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눈을 뜨니 옆이 허전했다. 커튼 틈으로 햇살이 들어오는 것을 보니 아내는 이미 일어나서 아침 먹을 준비를 하러 나간 듯했다. 해가 뜨기는 했지만 아침 알람이 울리지 않은 것으로 보니 아마 6시쯤 되지 않았을까 싶었다. 휴대폰을 집어 들어 시간을 확인해 보니 6시 11분이었다. 알람이 울리는 6시 30분까지는 그대로 누워 억지로 잠을 청해볼까 생각했지만, 그래봐야 고작 2~3분 자거나 아예 못 잘 것이 뻔해서 그냥 일어나기로 했다.
자기 전에 옆에 벗어둔 티셔츠를 입으며 거실로 나가니 아내가 분주해 보였다. 굳이 아내 곁으로 가지 않아도 이미 레몬 냄새가 코를 찌르는 것으로 보아 오늘도 레몬주스를 만든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특이하게도 아내는 종종 아침에 레몬주스를 만들거나 저녁에 레몬이 들어간 요리들을 만들 때가 있었다. 결혼 전에는 알 수 없었던 식성인지라 신기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원래 레몬을 좋아했었냐고 물어보았더니 아내는 정작 딱히 그렇지는 않다고 했다. 가끔 상큼한 게 당겨서 그런 것뿐이라고 했다.
주스를 만드는 아내를 놔두고 화장실로 향했다. 부랴부랴 씻고 대강 머리를 말리고 나오니 아내는 어느새 아침을 먹고 있었다. 신혼 초에는 억지로라도 같이 아침을 먹으려 하긴 했었지만 한평생 아침을 먹지 않고 살아온 나에게는 꽤나 고역이었다. 그래서 불과 석 달만에 아내는 아내대로 아침을 챙겨 먹고, 나는 나대로 아침을 거르고 출근 준비를 하는 것으로 자연스레 굳어졌다.
오늘따라 일찍 눈이 떠져서 출근 때까지는 시간이 꽤 남았기에, 아내 맞은편에 앉아서 휴대폰 게임을 켰다. 식빵을 와그작 씹어먹는 소리가 들렸다. 아내는 보통 밥을 선호하는 편이지만 아침에는 가끔 식빵을 구워 먹는 모습을 보였다. 그런 날에는 어김없이 옆에 레몬주스가 놓여있었다. 식빵에 레몬주스가 잘 어울리냐고 물어보니 레몬주스에 밥을 먹을 순 없어서 라는 대답이 돌아왔었다. 그런 걸 보면 이 조합의 메인은 식빵이 아닌 레몬주스인 듯했다. 레몬주스를 마시기 위해 밥을 식빵으로 바꾼 것이다.
"당신 어제 설거지하기로 해놓고 왜 이렇게 늦게 들어왔어?"
아내의 말에 휴대폰 화면을 쳐다보며 그대로 대답했다.
"어제 갑자기 번개가 잡혔어. 안 갈라고 했는데 고객사 CEO가 소집한 거라 가긴 해야겠더라고. 설거지는 오늘 들어와서 할게."
"아냐, 당신이 하지 않는다고 설거지 거리를 쌓아놓는 건 웃기잖아. 무슨 기싸움하는 것도 아니고. 내가 그냥 했어. 다음에는 당신이 미리 해줘."
결혼한 지 몇 년이 지났지만 아내는 이럴 때마다 늘 차분하게 대화를 걸어왔다. 다른 집들은 양말을 뒤집어서 넣지 말라던가 빨래할 옷들은 바로바로 통에 넣으라던가 하는 사소한 걸로도 불꽃 튀게 싸운다던데 우리는 아내 덕분에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 가끔 내가 불같이 화를 낼 때도 있었지만 그럴 때도 아내는 늘 차분하게 대응을 했고 덕분에 나도 화를 내는 빈도가 점점 줄어들었다. 때로는 아내가 이렇게 현명한 대응을 해주는 것이 고맙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친구들은 나를 보며 복에 겨운 결혼을 한 억세게 운 좋은 놈이라고들 했다.
