔다

엄청난 두통과 구역질을 이기느라 움직이는 내내 기진맥진했지만 그건 꼴깍 잘도 삼켰다


의자가 보일 때마다 드러누웠는데

머리가 다리보다 낮아지면 그나마 살만했다.

희한한 일이었다.

이런 있구나.

머리의 위치가 왜 중요한가.

누워야 사는 여자

농담이면 웃기기라도 할텐데


희한한 증상에 나는 앞으로 내내 이렇게 땅바닥을 기듯이 다녀야 하나  암담했다.      

아... 부디 비행기 자리라도 넉넉해라

자리라도 넉넉하면 내내 누워서 갈 수도 있고 어디가 고장난지는  모르겠지만 갑자기 걸린 죽을병이 아니라면 하루 이틀 잘 참으면 차차 나아지겠지.


나는 애써 스스로를 위안하며 어여어여 비행기 타기만을 기다렸다.      

아... 이럴 줄 알았으면 달러빚을 내서라도 1등석이나 최소한 비즈니스라도 끊을걸.


그런 건 신경 쓸 겨를도 없었고 공항에서 바꿀라니 너무 엄청난 금액이 들어서 차마 그럴 수도 없었을 것이다. 구두쇠 남편이 그걸 묻기나 했을까.

그래 봐야 열 시간인데 뭐. 죽기야 하겠어.

참 무모한 용기가 솟았다.      

우여곡절 끝에 비행기에 올랐다.



아... 아뿔싸. 만석이다.     


이건 만석도 이만저만한 만석이 아니다.

바늘 끝 하나 꽂기도 어려울 정도로 그 아말로 full.     

게다가 내 자리는 양옆으로 덩치 큰 서양인이 나를 체포하듯 끼고 앉은 중간자리였다.


중간이든 끝이든 머리를 낮추고 누울 수 없는 자리라면 다 마찬가지였으므로 끼여앉

얹혀앉든 상관없었다

나는 타자마자 식판을 펼치고 머리부터 처박았다.

이 정도 갖고 택도 없지만 그 자리에서 내가 머리를 낮출 수 있는 최선의 자세였다.


남편도 내내 불안한 눈으로 나를 바라볼 뿐 뭘 어떻게 해줄 것이 없었다.

머리를 떼서 발밑에 슬쩍 굴려 넣어줄래?

그거 아니면 말도 걸지 마

입만 열면 토할 것 같았다


드디어 비행기가 이륙을 했다.

비행기의 고도가 차곡차곡 높아질수록 내 머리의 압력도 같이 높아지는 것 같았다.

아... 누가 내 머리에 고도계를 달아 놓았다면 따로 외부에 높이를 측정하지 않아도 아주 정확한 비행기의 고도를 알 수 있겠다 싶었다.      


아... 이건. 좀 심했다.

창공에 들어선 비행기는 정상 비행고도에 들어설 때까지 계속 위로위로 치솟을 예정이었다.

머리가 높이 있어서 아픈 병답게

당연히 통증도 높이 높이 치솟았다


기내의 승객들은 벨트를 매고 자리에서 가만히 기다리도록 지시가 내려왔다.

기내에는 족히 200명이 넘는 승객이 빼곡히 앉아 있었다.


비행을 본 사람은 누구나 알겠지만  비행기가 이륙을 해서 정상 고도에 오를 때까지는

가만히 자리에 앉아서 침만 꼴딱 꼴딱 삼켜야지 일어서거나 화장실 가거나 그딴 거 하려다가는

성질 사나운 스튜어디스한테 눈빛으로 뺨을 맞는다.

비행 중 가장 얌전해야 하는 시간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규정 따위 지킬 입장이 아니었다.

이러다 죽겠다 싶었다.

나는 옆사람에게 양해를 구하지도 않고 벌떡 일어섰다.

옆자리의 허연 아재들이 무슨 귀신 보듯 나를 우러러보았다.


복도로 나와서 우뚝 섰을 때. 내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저 멀리서 나를 향해 너 미쳤냐는 표정으로 손짓을 하며 자리에 앉으라는 신호를 보내던 스튜어디스의 얼굴이었다.

그리고는 나는 비행기 복도에 그대로 쓰러져서

얼굴을 비행기 바닥에 처박았다

그날 두 번째로 처박힌 참이었다

그리곤 당연히 정신을 잃었다


앤틱을 누가 살까-23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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