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초빼이 Feb 15. 2024

초빼이의 노포 일기 [대전 중구 대흥동 소나무집]

쳇 베이커의 심플하면서도 드라이 한 음악같은, 대전 오징어 국수집

비 오는 날 사람의 감정은 굉장히 풍성해진다.

조그마한 자극에도 감정은 쉽게 반응하고 좀 더 예민해져 보통의 날이면 쉽게 지나칠 수 있는 외부 환경의 변화나 자극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과학자들은 이런 현상의 이유로 안정감을 주는 '빗소리', 스트레스를 낮춰주는 '습도', 몽환적인 느낌을 배가하는 '흐린 하늘빛', 그리고 다양한 문화적 영향 등을 들기도 한다. 


초빼이는 사실 30% 정도의 레인 헤이터(Rain Haters) 기질과 70%의 더 감성적으로 민감해지는 기질을 지닌 듯하다. 비 오는 날 더 감성적이 될 수 있는 이유는, 쳇 베이커(Chet Baker)의 음악을 가장 잘 들을 수 있는 날씨이기 때문일 것이다. 간단한 악기 구성으로 굉장히 정갈하고 담백한 연주를 보여주는 쿨재즈(Cool Jazz) 스타일을 가장 잘 보여주는 그의 연주는 사실 조금 앞선 1940년대의 비밥(Be Bop) 스타일이나 그 이전의 스윙(Swing) 시대의 화려하고 조금은 과장된 음악적 기조보다는 조금 톤다운 된, 정적인 분위기의 음악에 가깝다. 


게다가 서걱서걱 거리는 듯한 그의 트럼펫 소리에, 하루 종일 제습기를 틀어놓은 듯한 방에서 노래를 불러야 나올 수 있을 것 같은 드라이한 그의 보이스를 얹으면 아이러니하게도 비 오는 날 정말 듣기 좋은 소리가 만들어진다. 어쩌면 그의 암울한 일생이 들려오는 사운드에 투영되어 더욱 감성적으로 느껴지는지도 모르겠다. 


쳇 베이커의 음악은 연주곡으로도 훌륭하지만 노래를 부르는 그의 목소리도 또 하나의 악기로서 기능을 한다. 특히 그의 대표적인 곡 "My Funny Valentine"의 첫 도입부 4마디에서 콘트라베이스의 저음 위로 올려진 그의 보이스는 달콤한 사랑의 고백을 담은 노래이지만 '세상 모든 허망함'을 담은 듯한 느낌으로 속삭인다.(사실 뮤지컬 'Babe's In Arms'의 원곡을 생각하자면 이런 곡의 해석이 적절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곡의 최고의 하이라이트는 곡 마지막 부분. 

"But don't change your hair for me, Not if you care for me, Stay little valentine, Stay"라는 가사를 무미건조하게 내뱉는 부분에서는 전율이 일 정도이다. 그야말로 드라이(Dry)함의 절정이라고 할까? "쳇 베이커의 음악에서는 청춘의 냄새가 난다"는 하루키의 말을 굳이 인용하지 않아도 트럼펫 하나와 드라이한 보이스로 자신만의 음악 세계를 만들어 낸 것을 충분히 알 수 있다.(생각해 보니 어제가 밸런타인데이였다)    



작년 늦은 가을 어느 날, 대전 출장에서 만난 노포 한 곳이 이런 드라이함을 지켜가고 있었다. 

한때의 영화를 뒤로하고 사람들의 발걸음이 조금씩 줄어들고 있는, 쇠락해가고 있는 도심의 한 귀퉁이에서 화려하지도 들썩거리지도 않게, 쳇(Chet)의 서걱거리는 보이스마냥 무덤덤하게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키며 그 자리를 지켜오고 있던 곳. 게다가 익숙지 않은 '오징어 국수'라는 낯선 장르로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집이었다.    


대전 중구 대흥동에 자리 잡은 이 집은 중앙로 전철역에서도 조금 떨어진 곳에 있다. 하지만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오래된 노포 고깃집인 '형제집'과 마주하고 있고, 대전에서 가장 오래된 갈빗집이라는 '대전갈빗집'도 1분 거리에 있어 찾아가기는 어렵지 않다. 대전 중구 대흥동의 '소나무집'이 바로 그곳이다. 

처음 이 집을 외형을 보자마자 드는 생각은 정말 주변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낯설음이었다. 한때 대전의 중심가였던 주변의 분위기와는 너무도 동떨어진 가게의 외관에 잠시 주춤거렸다. 보통의 1층 건물보다 더 낮게 드리운 지붕과 오래된 창틀을 보면 이 집의 시간을 눈으로 읽을 수 있다. 


