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띵동"
TV를 끄고 막 나가서 산책이라도 해보려는 토요일 오후였다. 우리 집은 기본적으로 나 혼자 사는 데다가 친구들도 다들 멀리 떨어져 살아서 갑작스레 우리 집 벨을 누를법한 사람은 없을 터였다. 심지어 배달음식을 시켜놓고 잊어버린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거실 인터폰에서 나는 벨 소리가 의아하게만 느껴졌다. 어디 사이비 종교에서 포교를 나왔거나 가스점검이라도 나온 게 아닐까 싶었다.
소파에 푹 파묻혀있던 몸을 일으켜서 인터폰 앞으로 터벅터벅 걸어가 버튼을 누르고 대답을 했다.
"누구세요?"
그러자 화면에 앳된 여자 아이가 보였다. 인터폰 화질이 그다지 좋지는 않았지만 딱 봐도 교복을 입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여기 혹시 박진호 님 댁 맞나요?"
놀랍게도 화면 속의 여자 아이는 너무나도 또렷하게 내 이름 석자를 댔다. 예상치도 못하게 내 이름을 듣게 되자, 순간적으로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어디 범죄조직에서 날 납치하려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어처구니없는 생각마저 들었다. 곧 정신을 차리고 물어보았다.
"네, 맞긴 한데… 누구시죠?"
"안녕하세요, 저는 이지니라고 하구여 이자연 씨 딸입니다."
'이자연' 오랜만에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지금 회사에서 내가 대리일 적에 알고 지내던 다른 부서 후배의 이름이었다. 비록 부서는 달랐지만 프로젝트를 같이 했었고, 그러면서 친해졌던 후배였다. 프로젝트가 끝난 뒤로도 종종 교류를 하며 지냈었다. 주로 같이 술을 마시거나, 서로의 솔로 탈출을 기원하며 소개팅을 주선해 주었었다. 그리고 지금 화면 속의 여자 아이는 바로 그 후배, 이자연의 이름을 꺼낸 것이었다. 덕분에 오랜만에 예전에 자연이와 했던 약속이 떠올랐다. 설마 그런 날이 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지만, 아마도 오늘이 그 약속을 이행해야 하는 날이 아닐까 싶었다.
일단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다시 화면을 쳐다보았다. 화면 속 아이는 내 대답을 기다리는지 가만히 서서 인터폰을 들여다보고만 있었다. 일단은 크게 심호흡을 한 후, 현관으로 몸을 돌렸다. 신발을 신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대충 슬리퍼 위에 발을 걸치고 문을 열었다.
"일단, 들어와요."
"네."
현관을 통과하는 아이 뒤로 큰 캐리어가 하나 보였다. 짐작컨대 본인의 짐을 다 싸 온 듯했다. 예전에 자연이와 했던 약속대로라면 아마 틀림없을 것이었다. 아이는 캐리어를 현관에 그대로 둔 채로 중문을 통과해서 거실로 들어왔다. 일단은 그대로 둘 수 없어서 부엌 옆의 식탁으로 안내를 했다.
"잠깐 여기 앉아있어요. 혹시 뭐 좀 마실래요?"
계속 집안을 두리번거리던 아이는 내 질문에 화들짝 놀라며 대답했다.
"아뇨, 괜찮아요!"
하지만 이 민망하고 어색한 분위기가 싫었던 나는 억지로 마실 것을 권했다.
"커피가 좀 그러면 콜라도 있고 물도 있어요. 물이라도 줄까요?"
한번 더 거절하기가 조금 어려웠던지 물을 권하는 말에는 사양하지 않았다. 냉장고에 넣어두었던 물과 커피를 꺼내 두 잔에 각각 따른 후 물 잔은 아이 앞에 놔두고 커피잔은 맞은편 빈자리에 놔두며 앉았다.
물어보고 싶은 것 천지였지만, 일단은 가장 궁금한 것부터 물어보기로 했다.
"여기는 어떻게 찾아왔어요?"
"엄마가 여기 주소를 알려줬었어요."
"내가 여기 그대로 살지 않았을 수도 있는데?"
"그러면 그때는 회사라도 가보려고 했어요."
아찔했다. 혹시나 내가 오늘 부재중이기라도 했다면 이 아이는 회사에 가서 내 신상을 물어볼 것이었고, 자연스레 회사에서는 나와 어떤 관계인지를 물어봤을 수도 있었다. 만약 그렇게 되면 내 회사생활은 정말 순탄치 않아 질 것이 불을 보듯 뻔했다. 입술을 굳게 앙다문 상태로 코로 한숨을 내쉬었다. 잠깐은 눈알을 굴리면서 말을 어떻게 꺼낼지 생각하다, 그냥 대놓고 물어보기로 했다.
"그래서, 자연이는 어디 가고 여길 혼자 왔어요?"
"돌아가셨어요."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대답이었다. 자연이 성격상 약속을 일부러 어기진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예상을 했음에도 당혹스러운 표정을 감출 수는 없었다.
"어쩌다?"
"폐암이셨어요."
"…"
예상치 못한 대답에 차마 더 말을 이을순 없었다. 하지만 일단은 눈앞의 아이에 집중하기로 했다.