어느새 출근할 시간이 다가와서 휴대폰 게임을 끄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먹은 거는 그냥 싱크대에 넣어둬. 저녁에 내가 설거지할게."
"아냐, 뭐 얼마 되지도 않는걸. 내가 간단하게 정리할게. 얼른가. 늦겠다."
출근길 지하철에서 이번주 나머지 일정을 확인해 보았다. 이번주는 짐작했던 대로 너무 바쁜 한 주가 될 예정이었다. 월요일인 어제는 고객사 CEO와 술자리를 했고, 오늘은 다른 고객사와 계약을 마무리 지어야 했다. 내일은 주간 보고를 완성해서 제출해야 했고, 목요일에는 부서회식, 금요일에는 사업부장 보고가 예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금요일은 결혼기념일이기도 했다.
보통 월마다 있는 사업부장 보고가 끝나면 선배들이 술을 사주곤 했다. 성격이 워낙 괄괄한 사업부장에게 하는 보고라 보고자는 보통 영혼까지 탈탈 털리기 마련인지라, 자연스레 보고자를 위로하는 자리가 생기곤 했다. 다만 이번에는 결혼기념일과 겹치기 때문에 선배들에게는 그날 자리에 참석하지 못할 것 같다며 미리 양해를 구해 놓았다. 선배들은 결혼기념일이면 당연히 그래야 한다며 꽃이라도 사들고 집에 가라고 해주었다. 하지만 그날을 어떻게 보낼지는 이미 정해져 있었고 그건 아마도 선배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게 보낼 예정이었다.
금요일 저녁, 보고를 끝내고선 평소보다는 조금 일찍 회사를 나섰다. 아내에게 3시에 일을 모두 마쳤다고 연락이 왔다. 평소와 다르게 이런 날 하루쯤은 멋을 부려보자는 아내의 말에 오랜만에 꺼내 입은 정장이 조금 불편하기는 헸지만 아직 테가 나기는 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회사에서 바로 출발해야 해서 비록 아내를 만나기 전에 다시 머리를 만지고 향수를 뿌리는 등의 정성을 들일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말끔한 모습으로 아내를 만나고 싶어서 땀을 흘리지 않도록, 그리고 옷이 구겨지지 않도록 조심조심 천천히 걸어서 지하철을 타러 갔다. 지하철 역에 도착해서도 사람들에게 치이지 않도록 지하철 한 대를 보내고 그다음 차를 탔다. 30분 뒤, 지하철에서 내리니 아내에게서 이미 전시회관 앞에서 도착해 기다리고 있다는 전화가 왔다. 지금 지하철에서 내려서 올라가는 중이니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하고 계단을 서둘러 올라갔다.
평소에는 그러지 않는 사람이지만 아내는 가끔 조금 엉뚱한 짓을 할 때가 있었다. 레몬주스나 레몬 요리도 그렇지만 어떤 날에는 갑자기 걸어서 63 빌딩을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내려오자고 할 때도 있었고 어떤 때는 집 근처 산에 올라가서 산 위에 놓여있는 운동기구들을 써서 운동을 하고 오자고 할 때도 있었다. 그렇게까지 이상한 것은 아니지만, 평소 운동이라면 담을 쌓고 지내는 사람이 그러니 조금 당황스러웠었다. 갑자기 왜 그러냐고 물어보면 돌아오는 대답은 '그냥. 갑자기 그러고 싶네.'였다.