요즘 말로 오픈런을 시도했다. 매장 오픈 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해 바로 앞의 형제집과 인근 시장, 그리고 골목을 걸으며 옛 영화의 흔적을 쫓았다. 그리고 다시 가게 앞으로 돌아오니 두 무리 정도의 손님들이 벌써 식사를 시작하고 있었다. 혼자 들어가 자리를 잡으니 국수는 1인분 주문이 안된다고 한다. 기꺼이 2인분을 주문하고 기다렸다. 법랑으로 코팅된 얇은 프라이팬에 오징어와 국물이 담겨 나온다. 사실 이 집의 근처로 갈수록 묘한 '군내(군등내)'가 코를 간지럽혔는데 그 출처가 바로 이 녀석이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군등내를 품은 얇게 저민 열무김치라고 해야 할까? 


첫인상이라 할 수 있는 음식의 향에서는 솔직히 그리 큰 매력을 느낄 수 없었다. 

이 독특한 군등내는 김치를 잘못 익히면 나는 썩은 냄새가 아닌, 김치를 오래 잘 익히면 나는 묵은내와 부패(腐敗) 사이의 경계에 걸친 그런 냄새와 같다. 사람들마다 호불호가 갈릴 수 있는 그런 향이지만 전반적으로 볼 때 묘한 기분을 안기는 냄새임은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출장 일정 중 들렸던 청주와 대전의 노포에서는 흔하게 맡을 수 있는 '오래 잘 익힌 김치'의 냄새이니 묵은내 쪽에 더 가까울 듯하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이 '군내'는 이 지방(충청도) 김치의 특징 중 하나로 타지방의 그것에 비해 젓갈을 많이 쓰지 않는 편이라 생기는 것인 듯하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김치 이야기를 먼저 꺼낸 것은 사실 이 집 오징어 국수의 맛은 이 얇게 저민 열무김치가 좌우하기 때문이다. 


첫 방문이라고 하니 직원분께서 친절하게 설명해 주시며 본인이 직접 음식을 챙겨주신다. 일단은 이 국물을 팔팔 끓이는 것이 국룰. 불을 올리고 직원분이 잠시 자리를 비운 동안 주위를 둘러보니 현지인들은 찬으로 나온 문제의 그 열무김치를 모두 집어 국물에 넣는다.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르듯'이 초빼이도 순간적인 촉을 발휘하였다. 매콤한 찌개가 끓어오르며 오징어 특유의 향에 열무김치 향이 더해지며 굉장히 맛있는 냄새가 만들어진다. 이제야 오징어 국수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적절한 비유인지는 모르겠지만 라면을 끓일 때 다진 마늘 한 스푼이나 설탕 반 스푼을 넣으면 국물의 맛이 완전히 바뀌는 그런 드라마틱한 변화를 이 오징어 국수 국물의 변화에서 느낄 수 있었다. 다진 마늘이나 설탕이 라면 국물의 맛을 바꾸는 단순한 변화라면 이 열무김치의 첨가여부는 맛과 향을 모두 바꿀 수 있는 복합적인 변화를 이끌어낸다. 물론 오징어 국수 국물에 이미 열무김치는 조금 들어 있지만 추가로 넣는 양에 따라 느낄 수 있는 차이는 엄청나다.    


조금은 시큼하고 칼칼한 국물이 꽤 매력적이다. 국물이 끓자마자 몇 수저 떠먹었더니 의외로 좋다. 쿰쿰한 향에 가려져 있던 진정한 맛이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한다. 직원분이 추가 주문한 칼국수 면을 가지고 와 냄비에 올려주신다. 국수 면이 마법처럼 국물 속으로 녹아들며 조금 진득하게 국물은 변화를 겪는다. 이 단계에 와서야 비로소 모든 변화를 끝내고 완전체로 변신한 오징어 국수를 맛볼 수 있다. 소주를 요청했다. 


비교적 양념이 많이 들어간 진한 국물에 들어가는 면은 조금 굵은 면이 좋다. 굵직한 면발 사이로 진득하고 진한 양념의 국물이 파고들어 입에 넣는 순간 최상의 볼륨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 양념이 코팅되듯 굵은 국수 면발을 휘감아 돌면 입안에 넣었을 때 느낄 수 있는 맛의 느낌은 최고치에 이른다. 

느닷없이 몇 년 전부터 짬뽕에 들어가는 면을 세면(細麵)으로 바꿔버린 인천의 단골 중국집에 대한 분노가 치솟아 올랐다. "이런 맛과 멋모르는 양반들이라곤!" 