"아, 그래서 여기로 왔군요. 자연이한테 어디까지 들었어요?"
"두 분이서 하신 약속에 대해서는 다 들었어요. 그래서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에 저보고 박진호… 님을 찾아가라고 하셨고요."
아직은 나에 대한 호칭을 어떻게 해야 할지 어려운 모양이었다. 일단은 너무 갑작스레 닥친일이라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갈 데가 따로 있는 건 아니죠?"
"네, 아시는지는 모르지만 저 때문에 엄마가 외가 쪽에서 의절당하셔서요."
내 예상과 다르게 자연이는 가족들 설득에 실패한 모양이었다. 그러니 이 아이가 혼자 여기까지 찾아온 것일 테지만.
"그럼 여기 옆에 방에서 쉬어요. 우리 집이 방이 두 개뿐이라 하나는 안방이고 여기 옆방은 내 취미방으로 쓰는 중이라 좀 애매하긴 하지만요. 일단 컴퓨터는 자유롭게 써도 되고, 또 뭐가 필요하지?"
"아뇨 그냥 있을게요. 제가 갑자기 찾아와서 너무 당혹스러우시죠?"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 움찔했다. 하지만 어른으로써 순순히 그렇다고 대답하기는 싫었다.
"약간은 그렇긴 한데, 어쨌든 자연이랑 한 약속이 있으니까 생각보다 엄청 그러진 않아요."
"근데, 저 확인은 안 해보셔도 돼요?"
"무슨 확인이요?"
"제가 누군지?"
자연이 딸 지니라고 이름을 밝혔으면서 누군지를 확인해보지 않냐고 물어보는 의중을 알 수가 없었다. 덕분에 바보 같은 질문을 내뱉었다.
"응? 그럼 뭐, 신분증이라도 보여줄래요?"
"아뇨 그게 아니라."
"?"
"제가 진짜 박진호 님 딸이 맞는지 유전자 검사라도 해보셔야 하지 않을까 해서요"
예상외의 대답에 조금 많이 놀랐다. 그러고 보면 이 상황에선 친자확인이 제일 중요한 일이긴 할 텐데 내가 그런 생각을 떠올리지 못한 것을 보니 나 스스로 많이 당황하긴 했나 보다 싶었다. 떠올리지 못한 것과는 별개로 이런 이야기를 이 아이가 먼저 꺼낸 것도 놀라웠다.
이 상황에서 내가 적극적으로 검사를 하자고 하면 자길 의심하나 싶어서 상처를 입을 수도 있을 테니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유전자 검사요? 하긴, 해야 하려나?"
나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바보 같은 대답이었다.
"갑자기 찾아와서 이런 얘기를 하면 제가 박진호 님 딸이 아니라 사기꾼이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을 것 같아서요. 일단은 제 머리카락이랑 입안을 문지른 면봉을 드리면 될까요?"
오히려 이 아이가 나보다 더 침착해 보였다. 너무나도 침착한 모습에 되려 의구심이 들었다. 그래서 순순히 이 아이가 말하는 대로 하고 싶지는 않았다.
"일단 그런 절차는 좀 생각해보고 하죠. 어떻게 할지도 좀 찾아보고, 검사 비용이나 방법도 좀 알아봐야 하니까요. 일단은 들어가서 좀 쉴래요?"
제발 들어가서 쉬었으면 싶은 마음에 아이를 재촉했다. 더 이상 이 얘기는 그만하고 혼란스러운 내 머릿속부터 정리하고 싶었다. 그런 생각에 나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더니, 내 표정을 본 아이가 다급하게 방으로 들어갔다.
"네, 그럼 쉬고 있을게요."
그렇게 아이가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는 것을 확인하고, 나는 황급히 안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고 침대에 누웠다. 그러자 비로소 막혔던 숨을 오랜만에 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갑자기 자연이의 이름을 듣고 심지어 자연이와 내 딸이라는 아이를 만났으니 가슴은 진정되지 않았다. 오랜만에 자연이와 했던 예전 그 약속을 곱씹어봤다.
"선배, 오늘은 2차로 제가 전에 말한 그 술집으로 가요!"
"아, 알았어 아직 1차도 시작 안 했는데 무슨 벌써 2차 얘기를 해."
"거기 인기 많아서 지금 미리 자리 봐달라고 말해야 한단 말예요."
"아, 니 맘대로 해라."
오랜만에 성수동에서 만난 자연이는 이미 술을 댓 병은 먹은 것처럼 신이 나 있었다. 나는 비록 프로젝트 때문에 전국을 방방곡곡 돌아다니긴 해야 했지만, 내가 속한 팀과 자연이가 속한 팀은 모두 시청에 위치한 본사에 적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프로젝트를 마치고 본사에 복귀하면 종종 술을 마시긴 했었다. 하지만 올해부터 우리 팀은 강남 사옥으로 입주하게 되어서 이제는 프로젝트를 마치고 복귀를 해도 서로 얼굴을 보기가 쉽지 않았다. 날을 잡고 퇴근을 하고 나서야 비로소 만날 수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 자연이를 만난 것은 거의 1년여 만이었다. 물론, 그 사이에 회사 메신저 등을 통해서 연락은 계속하고 있었지만, 실제로 얼굴을 본 것이 1년여 만이다 보니 자연이는 전에 없이 많이 들뜬 모양이었다.