이번 결혼기념일에 미술 전시회에 오게 된 것도 아내의 저런 엉뚱한 행동의 일환이었다. 무려 두 달이나 전에 갑자기 아내가 말을 꺼냈다. 갑자기 미술 전시회를 보러 가고 싶다는 것이었다. 인터넷에서 그냥 스쳐 지나가는 광고를 봤는데 꼭 보고 싶어 졌다는 것이 이유였다. 다만 문제는 전시회 일정이 고작 1주일뿐이었기에 우리 둘의 일정상 결혼기념일 날이 아니면 갈 수가 없었다. 결혼기념일이 아닌 다른 날에 아내 혼자서 보고 오라고 하고도 싶었으나 왠지 좀 무정한 남편의 모습으로 비칠까 싶어 같이 가겠노라 말했다. 하지만 막상 말을 꺼내고 보니 결혼기념일인 것이 마음에 걸려 결혼기념일인데도 괜찮겠냐고 아내에게 물어보았더니 생각 외로 아내는 선선히 받아들였다. 덕분에 결혼기념일이라고 해서 특별한 걸 준비할 필요는 없어졌고, 전시회를 보고 식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되었다.
평소와 다름없이 아내는 침착하고 차분한 모습으로 전시회장 앞에 서있었다. 아내 모습을 보니 오래 기다리지 않은 모양이라, 다행이라 생각하며 아내의 손을 잡고 전시회장으로 들어갔다. 아무래도 무명화가의 전시회다 보니 금요일임에도 사람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구경 중인 사람들도 미술에 관심이 있거나 미술 쪽 전공을 가졌을 것으로 추측되는 학생들이 대부분이었다. 단돈 5000원에 입장권을 사서 메인 전시관 쪽으로 발을 옮겼다.
전시관 안은 넓고 시원했다. 사람들이 없어서 그런지 약간은 추운 느낌도 들었다. 미술품의 손상을 방지하기 위해 온도와 습도를 조절해 놓기 때문에 사람에게는 그다지 쾌적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어디선가 주워 들었던 것이 생각났다.
첫 번째로 마주친 그림은 굉장히 평범한 풍경화였다. 그저 아무것도 없는 넓고 푸른 벌판을 그린 유화였다. 그림의 위쪽 반은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이었고 아래쪽 반은 그저 초록색의 평원이 그려져 있었다. 흡사 옛날의 윈도 XP 배경화면 같은 그림이었다. 대체 어디를 그린 것이고 무슨 의도인지 알고 싶었으나, 그림에 별다른 설명이 붙어있지는 않았고 제목도 <무제> 일뿐이었다. 다음 그림으로 발을 옮기려 했으나, 왜인지 아내는 그림 앞에서 도통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내에게 깊은 울림을 주는 무언가를 느끼나 싶어 물어보았지만 아내는 그저 조금 천천히 감상하고 싶다고 말할 뿐이었다.
그런 아내를 남겨두고 나 홀로 두 번째 세 번째 그림을 구경해 보았지만 여전히 그림에는 흥미가 생기지 않았다. 전시관 끝까지 갔다 오면서 대강 그림들을 훑어보았지만 대부분은 풍경이었고 일부 추상화도 있었다. 풍경이라도 잘 그렸다면 '하나 사서 집에 걸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겠지만 여기 있는 그림들 중 사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는 그림은 하나도 없었다. 결국에 나는 그림 감상은 뒷전에 놓고 통로 중간중간 놓여있는 의자에 앉아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잠깐잠깐 아내를 확인하며 휴대폰 게임을 하다 보니 어느새 1시간가량이 흘렀다. 도저히 지루해서 안 되겠다고 생각했을 무렵, 아내는 드디어 전시관 끝 마지막 그림 앞에 도달했다. 얼른 가고 싶은 마음에 아내 쪽으로 걸어가 아내 옆에 서서 같이 그림을 보았다.
마지막 그림은 지금까지 나온 그림과 다르게 정물화였다. 바로 레몬 한 바구니를 그린 정물화. 아마 아내는 광고에서 이 그림을 본 게 아닐까 싶었다. 레몬을 유달리 좋아하는 사람이니 이 그림에 꽂혀서 보러 가자고 한듯했다. 하도 정성스레 레몬을 그려놓아서 그런지 어디선가 은은하게 레몬향이 나는 것도 같았다.
