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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빼이 Nov 07. 2024

신림동 순대타운의 시작, 원조백순대곱창

136. 서울 관악구 신림동 신림민속순대타운 302호 전주 익산집

8~90년대에 대학을 다니던 사람들에게는 누구나 포장마차에 대한 애틋한 추억들이 하나둘씩 있다. 

먼지보다 더 가벼웠던 주머니를 아무리 털어도 소주 한 병 사 마실 동전도 천 원짜리 지폐 한 장 나오지 않았고, 십시일반 하여 모았던 동전은 겨우 소주 한 두병 사 마실 수 있을 정도였지만, 그래도 좋았다. 심지어 따뜻한 우동이나 오뎅 한 그릇, 오돌뼈 한 접시는 언감생심이었던 시절. 그래도 그때의 포장마차에는 자리에 앉기만 하면 사장님이 내주셨던 홍합탕이 있었고 그 그릇에는 소주 몇 병은 거뜬히 감내할 수 있던 젊음도 함께 있었다. 곰살궂은 사장님이 운영하시던 곳이라면 소주만 주문해도 그렇게 큰 눈치를 주지 않았다. 녹녹지 않은 학생들의 주머니 사정도 감안해 줄 만큼 뜨거운 애정이 흘러넘치는 곳이기도 했다. 25도짜리 소주가 너무나 잘 어울리던, 그런 시절이었다.


요즘이야 포장마차를 찾는 것이 더 힘든 시절이지만, 90년대까지만 해도 종로나 혜화동 그리고 집 근처 버스 정류장 뒷골목에는 노르스름한 백열전구 불빛을 스스럼없이 내뿜던 포장마차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신림동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1960년대 후반부터 순대 노점상들이 하나둘씩 자리 잡으며 포장마차 촌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1970년대 후반쯤엔 신림동에서는 순대볶음이 요리로 대접받았다. 1980년대 중반부터는 그 규모가 커지며 순대골목이 되었다. 집으로 들어가기 전, 또는 1,2차 자리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던 사람들은 하나둘씩 순대포장마차나 노점에 자리를 잡고 앉아 길었던 하루를 그렇게 마무리했다.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신림동 일대의 순대집들은 거리정비 사업이라는 명목 하에 한 건물에 모이기 시작했다. 1992년 신림동을 대표하는 순대타운인 '민속순대타운'과 '양지순대타운'은 이런 과정을 통해 자리를 잡게 되었다.  


최근 SNS와 유튜브 등을 통해 요즘의 청년들에게 새롭게 각광을 받고 있는 '백순대'의 역사는 의외로 길다. 아니 순대골목의 시작이 백순대부터였다. 무려 50여 년이나 되는 역사를 가지고 있는 것. 자극적이고 달기만 한 요즘의 음식과 달리 아무 양념 없이 소금과 후추, 들깻가루로만 간을 맞췄으니 요즘 젊은 세대들의 입에는 이 백순대의 맛이 다른 세상의 음식처럼 색다르게 느껴지는 듯하다. 80년대에 등장하여 한동안 순대볶음 시장을 제패했던 매운 양념의 순대볶음은 민속순대타운 등이 자리를 잡기 시작할 즈음 백순대에 다시 메인 메뉴 자리를 내주었다.

옛 직장의 어르신들과 약속이 있어 서울로 향했다. 이왕 상경하는 길 노포 한 곳이라도 더 취재하기 위해 조금은 이른 시간에 사무실을 나섰다. 30대 초반 한두 번 찾고 가지 않았던 신림동의 순대골목을 들리기 위해 신도림에서 2호선으로 갈아탔다. 평일 낮이었지만 여전히 복잡하고 사람들로 북적거리던 길. 2호선 신형 열차에 몸을 올리고 나서야 겨우 한숨을 돌렸다. 지금은 다른 사람의 배우자가 되었을 그 당시 여자친구와 한 번, 등산 동호회의 친한 사람들과 한번 들렸던 것이 마지막으로 기억된다. 20여 년 만에 찾은 신림역은 지하철 노선이 하나 더 추가되어 꽤 복잡한 곳이 되어 있었다. 4번 출구를 나서 신림민속순대타운으로 발길을 돌렸다. 