"선배가 와인 먹고 싶다 그래서 1차 장소 잡는데 힘들었다구요."
"그래서 지금 우리가 이렇게 멀리까지 걸어가야 하는 거냐?"
그러자 자연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선배!! 선배 때문에 이렇게 찾아서 가는 건데 이러기 있어요??"
"네~네~. 아무렴."
"아니, 먹고 싶다고 해서 찾아왔는데도 난리야 정말."
말투는 퉁명스러웠지만 이미 목소리 톤에서 즐거움이 묻어져 나왔다.
한, 20여분을 걸어 걸어 겨우 목표로 했던 가게에 도착했다. 오늘 아주 술로 죽어보자는 심정으로 둘 다 오후 4시를 좀 넘어서 퇴근했기 때문에 우리가 가게에 도착했을 때는 가게가 막 연 상태였다. 덕분에 우리 외에는 손님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일단 술은 2차가 메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와인안주 겸 허기를 달래줄 파스타와 스테이크를 주문했다. 그리고 가볍게 먹을 화이트 와인도 한 병 주문했다.
"선배 원래 화이트 안 먹는다 하지 않았어요?"
"라고 하기에는 너무 뻔뻔한 거 아니냐 너? 내가 와인 마시고 싶다니까 구태여 니 프랑스 친구가 만드는 와인을 파는 곳을 찾아가지고 날 끌고 왔으면서? 이래놓고 내가 니 친구가 만든 와인 안 마시면 어쩔라고 그랬어?"
"어쩌긴 뭘 어째요, 친구한테 울면서 연락 해야죠. 회사 선배를 델구 네가 만든 와인을 먹으러 갔는데 선배는 우리 정성을 깡그리 무시하고 평소처럼 레드만 주구장창 들이켰다고."
평소처럼 미간을 찌푸리고 물어보았다.
"넌 대체 언제쯤 헛소리를 그만둘 거냐? 죽으면? 아니 너는 죽어도 유언으로 헛소리를 할 것 같다."
자연이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선배!! 선배는 저를 대체 뭐라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뭐라고 생각하냐고? 헛소리만 주구장창하는 시끄러운 후배?"
별 영양가도 없는 선문답을 주거니 받거니 하다 보니 어느새 음식과 와인이 나왔다. 자연이뿐만 아니라 나도 살짝 들떴기 때문에 하마터면 와인 맛을 감상도 하지 않고 그대로 원샷 할 뻔했다. 겨우 이성을 부여잡고 조금씩 와인을 마시면서 맛을 음미했다.
"음…."
"어때요 선배. 맛있죠?"
자연이가 기대에 차서 물어보았다. 하지만 나는 평소와 똑같이 솔직하게 대답했다.
"음, 역시 난 화이트는 별로야. 그 특유의 포도줄기맛이 여전한걸. 나는 역시 레드가 나은 것 같아."
"아, 쫌!! 내 친구가 만든 거라니까요??"
"음~ 그래 니 친구가 만들었지 참!"
잠시 한 호흡을 쉬고 말을 이었다.
"그래도 아닌 건 아닌 거야."
"쫌! 내 친구가 만든 건데 좋은 평가를 해주면 안 돼요??"
"나 그런 사람 아닌 거 알잖아?"
"아, 아는데!! 아는데!!!!"
그렇게 고작 30여 분 만에 와인 한 병과 음식을 싹 비웠다.
바로 음식점을 나와 2차 장소로 향했다. 고작 와인 한 병을 둘이 나눠마셨을 뿐이었지만, 너무 빨리 들이킨 나머지 둘 다 알딸딸한 상태였다. 자연이가 고른 2차 장소는 매우 특이하게도 바 좌석밖에 없었다. 심지어 메뉴판에는 안주가 고작 네 종류만 쓰여있었다. 술은 바텐더에게 원하는 주종을 말하면 알아서 꺼내다 주는 방식이었다. 좀 독한 증류주로 추천해 달라고 해서 술을 받고 안주로 육회를 하나 시켰다. 1차와 마찬가지로 선문답을 하고 깔깔거리며 술잔을 비우다 보니, 어느새 둘 다 거하게 취한 상태가 되었다.
자연이는 눈이 반쯤 풀린 상태로 말을 꺼냈다.
"근데, 선배. 저는 나중에 결혼을 못하더라도 꼭 아이는 키우고 싶어요."
"애는 어디 하늘에서 떨어지냐? 입양이라도 하게? 결혼도 안 했는데 입양 심사 통과 하는 거 쉽지 않을걸?"
자연이는 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뇨, 정자를 기증받아서 저 혼자 낳을 거예요. 저 혼자서 잘 키우면 되죠!"
"허얼씨구. 그래 잘해봐라. 근데 미혼이 그게 가능하냐, 한국에서? 전에 보니까 연예인 걔도 일본 가서 기증받아가지고 시술하고 와서 가능했던 거 아냐?"