"당신이 좋아하는 레몬이네? 보다 보니까 어디선가 레몬향이 나는 것도 같고."
내 말에 아내는 대꾸도 없이 계속 그림을 쳐다보았다.
"당신 이 그림이 마음에 들면 한번 얼만지 물어볼까? 그리 비싼 거 아니면 우리 결혼기념일 선물로 당신에게 선물해 주면 좋을 것 같은데."
그러자 비로소 아내는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아니. 이제 가자. 나 배고파."
그렇게 우리는 전시장을 나서서 미리 예약해 둔 가게로 향했다.
다음날 아침, 눈을 뜨니 오늘도 아내는 아침 먹을 준비를 하러 먼저 일어난 듯했다. 주말인데도 꾸준히 아침을 챙겨 먹는 것을 보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주말인지라 침대에 더 늘어져있고 싶었지만 이미 해가 중천에 떠있는 것이 보였기 때문에 더 누워있는 건 포기하고 부엌으로 가서 냉장고를 들여다보고 있는 아내에게 말을 걸었다.
"아침 뭐 먹으려고?"
"아직 고민 중이야. 냉장고를 한번 비우긴 해야 할 것도 같은데 아침부터 그러긴 좀 부담스러워서. 당신 물 줄까?"
아내는 냉장고에서 생수병을 꺼내 컵에 물을 따라서 나에게 건네주었다. 물을 한 모금 마시면서 아내에게 물었다.
"어제 전시회는 괜찮았어?"
"응. 좋더라."
"뭐 당신이 좋다면 다행이긴 한데, 나는 잘 모르겠더라. 이런데 문외한이라서 그런가, 풍경화들도 추상화도 다 애매하고 뭘 그리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던데. 마지막에 레몬 그린 것만 좀 괜찮아 보였고. 그래서 무명화가인 건가. 근데 용케 전시회까지는 열었네. 쨋든, 오늘은 날도 좋은데 당신 아침 먹고 나면 나가서 근처 산책이라도 좀 할까? 오래간만에 주말에 아무것도 일정이 없는데."
"그래, 산책 좋지."
아내는 짧게 대답하고는 냉장고를 열어 식빵과 레몬을 꺼냈다.
"오늘도 식빵이랑 레몬주스? 레몬 그림 얘기하니까 갑자기 먹고 싶어 졌어?"
"그런가 봐."
아내가 아침식사를 끝내기를 기다리며 소파에 누워 TV를 켰다. 뭐 좀 볼 게 없으려나 채널을 돌리는 와중에 갑자기 휴대폰이 울렸다. 장인어른의 전화였다. 번개처럼 일어나 앉아 전화를 받았다.
"예, 장인어른."
"저, 그, 김서방, 내일 뭐 하는가?"
"저 내일 뭐 별거 없습니다. 무슨 일 있으세요?"
그러자 장인어른의 목소리 뒤로 장모님의 목소리가 슬며시 들려왔다.
"아이고 화상아. 김서방도 주말에 좀 쉬게 내버려 두지 그걸 굳이 전화를 해서 귀찮게 해?"
하지만 장인어른은 장모님의 말을 들은 척도 안 하고 전화를 했다.
"어, 다름이 아니라! 김서방, 내가 어제 글쎄 고향친구를 오랜만에 만났어. 그, 중학교 때 친군데 평생 어디서 뭐 하나 모르다가, 아니 글쎄 얘가 요 앞에 살고 있더라고. 어제 저기 집 뒤에 개천 걷는데 낯익은 얼굴이 보이데. 그래서 내가 아, 저놈 혹시 중학교 때 소키우던 집 아들인 지명이 아닌가 싶어 가지고…."
그러자 장모님이 말을 툭 잘랐다.
