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우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공짜라지만 비행기를 10시간이나 타는 것은 무리가 있었다. 좁은 이코노미석에 계속 앉아있는 것은 현우에게는 흡사 고문과 같았다. 경유지인 대만 타이베이에 다다라서야 현우는 다리를 뻗고 움직일 수 있었다.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가 출발하기까지는 3시간이나 남아있었다. 딱히 면세점 쇼핑에도 관심이 없는 현우는 그냥 무작정 게이트 앞 대기석에 앉아서 탑승시간을 기다렸다.
현우는 처음부터 이 출장을 오고 싶어 하지 않았다. 아무리 공짜고 하루에 3~4시간 정도의 개인 시간이 난다고는 하지만 유럽 관광에는 관심도 없는 데다가 한국에는 토요일 오후에나 도착하기 때문에 주말을 통으로 날려 손해를 보는 느낌이었기 때문에. 하지만 부서에서 달리 갈만한 사람이 없다는 이유로 현우를 보내버렸다. 그렇게 현우는 울며 겨자 먹기로 독일에서 4박 5일간의 출장일정을 소화하고 한국으로 귀국하는 중이었다.
현우가 탈 비행기는 출발까지 무려 3시간이나 남아있었다. 잠은 이미 기내에서 잘만큼 잤기때문에 의자에서 잠을 청하며 기다릴 수도 없었다. 그래서 현우는 대기석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휴대폰 충전기를 꽂을 곳을 찾았다. 아쉽게도 인천 공항과는 달리 타오위안 공항에는 콘센트가 넉넉하진 않았고, 그래서인지 모든 콘센트에 다른 사람들의 충전기가 꽂혀있었다.
현우는 꺼내는 충전기를 다시 조그마한 크로스백에 넣고 이어폰을 꺼냈다. 휴대폰 배터리를 아낄 겸 노래나 들으면서 시간을 보낼 생각이었다. 현우는 휴대폰의 스트리밍 어플을 켜 재생목록을 눌렀다. 하지만 생각보다 느린 공항 와이파이로 인해 노래는 뚝뚝 끊겼다. 현우는 인내심을 가지고 10여분을 억지로 노래를 들었으나 이내 포기하고 귀에서 신경질적으로 이어폰을 빼내었다.
현우는 크게 한숨을 쉬며 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크게 욕을 소리치고 싶었지만, 그저 꾹 참을 뿐이었다. 모든 걸 단념하고 잠이라도 더 청해보려 눈을 감는 현우 옆에 누군가 앉았다. 옆사람의 인기척에 현우는 감은 눈을 뜨고 슬며시 그 사람을 쳐다봤다. 그 순간 그녀도 현우를 쳐다보았고 눈을 마주친 현우는 민망함에 고개를 돌렸다.
"안녕하세요?"
현우는 당황하여 다시 고개를 돌려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어디 공식석상에라도 다녀온 듯 매우 단정한 블라우스와 무릎까지 오는 스커트를 입고 있었고 굽이 낮은 구두를 신고 있었다. 머리는 목에 겨우 닿을듯한 짧은 단발이었고 액세서리라고는 수수한 귀걸이뿐이었다. 현우보다 6~8살 정도 많아 보이는 얼굴이었다.
"아, 네…. 안녕하세요?"
당황한 현우에게 그녀는 싱긋 웃으면서 말했다.
"혹시 아까 베를린에서 비행기를 타시지 않았어요?"
현우의 머릿속으로 온갖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순간 자기에게 호감이 있어서 말을 거는 것인가 하는 생각도 스쳐 지나갔지만 나이와 행색으로 볼 때 그럴리는 없을 것 같았다. 혹시나 무언가 속셈이 있나 싶어서 경계심만 잔뜩 증가했다.
"네…. 그렇긴 한데 어떻게 아세요?"
그녀는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저도 같은 비행기라 수화물 검사 할 때 봤어요. 검사 도중에 걸리셔서 짐 푸시는 걸 봐서 기억에 남았네요."
현우는 그제야 경계심이 조금 누그러들었다.
"아, 그걸 보셨군요. 기내 수화물에 액체류는 100ml까지만 반입된다는 걸 깜빡하고선 독일에서 산 샴푸를 넣어놨었어요. 그래서 부랴부랴 빼내고 탔습니다."
"왠지 그러신 거 같았어요."
그리고는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현우는 그녀에 대한 경계를 조금 풀기는 했지만 여전히 왜 그녀가 자기에게 말을 걸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저… 혹시 제가 뭐 도와드릴 게 있을까요?"
그러자 그녀는 다시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아, 저는 저쪽 35번 게이트에서 인천 가는 걸 탈 예정인데 시간이 조금 남아서요. 심심한데 핸드폰은 배터리가 나가서 쓸 수도 없고 그래서 비어있는 충전기가 없나 돌아다니고 있었어요. 근데 뭐 보니까 남아있는 데는 하나도 없는 것 같아서 혹시 말동무를 해주실 수 있을까 해서요."
종교를 권유한다거나 무언가에 투자하라는 얘기가 아닌 것을 알고선 그제야 현우는 안도하며 그녀에게 편안히 말을 걸었다.
"말동무 좋죠. 안 그래도 저도 3시간이나 남아서 심심했는걸요."
하지만 현우는 막상 서로 대화를 하려니 일단은 공통의 주제를 찾는 데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에 머뭇거렸다. 그러자 그녀가 먼저 말을 꺼냈다.
"혹시 하시는 일이 어떻게 되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아, 네. 저는 선릉에 있는 의료기기 회사에서 일하고 있어요. 혹시 하시는 일이 어떻게 되시나요??"
"저는 대학에서 화학을 가르치고 있어요."
"아, 교수님이시네요. 혹시 성함이 어떻게 되실까요??"
"박정연이라고 합니다. 혹시 성함이…?"
"저는 정현우라고 합니다."
다시 잠깐의 침묵이 이어졌다. 어색한 침묵을 견딜 수 없었던 현우가 다시 말을 꺼냈다.
"혹시, 사시는 곳이 어디신지…?"
"사는 건 남양주 쪽이에요."
"그럼…"
현우가 이어서 대화를 이어가려던 찰나, 그녀는 현우의 말을 가로막았다.
"잠깐만요. 제가 탈 비행기는 1시간밖에 안 남았거든요. 그래서 시간이 그렇게 많지가 않으니까, 이런 시시콜콜한 얘기는 그만두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죠."
"본론이요…?"
현우는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말동무나 해달라는 얘기에 기껏 경계심을 풀었더니 역시나 그녀는 무언가 말할 게 있는 모양이었다. 뭔가 잘못 걸렸다는 생각에 현우는 멍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만약에…"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말을 이었다.
"제가 지금 타려는 비행기에 폭탄이 설치되어 있다면 믿으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