신림민속타운에 입주한 가게들은 손바뀜은 있었지만 거의 초창기부터 운영되던 곳들이라 딱히 어느 가게를 찾겠다고 마음먹은 곳은 없었다. 엘리베이터에 올라 손이 가는 대로 누르니 3층. 3층에 내려 사람들이 비교적 적은 곳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으니 그곳이 바로 302호 '전주익산집'이었다. 오전 11시부터 이미 두 팀의 손님이 자리를 잡고 낮술을 시작하고 있다. 순대볶음이라는 요리 때문인지 아니면 평일 낮이라는 시간 때문인지 의외로 여성 손님이 많았다. 서글서글한 인상의 사장님은 오전 시간임에도 이미 눈 부위가 벌겋게 달아올라 피곤에 절은 얼굴로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사장님, 백순대 곱창볶음 2인분이랑 소주 하나요" 

이 시간에 소주를 주문하면 사장님이 한번 더 얼굴을 쳐다보거나, "참이슬요?"라며 한번 더 주문을 확인하게 마련인데 이곳에선 흔한 일인지 두말없이 음식을 준비하러 가신다. '이런 기분 어디선가 느낀 적이 있는데?' 하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오사카 취재 때 이와 같은 느낌을 받았던 기억이 났다. 아침 10시부터 손님으로 가득 차 있던 오사카 신세카이(新世界) 근처 이자카야의 문을 열고 들어갈 때 느꼈던 그 느낌이다. 멀쩡하게 생긴 양반들이 아침 10시부터 술에 절어 있던 그 술집에 발을 디밀 때의 그 느낌. 말끔한 정장 차림의 남성과 여성들, 피곤에 절은 얼굴의 작업복 차림 아저씨들이 한데 뒤섞여 술을 마시던 모습을 보며 '이 사람들은 출근 후일까? 아님 퇴근 후일까?' 궁금해했던 생각도 뒤를 이었다. 


싱싱한 간과 양념장 그리고 깻잎, 치킨무가 기본 안주로 먼저 나오고, 소주도 그 뒤를 따른다. 경쾌하고 깔끔한 식감을 좋아하는 초빼이는 사실 순대집에서 나오는 간이나 허파류는 그리 즐기지 않는 편이다. 입안에 텁텁하고 껄끄러운 무언가가 계속 남아있는 느낌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 조금 망설이다 간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 "오~!" 

동네 분식집이나 시장의 순대집에서 내는 간과는 전혀 다른 신선함에 감탄이 먼저 나왔다. 부드러운 목 넘김과 촉촉한 식감을 위해 소금을 섞은 참기름을 두르고, 깔끔한 뒷맛을 내기 위해 매운 고추도 송송 썰어 넣었다. 담음새와 색상도 신경 써 붉은 고추와 푸른 고추를 고루 올렸고 얇게 저민 간을 넓게 펴 접시에 올렸다. 흩뿌린 참깨가 마치 꽃의 '수술'처럼 자리하고 있으니 작은 꽃 한 송이가 피어난 듯하다. 예감이 좋다.    

순대볶음이 완성되기 전까지 입가심 겸 안주 삼으라고 내주시는 전주익산집의 기본 안주다.(사실 거의 모든 집의 기본안주 구성은 같다) 신선한 간을 한 조각씩 집어 먹다 보니 소주 석 잔을 금세 마셔 버렸다. 오후 3시에 있는 어르신들과의 술약속을 위해서는 적절히 페이스를 조절해야 할 필요가 있다. 자칫 잘못하면 오늘도 '인천역의 그분'을 뵐 수도 있겠다는 불안감이 들었다. 신선하고 좋은 간을 입에 넣으면(조금 과장해서) 잘 익힌 후 차갑게 식힌 푸아그라의 식감을 느낄 수 있다. 물론 푸아그라의 그 푸딩과 같은 부드러움은 따를 수 없지만 입에서 느껴지는 느낌은 일부 비슷하다. 기본적으로 '간'이라는 부위가 지방을 많이 품고 있는 부위기에 교집합 같은 부분이 있다. 오히려 기름기는 돼지의 간이 적어 좀 더 깔끔한 맛을 느낄 수 있다. 초빼이가 싫어하는 것은 오래된(그리고 오래 삶은) 간의 퍼석퍼석하고 텁텁한 식감이다. 