"아이고, 또 지 할 말만 하네. 또 시작이네 또 시작이야. 아, 김서방한테 뭔 그런 쓰잘데기 없는 얘기까지 시시콜콜하게 해! 그냥 용건만 말해! 뭔 남자가 입만 열면 말이 길어 말이!"
그러자 민망한 듯 장인어른은 말을 멈추고 헛기침을 했다.
"큼. 어쨌든 오랜만에 우연히 만난 친구 놈이 알고 보니까 술을 팔더라고. 술집이 아니라 그 술 파는 가게 있잖아. 그거. 그래서 내가 김서방 생각도 나고 한 잔 팔아줄 겸 가서 술이나 한 병 사 왔어. 뭐 추천해 준다더니 일본술을 추천해 주더라고. 사켄가 뭔가. 그래서 그거 한 병 사 왔는데, 어떻게 내일 시간 되면 나랑 같이 간단하게 한잔 어때??"
"잠시만요."
잠시 통화를 멈추고 고개를 들어 아내에게 물었다.
"여보, 장인어른이 내일 한잔 하시자는데 당신도 갈래?"
"아니. 난 안가. 당신 혼자 다녀와."
"응."
고개를 끄덕이고는 휴대폰을 들어 장인어른에게 말했다.
"집사람은 몸이 좀 안 좋은가 봐요. 내일 저만 갈게요. 6시까지 가면 될까요?"
"나도 귀 있어. 아프긴 무슨. 걔는 애초에 기대도 안 했어. 김서방만 오면 되지. 내일 6시까지 와 그럼."
"네 그럼 내일 뵐게요."
처갓댁에 가니 장모님과 장인어른이 반갑게 맞아주셨다. 이미 거실에 상이 깔려있었고 술과 술잔이 세팅되어 있었다. 안주가 뭐냐고 여쭤보니 이미 모둠회를 배달 주문하셨고, 아직 배달이 오지 않았다고 하셨다. 바로 술을 먹기는 애매해서 거실 바닥에 앉아서 장인어른하고 같이 TV를 보며 소소하게 얘기를 나눴다.
그리고 20여분 뒤 배달부가 도착해서 회를 전해주고 갔다. 장모님이 받으셔서 상위에 하나 둘 펼쳐 주셨고, 나도 초고추장 봉지를 뜯고 간장종지에 간장을 따랐다. 그렇게 먹을 준비를 마치고 셋이서 상에 둘러앉았다. 먼저 장인어른 잔에 술을 따라드리고 장인어른이 내 잔에 술을 따라 주셨다. 장모님도 가끔은 술을 하시긴 하지만 오늘은 술을 드실 기분은 아니신지 술은 사양하셨다.
가끔 보면 회를 주문하면 어떤 이유에선가 레몬 한 조각을 같이 주는 곳들이 있었는데, 여기도 그런 곳인지 회 한구석에 레몬 한 조각이 놓여있었다. 레몬을 보며 아내 생각이 잠시 떠올랐는데 때마침 레몬을 본 장모님이 말씀하셨다.
"아이고, 맞다 여기 레몬을 주지."
그러자 장인어른이 손을 저으며 말씀하셨다.
"냅둬. 오늘은 안 그래도 되잖아."
두 분의 대화 흐름을 이해할 수가 없어서 장인, 장모님께 여쭤보았다.
"레몬이 왜요?? 민정이는 레몬 좋아하던데. 두 분은 싫어하시나요?"
그러자 장모님이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하셨다.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그냥 뭐 시큼한 냄새도 나고 그래서 그렇지 뭐."
갑작스레 지어낸 궁색한 변명처럼 들렸다. 하지만 구태여 더 물어볼 이유가 없어서 넘어가기로 했다. 바로 회 한 점을 들어서 먹어 본다음 그 맛에 감탄하고 이어서 장인어른과 건배를 하고 술을 들이켰다. 아침 겸 점심을 먹고 그 뒤로 계속 굶고 있었기에 속은 거의 빈속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인지 술을 들이켜니 술이 식도와 위를 지나가는 것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빨리 취하겠구나 싶어서 얼른 물을 마시고 속을 다스렸다. 장인어른은 오랜만에 나와 술을 마시셔서 신이 나셨는지 곧바로 잔에 술을 채워주셨다.
