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눈이 떠졌다. 중요한 날이라고 생각되는 날에는 역시나 항상 이모양이다. 너무 긴장해서 밤에는 좀처럼 잠자리에 들지 못하고 아침에는 긴장해서 일찍 깨고. 겨우 몸을 일으켜서 화장실에 들어가 거울을 보니, 아니나 다를까 눈밑이 검고 퀭했다. 혀를 차며 샤워기의 물을 틀고 부랴부랴 샤워를 했다. 머리를 말리고 나와서 어제저녁에 다려놓은 옷을 꺼냈다. 평소 셔츠 입는 것을 질색하는 나일지라도 고객과 첫 만남을 가지는 오늘만큼은, 고객에게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해 셔츠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프로젝트 때문에 앞으로 반년 간은 고객사 건물에서 고객과 함께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좋은 인상을 주지 못하면 앞으로 일이 힘들어질 테니까 말이다. 그렇게 평소와 다른 옷차림으로 집을 나섰다.
지하철 역까지 약 10여분을 걸어오니 머리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아무리 비가 온 다음날이라 평소보다는 덜 덥다고는 하지만 이번 여름은 유난히도 지독히 더웠던지라, 오늘도 나에게는 너무 더운 날씨일 뿐이었다. 고객과 첫 만남에 겨드랑이와 등이 땀으로 젖어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으니, 땀을 흘리지 않도록 최대한 천천히 걸었지만 그럼에도 땀샘은 폭발하기 직전에 다다른 듯 느껴졌다.
평소라면 지하철을 서서 타고 더위를 견디며 쭉 이동을 한 다음 출근 후에 땀을 식혔겠지만, 오늘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여기서 고객사까지는 약 50분이 걸리니까, 최대한 땀을 흘리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벗어나 자리에 앉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지하철을 기다리는 줄이 너무 긴 것을 보니 금세 자신이 없어졌다. 그렇지만 다행히도 오늘은 긴장 때문에 예정보다 빨리 일어났고, 빨리 출발했기 때문에 지하철 한, 두대쯤은 보내고 타도 괜찮을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그래서 지하철 문이 열렸을 때, 뒷사람들을 먼저 태우고 나는 줄 맨 앞에 서서 다음 열차를 기다렸다. 그렇게 5분 정도 기다리니 다음 열차가 도착해서 제일 먼저 열차에 올라탔다.
타자마자 걸음을 옮겨 임산부 배려석 앞으로 자리를 잡았다. 일부러 의도한 것은 아니겠으나, 이 노선의 에어컨은 칸의 맨 앞과 맨뒤에 위치한 임산부 배려석 앞에서만 나오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N-2, N-3번 칸에 탑승할 경우에는 한여름에 땀을 뻘뻘 흘리면서 출근을 해야 했다. 어쨌든 시원한 칸에 올라타는데 성공을 했으니, 그다음에는 배려석 앞에 서서 사람들을 하나둘씩 살펴보았다. 그래야 빨리 내릴 것 같은 사람 앞에 서있다가 자리를 쟁취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먼저 임산부 배려석에 앉아있는 사람을 살펴보았다. 어차피 이 사람이 일어난다 한들 내가 앉을 수는 없겠지만, 바로 눈앞에 있다 보니 나도 모르게 눈이 갔다. 체형을 봤을 때는 임신 중기쯤 되어 보였다. 복장도 임부복에 가까운 원피스였다. 다만 분홍색의 임산부 배지가 보이지 않았다. 보통 임산부들은 배려석 때문에라도 가방에 배지를 달고 다니는데 이 사람은 그런 게 보이지 않다 보니 혹시나 임산부가 아니라 그냥 체형이 좋으신 분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곧이어 가방 손잡이에 가느다란 분홍색 끈이 달려있는 것이 보였다. 짐작건대 아마 저 끈의 끝에는 배지가 있을 것 같았다. 다만 각도가 좋지 않아서 바로 앞에 있는 나에게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종종 지하철에서 임산부가 아닌데 거기 왜 앉아있냐고 시비를 거는 분들이 있으니 배지를 잘 보이도록 가방을 돌리는 게 좋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임산부 옆에는 단정한 정장 차림의 아저씨가 앉아있었다. 안경을 끼고 있었고, 이 더운 날 검은색 정장에 하늘색의 넥타이까지 매고선 꼿꼿하게 앉아있었다. 아마도 외투가 구겨질까 싶어서 쉽사리 등을 기대지 못하는 듯했다. 그냥 외투를 벗어서 잘 접고 무릎 위에 올려놓으면 될 텐데 굳이 그러는 이유가 뭔가 싶었다. 다리 사이에는 서류 가방을 놓고 있었는데 가방이 아랫부분이 많이 낡은 것을 보니 지하철을 타면 늘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아서 그렇게 된 듯했다. 일단은 이런 단정한 차림새로 봤을 때, 이 사람은 내가 내릴 역을 지나 세 정거장 뒤에 있는 증권가에 내리는 사람일 것으로 추측했다.