"그럼 저도 일본을 가면 되죠!!"
"그래, 그래라. 잘해봐."
그러자 자연이는 내 눈앞에 얼굴을 들이대며 말했다.
"근데,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의 정자를 기증받아서 애를 가지는 건 좀 불안해요. 애가 잘 클지도 걱정되구요."
"그럼 때려치던가."
"그래서 말인데, 혹시 제가 마흔까지 결혼을 못하면 선배의 정자를 기증해 주시면 안 될까요? 선배 애라면 선배를 닮아서 혼자 알아서도 잘 클 것 같고, 선배는 제가 아는 사람이니까 안심도 되구요."
자연이를 알고 지낸 세월을 모두 통틀어 제일 어이없는 얘기였다. 얘가 지금 진심인지, 취해서 그런 건지 구분이 가질 않았다. 보통은 이런 말을 들으면 나에게 관심이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할 법 하지만,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사람은 바로 그 이자연이었기에 그럴 일은 만무했다. 평소 같았으면 헛소리하지 말고 술이나 먹으라며 버럭 했을 나였지만, 나도 꽤나 취해있었기 때문에 이 어이없는 대화에 장단을 조금 맞춰주기로 했다.
"야, 그러면 내가 나이가 몇 살이냐. 마흔둘이야. 그러면 내 정자는… 별로 건강하지 않을걸?"
"그래요? 그럼 지금 냉동보관할까요??"
이제 자연이는 머릿속에서 생각이라는 걸 하는 것을 그만둔 듯 보였다.
"야 냉동보관하려면 돈도 들고, 아까 말했다시피 내가 기증한걸 니가 받으면 개인 대 개인의 거래라 불법적인 데다가 시술도 일본 가서 받아야 한다니까?"
"그럼 일본가죠!!!"
"제정신이야?"
"네, 저는 제정신입니다!! 돈은 제가 낼게요!! 일본 갑시다!!"
자연이의 눈은 이미 반쯤 덮이기 시작했다.
"너, 너무 취한 것 같은데?"
"아뇨, 저는 지극히 정상이에요!! 아, 근데 선배가 그때 결혼해 있으면 어떡하지? 선배!! 결혼한 상태여도 정자는 주셔야 해요!!"
"너 도라이냐?"
"아, 줄 거예요 말 거예요? 빨랑 대답해요!!"
이미 자연이는 취해서 맛이 가기 직전인 것처럼 보였다. 어차피 자연이는 다음날 기억도 못할 것 같았기에 나도 그냥 되는대로 내뱉었다.
"그래그래, 와이프한테 비밀로 하고 기증해 줄게. 아니, 애초에 지금 냉동보관을 하면 되는 거 아냐?"
"혹시나 해서 그렇죠!!"
그러더니 자연이는 바에 머리를 쿵하고 들이박았다. 많이 취해서 잠이 든 것처럼 보였다. 그런 자연이를 어떻게 깨워서 집에 보내야 할까 고민을 잠시 하고 있었더니, 잠시 후 자연이가 고개를 들었다.
"선배, 3차 가요!! 3차!!"
"너 완전 만췬데 집에 가야 하지 않겠냐?"
"3차 갈 수 있어요!!!"
"아니, 내가 싫은데."
"아, 왜!! 쫌!! 맨날이래!! 가자 3차!!!"
나는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하, 그럼 가서 조금만 마시고 집에 가라"
"알았어요!"
눈이 반쯤 풀려있던 자연이는 3차를 가겠다는 말에 갑자기 술이 깬 것처럼 멀쩡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운터에 가서 계산을 하고 술집을 나서는데 자연이가 방금 생각났다는 듯이 말을 했다.
"아, 그리고 키우는 건 내가 다 할 거긴 한데 유전적으로는 선배 자식이잖아요?"
"그 얘기 아직도 안 끝났냐?"
코를 한껏 찡그리며 말했다. 그러자 자연이가 눈을 똑바로 뜨고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혹시나, 만에 하나, 내가 무슨 일이 생겨서 일찍 죽거나 하면 선배가 대신 키워줘요."
"어?"
"어? 가 아니라 선배가 키워줘야 한다고요. 아, 그래 선배가 자기 딸인걸 알 수 있게 애 이름에 선배 이름 한 글자 넣을게요. 진호 선배니까, 호연이나 효진이 같은. 그러니까 키워줄거죠?"
더 이상 이 대화를 이어나가고 싶진 않았기에 자포자기한 상태로 대답했다.
"그래 너 죽으면 내가 키울게."
어쨌든 이제 와서 자연이와 한 약속을 어길 순 없었다. 아니 어기고 싶진 않았다. 저 아이가 내 딸이 아닐 수도 있었지만 약속을 어겼다가 만에 하나 내 딸이라고 판명됐을 때의 죄책감을 짊어지고 살고 싶지 않았다. 물론 아예 친자확인을 하지 않고 키울 수도 있겠지만 내가 아는 나는 저 아이가 내 딸이 맞는지 궁금해하다가 결국에는 친자확인을 할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최소한 친자확인이 끝날 때까지만이라도 불쌍한 아이를, 아니 자연이의 딸을 돕는 셈 치기로 했다. 당장은 저 아이에 대해 물어볼 것들은 빠르게 물어보고 같이 살 준비를 하기로 했다. 노크를 하고 작은방에 들어가니 아이는 구석에 쭈그려 앉아있었다. 아이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학교는 어디 다니니?"