그렇게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마시다 보니 어느새 장인어른도 나도 거하게 취해버렸다. 장모님은 피곤하니 일찍 주무시겠다며 방으로 들어가셨고 거실에는 나와 장인어른 둘만이 남아서 조용히 얘기하며 술을 마셨다.
그러던 중 장인어른이 갑자기 말을 꺼내셨다.
"김서방. 우리 민정이는 요새 좀 어떤가?"
"요새요? 잘 지내죠."
"그래?"
장인어른은 내 대답을 듣더니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시는 듯했다. 흐음 소리를 내시며 약간의 한숨을 내쉬고는 바로 술잔을 들어 한번에 목으로 털어넣으셨다. 그리고는 후 소리를 내시며 나를 쳐다보았다.
"민정이가 레몬을 좋아한다고?"
"네, 아닌가요?"
갑자기 시작된 레몬 얘기가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레몬을 어떤 식으로 좋아하던가?"
"어떤 식으로 요? 어떤 식이냐고 물으시면… 종종 아침에 레몬주스를 만들어먹거나 저녁에 레몬이 들어간 요리를 하는 식으로 요? 근데 뭐 자주는 아니고 가끔 그래요 많으면 한 달에 한두 번 정도? 왜요? 뭔가 이상한가요?"
그러자 장인어른은 약간은 침울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씀을 이으셨다.
"그래? 그럼 이제 걱정이 없겠네."
"걱정이요?"
"김서방 자네 혹시 자네 만나기 전에 민정이가 좀 오래 만난 사람이 있던 거 아는가?"
"아 네 그건 알죠. 한 5년 정도 만났던 사람이 있었다는 것 정도? 근데 그건 왜 그러세요?"
장인어른은 잠시 뜸을 들이시더니 술을 한잔 더 들이켜고는 말을 이어나가셨다.
"사실은 그것 때문에 우리가 집에서 레몬이 금지였어."
장인어른의 그 말에 어떤 식으로든 민정이 과거의 그 남자와 레몬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더 이상 들으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이미 귀띔이라도 들은 셈이니 앞으로도 계속 궁금해할 바에는 아예 지금 들어버리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장인어른께 물었다.
"왜요? 그 남자가 민정이한테 레몬이라도 맨날 사다 주고 그랬나요?"
"뭐 그것도 맞긴 맞는 말인가? 레몬을 사다 주기는 했었지."
"그거 말고도 뭐가 더 있나요?"
"그게 말이야. 사실 그놈이랑 민정이랑 결혼하겠다는 거 나랑 민정이 엄마가 극구 반대해서 갈라놨거든. 돈도 없고 직업이 변변찮았거든. 화가였어 화가. 뭐 연애한다고 할 때만 해도 그냥 그러려니 했는데, 막상 그놈이 인사를 오니까 덜컥 겁이 나더라고. 그래서 얼마나 버냐, 모아놓은 돈은 얼마나 있냐, 뭐 이런 거를 물어봤지. 좀 너무하다 싶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딸 가진 부모로서 내 딸 고생시키고 싶지는 않잖아. 근데 내 생각보다 너무 뭐가 없는 거야. 모아놓은 돈도 없고, 그렇다고 유명한 것도 아니고, 딱히 미래 계획도 없고. 그림을 그리긴 그리는데 기껏해야 한 달에 한두 개 정도 팔린다 하니까. 그것도 거의 헐값에. 그러니 이게 안심이 되냔 말이야. 그래서 나랑 민정이 엄마가 절대 안 된다 그랬지. 근데 이게 상황을 보니까 민정이를 집에서 쫓아내겠다고 으름장을 놓으면 그 길로 그냥 그놈을 쫓아갈 것 같은 거야. 그래서 이거는 도저히 내가 안 되겠다 싶었거든. 그래서 따로 그놈한테 전화해서 만나자고 했지."