백순대 볶음이 테이블 위로 자리를 잡았다. 양념볶음과 달리 기름에 볶는 것이라 쟁반으로 뚜껑처럼 덮어놓는다. 양배추와 파, 당근, 양파, 깻잎 등과 같은 갖은 채소와 쫄면, 그리고 순대와 돼지 곱창이 들었다. 그 위로는 들깨가루를 뿌리고 소금과 후추를 뿌려 밑간을 한다. 뚜껑을 덮은 체 숨이 죽을 때까지 기다리면 사장님이 다시 와서 야채들을 뒤집으며 볶아 주신다. 양배추가 익어가는 향이 좋다. 그 위로 들깻가루의 고소함이 한층 더해지고 소금과 함께 뿌린 후추향도 슬며시 발을 올린다. 마치 어린 시절 자주 먹었던 '엿가락'같은 모습을 한 돼지 곱창이 노랗게 얼굴색을 바꾸기 시작하면 다시 스텐 쟁반과 뒤집게를 사용해 아랫부분과 윗부분의 자리를 바꿔준다. 찌그러진 사각 볶음판 위의 세상이 점점 완성되어 간다. 각각의 재료가 양념과 향신료를 매개로 섞이며 개별의 특성은 살아있지만 더욱 두터워진 맛을 만들어가며 익어간다. 


때로는 설익은 녀석도 입에 씹히기도 하고 때로는 과하게 익힌 녀석도 입안으로 들어온다. 잘 익은 양배추의 그 고혹적인 투명함도 보기 좋다. 채소와 쫄면 사이에 숨어 몰래 입안으로 들어온 붉은 고추의 아찔함도 즐거움 중의 하나이다. 세상도 그렇다. 때론 불완전하기도 때론 너무 완벽하기도 하다. 보기 좋은 모습도 넘치고 보기 싫은 모습도 동전의 양면처럼 존재한다. 그리고 가끔, 아주 가끔 튀어나오는 의외의 이벤트에 놀라기도 한다. 이런 다양한 모습의 결합을 통해 우리의 삶은 적절한 긴장을 유지하고, 싫증 나지 않을 다채로움도 갖추고 있다. 같은 재료를 써도 다른 맛이 나는 음식처럼 우리의 삶도 예상을 벗어나는 의외성으로 인해 오히려 흥미롭다. 백순대 볶음 철판에서 이런 생각을 떠 올리는 것을 보니 조금씩 술기운이 몸에 자리를 잡는 듯하다. 백순대가 다 익으면 볶음판 중간에 도넛의 중간 같은 공간을 만들고 깻잎 두세 장을 깐 후 양념장까지 올린다. 그리고 고명처럼 부추도 흩뿌리는 과정까지 거치면 백순대는 완성.   

백순대를 찍어먹는 소스는 일반적인 순대소스보다 훨씬 더 입체적이다. 아니 오히려 그것보다 더 많은 재료를 추가하여 조금 더 발전한 형태의 소스다. 과하다 싶을 정도의 간 마늘과 매운 고추, 들깨가루와 통깨가 조금은 묽은 막장의 양념에 들어간다. 초고추장과 참기름(으로 추측), 그리고 된장에 약간의 물을 섞어 농도를 맞추면 소스도 완성. 담백한 순대나 곱창, 그리고 채소를 찍어먹기 좋은 소스이다. 양념장을 만드는 재료의 구성으로만 보면 전라도식과 경상도식이 결합된 '서울 신림동식' 양념장이 되었다. 그런데 상호는 '전주 익산집'이다. 그 양념장을 백순대 볶음 중앙에 떡하니 올려놓으니 마치 화룡점정(畵龍點睛) 한 것 같다. 투박하지만 나름 시각적 아름다움까지 갖췄다. 