"ㅇㅇ중학교요."
휴대폰으로 검색을 해봐도 어딘지 알 수 없었다. 지도 어플을 켜서 검색을 해보니 우리 집에서 차로 50분 거리에 있는 학교였다. 어쨌든 학교를 가기는 해야 할 테니 교통편을 검색해 보았다. 대중교통으로는 버스와 지하철을 3번이나 환승해서 1시간 30분이나 걸리는 위치였다. 머리가 아파왔다.
"너무… 먼데? 여기 갈 수 있겠어?"
"그래도 가야죠."
"이런 질문 꼰대 같아서 미안한데, 너 혹시 공부는 잘하니?"
"반에서 1,2등 정도요. 전교에서는 잘할 때는 1등 못할 때는 5등 정도요."
"……그럼, 학교는 가야겠네"
머리가 더 아파왔다. 그냥 학교가 멀다는 핑계로 당분간 가지 말라고 하고 천천히 거취를 정하고 싶었었는데 생각 외로 공부를 잘하니 학교를 가지 말라고 할 수는 없었다. 생각해 보면 어차피 보호자와 연락이 되지 않는 상태에서 아이가 학교를 가지 않으면 학교에서 경찰에 신고를 할 수도 있으니 멀더라도 보내는 편이 여러모로 나았다.
"너무 멀긴 하네. 가기 힘든 날은 억지로 안 가도 돼. 거기는 당분간만 다니고 근처 학교로 전학을 알아보자."
"…네."
사실 아이는 지금 다니는 학교를 계속 다니고 싶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마 친구들도 다 그 학교에 같이 다니고 있을 테니까. 하지만 지금의 나에게는 그런 사정을 배려해 줄 여유는 없었다. 당장에 닥친 이 난감한 상황을 어떻게든 타파해 내야 했으니까.
학교는 그렇다 치고 그다음은 생활이 문제였다. 우리 집은 철저하게 나에게 맞춰 디자인된 집이었다. 생필품은 당연히 내 취향에 맞춰 구비되어 있었고 각종 만화책과 레고 같은 놀거리가 즐비했다. 누가 봐도 남자 혼자 사는 집의 모습이었다. 한창때의 사춘기 여자애가 살만한 곳은 절대로 아니었다. 어쨌든 작은 방에 사람이 누워 지낼 만큼의 공간 여유는 있으니 일단은 작은방에 지내게 하면 될듯했다. 문제는 집에 여분의 요와 이불이 없다는 것뿐이었다. 요와 이불쯤이야 당장 백화점에 가서 사 오면 그만인 문제였지만, 친자확인결과 내 딸이 아니라고 판명될 경우에 이 아이는 이 집을 나가게 될 테니 굳이 지금 돈을 쓰는 것이 아까웠다.
"저는 그냥 잠만 잘 수 있으면 돼요."
"어?"
"저 당분간은 엄마가 남겨준 돈으로 생활하면 되고, 아르바이트도 하면 돼요. 집세랑 식비는 꼬박꼬박 드릴게요. 빨래도 제가 알아서 하고, 생활하실 때 불편하지 않으시도록 방에서 거의 안 나올게요. 아, 여기 방 쓰셔야 하면 아무 때나 쓰세요 저는 나가있으면 돼요."
내 표정을 읽은 것인지, 속사포처럼 민폐가 되지 않게 하겠다는 어필을 해왔다. 죄책감이 몰려왔다. 어차피 내 딸이 아니더라도 자연이 딸인 건 확실할 테니 이왕 이렇게 된 거 잘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냐, 일단 나도 컴퓨터는 써야 하니까 컴퓨터는 내일 거실로 빼놓자. 레고나 만화책은 당장 정리하기 어려울 테니 당분간 여기 놔둘게. 일단은 우리 집에 이불이 여유분이 없으니까 그거라도 사 와야겠다. 혹시 뭐 필요한 거 있니? 지금 나가는 김에 한 번에 사 오면 될 것 같은데."
"아뇨, 저는 이불 없어도 돼요."
"그게, 말이 되는 소리야? 어차피 손님들 오면 쓸 여분이 필요하긴 했어."
곤란한 표정의 아이를 놔두고 황급히 집 밖으로 나왔다. 내려갈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다가 문득 생각이나 황급히 다시 몸을 돌려 집으로 들어갔다.
"너 내 전화번호 아니?"
"아니요."
"저장해 놔. 010-XXXX-XXXX. 일단 나한테 지금 한번 걸어놓고. 어 그래 네 번호 뜬다. 내가 지금 나갔다가 언제 올지 모르니까 전화할 일 있으면 하고 뭐 어디 편의점이라도 갔다 오려면 현관 비밀번호도 알아야 할 텐데, 일단 현관 비밀번호 필요해지면 전화해. 지금 알려주기보다는 바꿔서 알려주는 게 나을 것 같다. 일단 갔다 올게 쉬고 있어."