그 옆에는 인터넷에 어떤 직업 옷차림의 견본으로 올려놓아도 될 정도로 정석적인 모습을 하고 있었다. 가는 팔다리, 툭 튀어나온 배, 도수 높은 안경, 애플 헤드셋과 아이폰, 애플워치, 체크무늬 셔츠, 헐렁한 청바지, 검정 운동화. 누가 봐도 IT 개발자의 모습이었다. 맥북이나 아이패드까지 들고 있으면 완성형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내가 내리기 두 정거장 전에 있는 IT단지에서 내릴 것으로 추측했다. 따라서 저 사람 앞에 있으면 두 정거장 정도는 앉아서 갈 수 있겠지만, 굳이 두 정거장을 위해 지금 서 있는 자리의 시원한 에어컨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개발자로 보이는 사람 옆에는 커플이 앉아있었다. 남자는 로퍼에 슬랙스, 린넨 셔츠를 입고 있었고, 여자는 굽 높은 샌들에 원피스를 입고 큰 핸드백을 무릎 위에 놓아둔 상태였다. 서로 각자 핸드폰을 만지작 거리고 있었지만, 뭔가 재밌는 게 나오면 상대에게 보여주고 미소를 지으며 공감해 주는 모습으로 볼 때, 커플이라기 보단 부부에 가까워 보였다. 커플이라면 굳이 따로 휴대폰을 만지지 않고 한 휴대폰으로 같이 무언가를 볼 테니까. 아마도 출근길을 일정 역까지는 같이 하는 부부가 아닐까 싶었다. 물론 아예 같은 회사 사내 부부일 수도 있겠지만 그건 알 수 없었다. 일단은 남자도 여자도 IT회사를 다니는 사람의 복장이 아니었으니, 최소한 나와 같은 역까지는 가지 않을까 싶었다. 그곳에 내려서 바로 직장을 가던가, 환승을 하거나, 아니면 역을 지나쳐 갈지언정, 나보다 먼저 내릴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마지막으로 앉아있는 사람은 눈을 지그시 감고 잠을 청하고 계시는 할아버지였다. 단정한 옷차림에 중절모까지 착용하신 모습이 어딘가로 외출하시는 모양이었다. 별다른 일정이 아니라면 종로 쪽으로 갈 확률이 높았고, 일단 잠을 청한다는 것을 보면 금방 내릴 것이 아니라 멀리까지 갈 예정이신 듯했다.
결국 아무리 살펴봐도 오늘도 지하철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서 편히 갈 수는 없는 듯했다. 사실 한 번도 앉아서 간 적은 없었지만 그래도 오늘만큼은 혹시나 해서 잘 살펴보았던 것인데 역시나였다. 결국 앉는 것은 포기하고 임산부 배려석 앞에 서서 이어폰을 꽂고 휴대폰을 꺼내 들어 유튜브를 켰다. 평소 같으면 인문, 교양 쪽 영상을 보면서 출근했겠지만, 오늘은 긴장한 상태인지라 긴장을 좀 완화하기 위해 일부러 코미디 채널의 영상들을 눌렀다.