딱 두 잔만큼의 소주를 남기고 볶음밥을 주문했다. 볶음을 먹은 후에 밥을 볶는 것은 마치, 해가 지고 난 후 달이 뜨는 것과 같은 이치다. 너무나 당연한 세상의 법칙과 같은 것이라 밥을 볶지 않는 것이 오히려 더 이상할 정도이다. 오늘의 식사는 솔직히 테이블 건너편에 누군가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 담백하고 슴슴한 백순대 볶음과 볶음밥을 먹는데 함께 즐길 이가 없다는 것이 조금 아쉬웠다. 다시 소주 한 잔. 


볶음밥을 기다리며 고개를 드니 이미 매장의 모든 좌석에 사람이 들어찼다. 사장님 부부도 의자에 걸쳐 앉아 늦은 아침인지 이른 점심인지 모를 끼니를 해결하고 있다. 항상 궁금했었다. 이런 식당이나 음식점의 직원들이나 사장님들은 어떤 음식으로 끼니를 때우고 식사를 할지. 워낙 노동의 강도가 '쎈' 업군이라 어지간한 음식들로는 소모되는 에너지를 다시 보충하지 못할 텐데 뭔가 특별한 그들만의 식사 메뉴가 있지 않을까 싶은 호기심도 들었다.  

20여 년 만에 찾은 신림동 순대타운은 여전했다. 아니 초빼이가 찾았던 그 옛날보다 훨씬 더 체계를 갖춘 곳이 된 듯하다. 음식값은 여전히 저렴했고, 그 저렴함에 어울리지 않은 좋은 맛을 냈다. 초빼이가 계산하고 나올 무렵 연예인 같은 사람이 손님으로 왔는지 먼저 계산하고 나가던 여자 손님들이 웅성웅성거리며 사인을 받고 사진까지 찍는다. 자리를 정리하고 나도 계산대로 향했다. 그 연예인 같던 체격 좋은 청년이 내 카드를 받으며 직접 계산을 해준다. 그의 모습은 근사한 외모와는 조금 어울리지 않는 심한 경북 사투리. 그것도 대구 쪽이 아닌 안동이나 청송 쪽의 내륙 쪽 말투 같다. 마지막까지 아이러니함의 연속이다. 


서울 신림동식 순대와 양념장을 내는 '전북 익산집'이라는 상호의 순대집 아들(자제분같이 보였다)이 완전 오리지널 경북사투리를 구사하다니. 

역시 세상은 아이러니함으로 가득하다. 그래서 재밌다.  

 [메뉴추천]

1. 1인 방문 시 : 원조백순대곱창 2인분 + 볶음밥 + 소주

2. 2인 이상 방문 시 :  원조백순대곱창, 양념순대곱창 또는 양념곱창볶음 + 볶음밥 + 소주

     (압도적으로 원조백순대곱창을 주문하는 분들이 많다.)

* 개인의 취향에 의한 추천이니 절대적인 것은 아님. 적어도 사람 수만큼은 주문해야 도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만.


[추가 팁]

1. 순대타운 주차장 이용. 

2. 매일 10:00~02:00(새벽)  

3. 참고

    - 인터넷 검색은 '신림순대타운 전주익산집'으로 해야 한다. 

    - 볶음밥 강추. 거의 모든 손님들이 원조백순대곱창만 주문한다.

    - 전국으로 택배나 백순대 택배도 가능하다. 

4. 여행 및 관광 정보

    - 인근노포 : 동학, 미림분식, 한남식당, 난곡산장, 복돈이생고기, 황해도빈대떡, 오첨지, 신풍루 곱창

      구이, 서울갈비, 흥부보쌈,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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