백화점에 들러 부랴부랴 이불과 요를 사고, 이왕 나간 김에 마트에 들러 이것저것 장을 봤다. 당분간은 배달 음식위주로 시키게 되겠지만 아무래도 입이 두 개다 보니 요리를 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아이가 꼬박꼬박 식비를 준다고는 했지만 굳이 그걸 받고 싶지도 않았고 그냥 먹는 것 정도는 맘껏 먹게 해 주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장까지 다 보고 집에 들어가니 아이는 집밖으로 나가지도 않은 채 방구석에 쭈그려 앉은 그대로 핸드폰만 만지작 거리고 있었다.
"일단 장을 봐오긴 했는데, 오늘은 정신도 없고 정리도 좀 해야 하니까 저녁은 시켜 먹자. 짐이라도 좀 풀고 있어. 뭐 먹고 싶은 거 있니?"
"어…. 제가 배달 시킬게요."
"아냐 아냐, 뭐 이런 거 갖고 그래. 그냥 오늘은 내가 시킬게. 식비고 방세고 그런 거는 나중에 천천히 얘기하자. 뭐 먹을래?"
"저는 아무거나 괜찮아요."
역시나 제일 곤란한 '아무거나'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한껏 머리를 굴려보니 언뜻 인터넷에서 중고등학교 여학생들은 마라나 떡볶이 같은 매운 음식을 좋아한다는 걸 봤던 것이 기억났다. 매운 음식이라면 질색인 나였지만 이것저것 따지자니 또 머리가 아파올 것 같아서 그냥 시키기로 했다.
"떡볶이 괜찮니?"
"네, 떡볶이 좋아해요."
다행히도 이번에는 인터넷이 틀리진 않았던 모양이었다. 배달어플로 떡볶이를 주문하고선 사 온 물건들을 정리했다. 이불과 요는 한 번은 빠는 게 좋을 것 같았지만, 당장 오늘은 재워야 하니 요 위에 얇은 천을 깔아서 방에 펴주었다.
"일단 오늘은 이렇게 자고 내일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한번 빨자. 이불은 지금 빨 거니까 오늘만 이불대신에 큰 옷 있으면 그거 덮고 자고."
"네."
잠시 후 배달 온 떡볶이를 건네받아 식탁 위에 차려놓았다. 떡볶이를 먹는 동안 이 아이에게 물어볼걸 미리 다 물어봐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마치 그 모습은 신입사원을 앞에 놓고 이것저것 물어보는 부장님의 모습과 비슷할 것 같았고, 아마 그러면 신입사원은 분명 체할 것이기에, 나도 아이가 체하지 않도록 물어보고 싶은 건 나중에 천천히 물어보기로 하고 조용히 떡볶이만 먹었다.
"잘 먹었습니다. 먹은 건 제가 치울게요."
"아냐, 어차피 어디 버릴지 어떻게 치울지 모르잖아? 일단은 방에 가서 짐 정리부터 하고 쉬어. 치우는 건 다음에 부탁할게."
"아…."
"얼른 들어가. 네가 하면 내가 불편해서 그래. 얼른."
아이를 방으로 들여보내고 황급히 식탁을 치웠다. 시간은 고작 밤 9시를 막 넘겼을 뿐인데, 너무나도 정신없는 하루를 보낸 탓인지 피로가 급격히 몰려왔다. 얼른 씻고 자고 싶었다. 그러고 보니 이제는 동거인이 생겼으니 전처럼 그냥 나 편한 대로 움직일 수는 없었기에 작은방 문은 두드렸다.
'똑똑'
"네."
"어, 음, 나는 이제 씻고 들어가서 자려고. 내일 아침 한 8시까지는 화장실이 너무 급할 때 빼고는 방에서 안 나올 거니까 할거 있으면 편하게 해. 뭐 먹고 싶으면 냉장고에서 꺼내먹고."
"감사합니다."
"어어, 그래."
평소 같으면 집에서는 속옷만 입고 씻으러 들어갔을 테지만, 혹시나 싶어 갈아입을 옷까지 들고 욕실로 들어갔다. 샤워를 마친 후 아이가 화장실에 들어왔다가 나를 지저분한 아저씨라고 오해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한참을 정리하고 나와 안방으로 들어갔다. 무드등 하나만 켜놓고 침대 위로 올라가 이불속으로 쑥 들어갔다. 그러자 달콤한 피곤기가 스르르 몰려왔다. 생각할 것은 너무 많았지만 더 머리를 굴렸다간 정말 머리가 터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죽은 듯이 자야 한다며 스스로를 타이르며 눈을 감으니 금세 잠에 빠져들 수 있었다. 그렇게 그 아이와 나의 어색하기 그지없는 동거생활이 시작되었다.