갑자기 시작된 민정이의 옛 남자 이야기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술을 마시기는커녕 내가 지금 숨을 쉬고는 있나 싶을 정도로 정신이 혼미해졌다. 장인어른 입장상 이런 얘기는 사위한테 하면 안 되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이미 장인어른은 그런 판단을 하시지 못할 정도로 취하신 듯 보였다. 그래서 나도 이왕 이렇게 된 거 최대한 정신을 차리고 집중해서 귀를 기울였다.
"그래서요?"
"그래서 만나서 얘기했지. 미안하지만 나는 그쪽을 잘 모른다. 인성이 좋고 인물이 좋고 이런 걸 떠나서 나는 객관적으로 보이는 숫자로 당신을 판단할 수밖에 없다. 근데 보니까 결혼을 하면 민정이가 힘들어질 것 같더라. 나는 애비 된 심정으로 민정이가 고생길에 제 발로 찾아들어가는 걸 볼 수가 없다. 마음이야 뭐 처음에 행복하겠지만, 이게 내가 살아보니까 어쨌든 결혼은 현실이더라. 아무리 마음이 잘 맞고 좋아도 사람은 삼시세끼 밥을 먹고 몸을 뉘이고 그러고 살아야 하는데 그런 게 해결이 안 되면 결국에는 서로 힘들더라. 그러니까 우리 민정이랑 헤어져주면 안 되겠냐. 내가 돈이라도 많으면 그쪽이 어떻든 간에 서로 좋다 하면 결혼시키고 지원해 주면 되겠지만 저번에 봤다시피 우리도 넉넉한 형편도 아니고 겨우 민정이 하나 키웠다. 그러니 생각 좀 잘해달라. 그렇게 얘기했지."
그리고는 장인어른은 다시 술을 한잔 들이키며 숨을 고르셨다. 나는 술 마시는 것도 잊고 장인어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랬더니 글쎄, 며칠 뒤에 민정이가 방에 틀어박혀서 대성통곡을 하는 거야. 왜 그러냐고 물어봤더니 그놈이 민정이 한테 말하길, 암만 생각해도 남의 집 귀한 딸 데려다 고생시키기만 할 것 같으니 헤어지자고 했다는 거야.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는 그게 낫겠다고. 그래서 그렇게 헤어지고 온 거라고 하더라고. 그러더니 그때부터 민정이가 밥도 안 먹고 울다 기절하고 울다 기절하고 계속 그러더라고. 한 일주일을 거의 굶다시피 하는 거 겨우겨우 입에 뭐라도 집어넣으면서 달랬더니 그제야 좀 진정이 되길래 겨우 안심을 했지. 민정이 성격상 당장에 그놈을 찾아가서 붙잡고 애걸복걸할 줄 알았더니, 알고 보니까 전화번호도 바꾸고 훌쩍 이사를 가버려서 찾을 수도 없었나 봐. 그래서 그렇게 잘 끝나나 했지."
"그럼 잘 끝난 게 아니었나요?"