한 가닥의 면도 남기지 않고 건져 먹었다. 저절로 소주잔이 테이블 위에서 바삐 움직이며 열일을 한다. 혹시 빠트린 면 한가닥이라도 없을까 젓가락으로 냄비의 바닥을 다 긁어본다. '이렇게까지 하면 사람이 쫌스러워 보이려나?'라는 주변의 시선에 대한 걱정은 시간을 두고 찾아온다. 지금은 본능에 충실한 게 맞다. 밥 한 공기를 테이블 위에 다시 올린다. 전분을 잔뜩 머금어 진득해진 국물과 볶음밥을 위해 남겨둔 오징어 조각 몇 점이 마지막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이제부터가 정밀하고 세심한 시간 조절이 필요한 시점. 밥 한 공기를 국물에 풀어 넓게 퍼트리고 최고의 화력으로 바짝 끓인다. 무거운 국물이 거품을 밀어 올리기 시작할 때 불을 절반 정도로 줄인다. 그리고 다시 기다림의 시간. 오징어 국수 국물의 흔적을 찾을 수 없을 때 즈음, 가장 약한 강도로 불을 줄이고 밥 알갱이에 수분이 빠져나간 듯한 느낌이 들면 불을 끈다. 옛날식 프라이팬 바닥에 살짝 눌어붙은 볶음밥을 즐길 시간. 


더 이상의 말이 필요 없다. 이미 완벽한 상태. 마지막 소주잔을 채우고 마지막 수저를 들어 올린다. 

마지막으로 팬을 긁어 올린 볶음밥을 입에 넣고 소주잔을 들이켜는 소리가 서걱거린다. 쿨(Cool)하게 식사와 반주를 마무리한다. 쳇(Chet)의 드라이한 트럼펫 소리와 보이스처럼 마무리한다.  


소나무집의 오징어 국수는 굉장히 단순한 음식이다. 육수와 양념 그리고 재료라고는 오징어와 파, 그리고 얇게 저민 묵은 열무김치가 거의 전부. 이 단순한 재료들로 이런 맛을 내는 것이 놀랍기도 하거니와 묵은 열무김치라는 주재료를 통해 이런 요리를 만들어 낸 이 지역 사람들의 창의력에도 감탄을 금할 수 없다. 대전이 '칼국수'로 꽤 유명한 지방이지만 이렇게 만들어 낸 변주가 또 하나의 장르가 될지는 어쩌면 본인들도 예상하지 못했을 듯하다. 굉장히 독특한 지역의 음식을 맛보는 것도 또 하나의 기쁨이다. 


[메뉴추천]

1. 1인 방문 시 : 오징어국수 2인분 + 면사리 +밥 + 소주

2. 2명 이상 방문 시 : 오징어국수(사람수에 맞게) + 면사리 +밥 + 소주

* 개인의 취향에 의한 추천이니 절대적인 것은 아님. 적어도 사람 수만큼은 주문해야 도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만. 


[추가 팁]

1. 대전의 구도심에 위치하고 있어 주차장은 별도로 없다. 일단 가게 인근에 주차 가능한 골목이 있다. 인근 

   수변 도로에도 주차를 많이 하는 편. 편안하게 드시고자 한다면 대중교통이 가장 좋을 듯하다.  

2. 화~수 11:30~21:00 / 브레이크 타임 15:30~17:30 / 월요일 정기휴무(1,3주 월요일) 

3. 참고

    - 1인분 주문은 불가. 혼자 가더라도 2인분은 주문해야 함

    - 면사리는 처음 주문 때만 가능. 넉넉하게 주문하는 것이 후회하지 않는 길이다. 

4. 여행 및 관광정보 

    - 인근 노포 : 형제집, 대전갈비집, 성심당, 김화칼국수, 개천식당, 왕관식당, 명랑식당, 태화장, 별난집, 

      신도칼국수, 호돌이만두, 함경도집, 이리추어탕, 전통칼국수, 한밭식당, 중국성, 삼오정, 진로집, 광천

      식당, 희락반점, 사리원면옥 등 

    - 대전 중앙로에도 오래된 일제 강점기하에 지어진 옛 건물들이 많으니 찾아볼 수 있다. 

    - 대전 지하철을 이용하면 유성온천으로 가 온천욕을 즐길 수도 있음.  

    - 대전 서구의 한밭수목원도 추천한다. 대전 시민들이 가족들과 함께 많이 찾는 곳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초빼이의 노포 일기[강원도 강릉 초당동 원조초당순두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