처음으로 시작된 동거생활은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서로 조심하긴 했지만 생활 패턴이 맞지 않는 것 때문에 많이 힘들었다. 1시간 30분이나 걸려 학교에 가야 하니 일찍 일어나는 건 알고 있었지만 아이는 내 생각보다 더 일찍 일어났다. 화장실이 안방 바로 옆에 붙어있었기 때문에 나는 원치 않음에도 매일 아침 6시마다 화장실에서 아이가 씻는 소리에 잠이 깨야 했다. 한 달쯤 지났을 때, 이러다가 죽겠다 싶어서 거실에서 자기 시작했다. 아이가 괜히 미안해하지 않도록 안방에어컨이 시원찮아서 시원한 거실에 나와서 잔다고 핑계를 댔다.
식사도 생각보다 녹록지 않았다. 혼자 있을 때는 배가 고플 때 만드는 것도 설거지도 간단하게 하기 위해 재료들을 대강 넣고 비벼먹거나 메인요리 하나정도만 요리해서 먹었었다. 하지만 이제는 서로 식사 때를 맞춰야 했고 요리를 할 때에도 꽤 많은 시간을 들여서 요리를 해야만 했다. 우리 집은 원래 반찬이라고는 김치도 갖춰놓지 않았었는데, 한창 성장기의 아이가 들어와 살게 되었으니 평소처럼 대충 먹을 수도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반찬가게에서 열 가지 정도 반찬을 사 왔다. 그동안 반찬이 없이 살았으니 반찬을 담을 통도 없어서 새로 사 와야만 했다. 그렇게 냉장고에 차곡차곡 반찬을 넣어놓곤 필요하면 알아서 꺼내먹으라고 말했다. 그날그날의 메인 요리는 서로 번갈아 가면서 만들었다. 아이는 다행히도 자연이의 요리실력을 물려받은 건 아니었는지 제법 요리를 잘했다. 어쩌면 요리를 극악으로 못하는 자연이와 살다 보니 자연스레 살기 위해 요리실력이 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본의 아니게 술자리도 줄일 수밖에 없었다. 술자리가 많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술을 마시게 되면 밤 11시, 12시 넘어서까지 마시는 건 예사였었다. 그렇게 술을 먹고 집에 들어와 우당탕거리며 씻고 침대에 눕는 게 일상이었는데, 이제는 집에 일찍 자야 하는 학생이 있으니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최소한 집 앞 편의점에서 물을 한 통 사서 한껏 들이켜고 술을 좀 깬 다음에 살금살금 들어가야 했다. 나중에는 어차피 술을 마셔도 다시 멀쩡하게 혹은 멀쩡한 척하고 집에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에 술자리를 차츰차츰 줄여버렸다. 회식을 하더라도 몸이 안 좋다는 핑계로 일찍 나오고 친구들과의 약속은 반으로 줄여버렸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많이 남아서 집에 일찍 들어가야 하는 날이 많아졌는데, 아직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 지내는 게 어색하기에 되도록 집 밖에 있으려 노력했다. PT수업이 없는 날에도 운동을 가고 새로 나온 영화를 보는 등 스스로에게 조금 더 투자를 하는 셈 치고 집 밖에서 시간을 많이 보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집에서 쉬어야 할 때면 침대에 누워서 이어폰을 꽂고 드라마를 보며 시간을 보냈다.
그 아이에게 나는 평생을 본 적도 없는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아빠이긴 하니까 형식적으로라도 아빠 노릇을 해야 한다는 의무감도 생겼다. 그래서 관심도 없지만 시험은 언제인지, 진로는 어떻게 잡았는지, 필요한 건 없는지 간간히 물어는 보았다. 그럴수록 사춘기 딸과 아빠가 으레 그렇듯 어색한 침묵이 우리를 감쌌다. 그래도 아빠노릇은 계속해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2주일에 한번 정도는 용돈을 쥐어 학교에 보냈다. 요새 애들이 돈을 어떻게 쓰는지는 모르겠지만 필요한 게 있으면 사고 친구들하고 간식이라도 사 먹으라는 의도였다. 처음에는 자신도 돈이 있다며 한사코 거부했지만, 그 돈은 자연이가 남겨준 돈이라 아마도 그런 식으로 쓰기 쉽지 않을 것임을 알기에 어른이 주면 고맙습니다 하고 받으라는 늙은이 같은 말로 돈을 쥐어주었다. 그 뒤로도 용돈을 줄 때면 아직 저번에 받은 용돈이 남았다며 자꾸 거절했지만 나도 한사코 돈을 쥐어주었다. 그렇게 이상한 동거생활이 어느덧 두 달이 지나 석 달째에 접어들 무렵이었다.
하루는 출근해서 일하다가 외근을 나가게 되었다. 고객사에 방문해서 설명회를 진행하고 나니 시간은 어느덧 금요일 오후 4시였다. 다시 회사로 들어가지 않고 그냥 퇴근하기로 결정했다. 때마침 설명회가 그 아이가 다니는 학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진행된 것이어서, 퇴근길에 들러 차에 태워갈지 말지 망설였다. 4시면 학교수업이 막 끝났을 시간이라 나쁘지 않은 상태이기는 했다. 모른척하고 바로 집으로 갈 수도 있었지만 고작 차로 3~4분 떨어진 곳을 들렀다 가면 되는 것이기에 양심상 데리고 가기로 했다. 집으로 가는 내내 차 안에서 어색할 것이 뻔했지만 그래도 그게 낫겠다 싶었다. 바로 차를 돌려 학교로 향했다. 조금 타이밍이 늦었는지 이미 교문 앞은 하교하는 애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이 인파 속에서 그 아이를 한눈에 알아볼 자신은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어, 다름이 아니라 내가 때마침 너희 학교 근처에서 퇴근해서 집에 가는 길이라 가는 길에 태워가려고 들렀는데, 이미 끝나서 다들 나오더라고. 너 어딨는지 찾을 수가 없어서 전화했어."