"끝나기야 잘 끝났는데, 나랑 마누라가 애 기분 좀 풀어줄라고 이것저것 다 해줘 봤거든? 옷도 사러 가고 맛있는 것도 먹으러 가고. 그러다가 애가 레몬을 좋아하니까 마누라가 레몬을 두어 개 사 왔는데 글쎄, 애가 레몬을 보더니 다시 대성통곡을 하더라고. 그놈 생각이 났는지 아주 그냥 집이 떠나가라 울더라고. 그래서 나랑 마누라가 안 되겠다 싶어서 치워버렸지. 근데 또 웬걸, 이렇게 회를 시켰을 때 주는 레몬 한 조각만 봐도 울기 시작하는 거야. 그래서 그때부터 우리 집은 레몬이 금지가 됐어. 당연히 사 오는 건 안되고, 이렇게 회에 올라가 있을 수 있으니까 레몬은 다 빼달라고 하고 레몬 향이라도 남아있으면 얼른 내가 먹어 치워서 냄새도 못 맡게 했지. 그러다 보니까 어느새 다 적응이 됐는지 애도 점점 진정이 되는 것 같더라고. 어휴, 쨋든 그 고생을 하고 나니, 이제는 우리도 레몬만 보면 심장이 벌렁벌렁거려서 못 먹겠더라고. 근데 이제 민정이가 레몬을 잘 먹는다고 하니 맘이 한결 놓이네 그래. 김서방 덕분에 다 괜찮아진 것 같아서 내가 김서방에게 너무 고맙네."
장인어른의 고맙단 말에 억지로 웃어 보이며 술을 한잔 들이켰다.
어느덧 장인어른은 거실 소파에 누워서 코를 골고 계셨다. 덕분에 나는 혼자 거실에 앉아서 술을 조금씩 들이켰다.
민정이와 나는 선 자리에서 만난 사이였다. 첫눈에 내가 민정이에게 반해 대시했고, 민정이는 별 다른 거부감 없이 나를 받아들였다. 만난 지 3개월여 만에 민정이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러 갔고, 두 분은 나를 반갑게 맞아주시며 매우 기뻐하셨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두 분이 기뻐한 것은 나 자체가 마음에 들어서였다기보다는 돈도 없고 미래도 없는 화가 나부랭이를 만나다가 대기업에 잘 다니고 있고, 집도 차도 있는 꽤 괜찮은 사윗감이 생겼기 때문이 아닌가 싶었다. 두 분 입장에서는 내가 큰 사고를 친 사람이거나 인격 파탄자만 아니라면 거의 무조건 오케이였던 셈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속이 쓰려왔다.
그리고 민정이. 장인어른의 말을 다 듣고 나니 짚이는 것이 있었다. 민정이는 연애 때부터 결혼해서 지금까지도 나에게 단 한 번도 큰 소리를 내거나 화를 낸 적 없었다. 그런데 그게 정말 민정이가 화가 나지 않아서였을까?
생각해 보면 민정이는 서운하거나 섭섭할법한 상황에도 한 번도 싫은 소리를 하지 않았다. 대신에 그날 저녁 혹은 다음날 레몬이 들어간 요리를 먹거나 레몬주스를 마셨을 뿐. 그 사실을 눈치챈 예전의 나는 그저 좋아하는 레몬을 먹으며 기분을 푸는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래서 민정이는 화가 없는 것이라고.
하지만 장인어른의 얘기를 듣고 나니 머릿속에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들이 생겼다. 그게 정말 단순히 좋아하는 음식을 통해 화를 다스리는 것이었을까? 아니면 혹시 힘들 때마다 레몬을 먹으며 너무나 사랑했지만 어쩔 수 없이 떠나보낸 그 사람을 떠올림으로써 살아갈 힘을 얻은 것은 아닐까? 레몬을 먹으며 그 사람을 떠올리고 그걸 마음의 심지로 삼아 살아가고 있으니 나 같은 사람은 화를 낼 필요조차도 없는 부외자라고 생각한 것은 아닐까? 그렇기에 민정이는 늘 나에게 관대한 것일 수 있지 않았을까?
아까 장인어른에게 그 화가의 이름이나 나이 등을 물어보았을 때 장인어른은 어떤 사람인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셨다. 다만 민정이가 그 사람은 종종 그림물감에 민정이가 좋아하는 레몬 즙을 섞어서 그림을 그린다고 했던 것만이 어렴풋이 기억난다고 하셨다. 그렇기에 그 사람의 그림에서는 레몬 향이 난다고.
눈앞의 레몬을 들어 한입 베어 물었다. 시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