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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제호 Apr 05. 2024

자잘한 생각들 (1)

  나는 글을 쓸 소재가 생각날 때마다 틈틈이 브런치나 휴대폰에 메모해놓곤 한다. 하지만 그중에는 한 편의 글로 쓰기에는 너무 짧거나 단편적이어서 그대로 묻혀있는 소재들이 꽤 있는 편이다. 오늘은 그중에 몇 개를 골라서 풀어보려 한다. (다음 편이 언제 나올지는 미정)


 1. 사람은 고쳐쓸 수 없다?

  사람은 고쳐쓸 수 없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누군가를 내 마음대로 고칠 수 있단 생각을 버리라는 것이지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얼마든지 의지에 따라서 스스로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종종 나이가 너무 들어서, 혹은 살아온 게 있어서 바꾸기 어렵다고 할 때가 많다. 물론 시간이 지나고 나이가 들수록 살아온 패턴과 관성으로 인해 쉽지는 않기는 할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아마도 저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바꿀 생각이 없는 것이 아닐까 싶다.


전자기기처럼 쉽게 고쳐지진 않는듯…


2. 고향이란 무엇인가.

  보통은 내가 나고 자란 곳을 고향이라고 한다. 그럼 나에게는 서울이 고향이고 그중에서도 강서구 방화동이 고향인 셈이다. 하지만 나는 그곳을 고향이라고 느끼거나 그곳을 떠올리며 향수에 젖는 일이 드물다. 당연히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심지어 그곳은 지금 너무나도 많이 바뀌어서 예전 흔적을 찾아볼 수도 없을 것이다.

   혹시 내가 태어난 집에 거주한 시간이 짧아서 그런가 싶기도 하지만, 그래도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까지는 이사를 하더라도 방화동 내에서 했기 때문에 딱히 기간이 문제는 아닌 듯싶다.

  그럼 나는 어떤 곳을 고향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나는 업무특성상 프로젝트를 따라 근무지를 이리저리 옮겨다니는데, 프로젝트가 끝나게 되면 다음 프로젝트를 시작하기 전까지는 잠시 본사로 복귀한다. 그래서 프로젝트가 끝난 날 잠실에 있는 본사로 복귀를 할 때면, 잠실역을 내려서부터 마음이 설레기 시작했었다. 나도 모르게 '집이다'라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그리웠던 마음과 반가운 마음이 공존하며 발걸음이 빨라지곤 했다.

  그런데 몇 년 전, 우리 부서는 판교 쪽으로 이동하게 되어 이제는 프로젝트가 끝나면 잠실의 본사가 아니라 판교로 복귀를 해야만 했다. 그러자 놀랍게도 가끔 잠실 본사를 들를 일이 생겨 본사를 방문하면 예전처럼 '집이다'라는 마음이 들기는커녕, 낯설고 불편한 장소로만 인식되기 시작했다.


  아마도 나에게 고향이란 내가 보고 싶은 사람들, 나를 기다려주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있는 곳이 아닐까.


고향이라면 이런 이미지를 떠올리게되는 고정관념도 생각을 제한하는 듯 싶다.


3. 발상의 전환

  얼마 전 모 만화책을 보는데 거기서 한 남성이 육아에 대해 매우 많은 부담을 느끼고 책임감을 느껴 스트레스를 받는 장면이 나왔다. 의무를 다하기 위해 어떻게든 빨리 퇴근해서 집에 가 아이를 돌보려 하고 아이 입학식이나 운동회에 꼬박꼬박 참여하려 애쓰고는 있었지만, 그게 생각보다 많이 힘들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그러자 주인공이 그 남자에게 조언하기를,


  아이를 키우는 것을
의무라고 생각하지 말고
당신의 권리라고 생각해라.
당신에게는
아이의 첫 뒤집기를, 첫 옹알이를,
첫걸음마를 지켜볼 권리,
입학식과 운동회 졸업식에 함께할 권리,
아이의 미소를 볼 권리가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당신이 퇴근하고 집에 가서 아이를 돌보는 것,
입학식이나 운동회 등의 행사에 참여하는 것은
의무가 아니라
당신의 정당한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기에
스트레스를 받을 필요가 없다.


  나는 아이가 있기는커녕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았음에도 이 말에 큰 감명을 받았다. 그리고 이렇게 발상을 전환하는 것만으로도 같은 현상, 같은 일에 대한 마음가짐이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이 꽤나 신선하게 다가왔다. 비단 육아뿐만 아니라 일상에서도 이를 적용하면 하루하루 기쁘고 행복하게 살 수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4. 시작이 반이다.

  고등학생 때쯤인가 방학 때 친구네서 같이 숙제를 하고 있을 때였다. 그때 내가 친구에게 시답잖은 농담을 던졌었다.

  "우리는 이제 반을 한 거야."

  "뭔 소리야?"

  "시작이 반이잖아. 근데 우리는 이제 시작을 했으니까 반이나 한 셈이지."

  "그럼 반대로 반을 해야 이제 시작 인 셈 아니냐?"

  "아냐 명제는 참이지만 역이 참이라는 보장은 없지"

  "그럼 반도 못한 우리는 시작도 못한 건가?"

  "시작이 반이라는 말의 대우네. 그거는 그럼 참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러자 거실에서 컴퓨터를 하던 친구네 형이 우리 대화를 듣고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뭐라는 거야 니네-_-"

 

  한 심리학 교수가 방송에서 말하길, 스트레스를 푸는데 제일 좋은 방법이 친구들하고 생산적이지 않은 대화를 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저때의 대화는 그 대표적인 예시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인지 저때를 회상해 보면, 방학에 나가 놀지도 못하고 숙제를 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있음에도 숙제에 대한 스트레스는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이처럼 소위말하는 쓸데없는 얘기를 하는 건 꽤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한 몇 년 전에는 친구들 모임에 가는 것이 꽤나 불편했던 기억이 있다. 물론 얼굴도 보고 안부도 묻고 맛있는 것도 먹고 술도 마시는 건 좋았지만, 대화 주제가 온통 주식, 부동산, 이직, 육아에 대한 것들 뿐이었기 때문이었다. 막연하게 불편하다고만 느끼고 있다가 저 방송을 본 이후에야 그 이유를 명확히 알게 되었고, 그 뒤 우리 집에 친구들을 초대할 일이 생겼을 때, 친구들에게 '우리 집 문지방을 넘는 순간부턴 생산적인 얘기는 금지'라고 단단히 경고를 했다. 친구들은 그럼 무슨 얘기를 해야 하냐고 했지만 이내 별거 아닌 소재를 가지고 이야기 꽃을 피우며 놀 수 있었고 그제야 모임이 불편하지 않고 편안하게만 느껴지기 시작했다.

(요즘에는 굳이 그런 얘기를 하지 않더라고 모이기만 하면 좋은 술에 대한 얘기를 나누기 때문에 구태여 생산적인 얘기는 하지 말라고 할 필요가 없어졌다.)

  나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요새는 대부분 생산적인 대화를 하려 하는 것 같다. 실제로는 생산적이지 않더라도 현실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고민을 해야 하고 걱정을 해야 하는 것들에 대해 많이들 얘기한다. 아마도 이로 인해 점점 스트레스가 풀리지 않고 정신적으로 피폐해지는 게 아닐까 싶다.

  그래서 최소한 나만이라도 주변사람들을 만날 때, 조금은 덜 생산적인 얘기를 많이 나누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하곤 한다. (잘 안되긴 하지만)


그래서 취미가 중요한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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