"굳이 안 그러셔도 됐는데…. 교문 나와서 왼쪽으로 좀 오시면 분식 파는 포장마차 하나 있는데 그 앞에 있어요."
바로 그쪽으로 데리러 가겠다고 하려다, 친구들은 얘 사정을 모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그렇다면 친구들이 나를 보고 그 아이에게 네 아빠냐고 물어볼 것이 뻔했고 그러면 자세한 내막을 설명해야 할 테니 바로 앞까지 데리러 가는 건 좋지 않을 듯싶었다.
"어 여기서 보이네. 내차 보이니? 검은색 그랜저인데 번호가 XXXX야."
"네 보여요."
"어 나는 여기 있을 테니까 천천히 먹고 와."
"네 금방 갈게요."
딱히 차 안에서 할 것도 없었기에 요새 애들도 길거리에서 떡볶이나 오뎅을 사 먹는구나 하며 애들을 바라보았다. 조금 멀어서 잘은 보이지 않았지만 어렴풋이 각자 뭘 먹고 있는지 보였다. 아이는 두 명의 친구와 같이 있었는데 한 명은 컵볶이를 먹고 있었고 다른 한 명은 오뎅국물을 호호 불어가며 마시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이는 아무것도 먹고 있지 않았다. 친구 두 명이 이제 막 먹기 시작한 걸로 봐선 이미 다 먹고 치운 것은 아닌 듯했다. 내 전화 때문에 주문이 늦었나 싶었지만 친구들이 다 먹을 때까지 가만히 있는 것으로 보아 아무것도 주문하지 않은 듯했다. 결국 간식을 다 먹은 친구들을 보내고 나서야 내 차에 와서 탔다.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뭐 먹었어??"
"그냥 안 먹었어요."
"왜? 친구들 먹는데 같이 먹지. 용돈 다 떨어졌어?? 얘길 하지."
"아뇨, 용돈은 많이 남아있어요."
"그럼 일부러 안 먹은 거야? 배가 불러서? 아니면 저런 거 별로 안 좋아하니?"
용돈이 있는데도 먹질 않았다고 하니 왜 그런지 조금은 궁금해졌다.
"아뇨 용돈은 필요할 때 쓰라고 하셨잖아요."
"응? 그래서라고? 그냥 용돈인데 간식 좀 사 먹어도 되지. 안 그래?"
"간식은 필요한 게 아니잖아요."
간식은 필요한 게 아니라는 말에 복잡한 감정이 밀려들며 문득 25년 전, 어머니와 외삼촌의 통화가 떠올랐다.
"어, 오빠. 어 잘 지냈어? 새언니는 요새 뭐 해?"
오랜만에 외삼촌 하고 전화하는 엄마 목소리가 어찌나 들떴는지 방에 누워있는 나에게도 또렷하게 들릴 정도였다. 물론 엄마 입장에서야 들뜰만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지만.
"어, 어, 아니 아니. 어 우리 진호? 안 그래도 그거 때문에 전화했지. 우리 진호 이번에 취직했어. 응, 응. 그래. 나도 엄청 맘 졸였는데 어떻게 지가 알아서 잘했더라고. 회사? ㅇㅇ상사래."
회사 이름을 말하는 어머니 목소리에 기쁨이 가득한 게 느껴졌다. 내가 취직한 걸 자랑하고 싶어서 외삼촌에게 전화를 한 것일 테니 한동안 팔불출 같은 자식 자랑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평소라면 방문을 열고 엄마에게 조용히 좀 통화해 달라고 말했겠지만 이런 날에는 굳이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혼자 날 키운 엄마에게도 나에게도 기쁜 날이니까. 그렇게 한참을 통화하던 엄마가 말했다.
"아냐, 우리 진호가 애가 좀 순진하잖아. 그래서 내가 걱정을 하긴 했었지. 오빠네 애들은 똑 부러지잖아. 아니 우리 진호도 어릴 때 보면 내가 비상금이라고 가방에 돈 넣어주면, 바보같이 그걸 꼭 안 쓰고 있는다? 친구들이 과자 사 먹을 때도 비상금은 비상일 때 써야 한다고 그걸 미련하게 안 쓰고 있었어. 그래서 결국에는 내가 용돈이라고 따로 돈 줬잖아. 근데 또 용돈이라고 필요할 때만 써야 한다고 또 안 쓰고 있을까 봐, 과자 먹고 싶으면 사 먹으라고도 일부러 말했었지. 그래. 애가 참 그런 쪽으론 둔해. 누굴 닮았는지 몰라."
지니는 역시 내 딸임이 틀림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