그렇게 10여분 정도 유튜브를 보고 있을 무렵, 옆에서 사람들이 부산하게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려 옆을 보니 아까 그 부부로 보이는 커플과 어떤 중년의 아저씨가 격앙된 모습으로 얘기를 나누는 듯했다. 어떤 일인지 궁금해져서 슬며시 이어폰을 빼서 주머니에 넣었다. 그러자 아저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어떻게 젊은 사람이 임산부가 뻔히 눈앞에 서있는데도 모른척하고 그래?"
"아니, 몰랐다고 했잖아요!"
"이걸 왜 몰라? 지금 배도 나오고 임산부 배지도 달고 있는데!"
"앞에를 안 보고 핸드폰을 보고 있었으니까 모를 수도 있는 거 아닙니까! 근데 언제 봤다고 반말이세요, 네?"
아무래도 중년 아저씨가 커플 중 남자 쪽에게 임산부에게 자리를 양보하라 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지금 잠깐 듣기에도 그 말투나 행동이 곱지 않으니 남자 쪽도 발끈해서 싸움이 이어지는 모양이었다. 그러자 중년 아저씨가 묘한 말투로 남자를 쏘아붙였다.
"딱 봐도 내가 당신보다 나이가 훨씬 많아 보이는데, 반말 좀 하면 어때서? 젊은 사람이 좀 유연하고 엘레강트한 사고방식을 가져야지! 하긴, 그러니까 뻔뻔하게 모른 척 그냥 앉아있었겠지."
이 얘기를 듣는 순간 나도 모르게 몸을 움츠리게 되었다. 싸움의 원인이 무엇이 되었던지 간에, 중년 아저씨가 일단 비아냥 거리는 말투를 내뱉었으니, 이제 이 싸움이 진정되기란 글렀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본인이 잘못을 했더라도 비아냥 거리는 말투를 참을 수 있는 사람이란 거의 없을 테니까. 아니나 다를까 중년 아저씨의 말에 남자는 얼굴이 빨갛게 변하면서 큰 소리로 욕을 내뱉기 시작했다.
"아이 씨X! 별 꼰대새끼가 짜증 나게 하고 지X이야! 말 다했어, 새끼야?"
남자의 도를 지나친 욕설에 중년 아저씨는 당황할 법도 했지만, 예상외로 눈하나 깜짝 안 하고 남자에 대한 조롱을 이어나갔다.
"이 자식, 이거 욕하는 거 봐? 어디 니네 부모가 그렇게 가르치든? 밖에 나가서 쌍욕하고 다니라고? 너 같은 놈들 때문에 이 나라가 이 모양 이 꼴인 거야. 예의범절도 모르고 어디서 어른한테 욕을 하면서 큰소리를 쳐? 부끄럽지도 않냐?"
"이 새끼가 이제 부모를 들먹여? 나와 이 새끼야 나이고 뭐고 넌 뒤졌어 씨X."
남자가 중년 남성의 멱살을 움켜잡고는 밖으로 끌고 나가려 했다. 옆에 있던 여자는 자기 남편인지 남자친구인지의 기세에 눌려서 오들오들 떨며 겁먹은 눈으로, 싸움을 말리기는커녕 말도 꺼내지 못한 채 그저 주변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듯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은 그들을 말리다가 불똥이 튈 것을 걱정해서인지 아무도 말리려 들지 않았다. 나 또한 괜히 불미스러운 일에 휩쓸리기 싫어서 옆으로 몸을 조금 비키고는 그들을 힐끔 거리며 쳐다보았다.
"예의도 없는 게, 손찌검을 해? 이거 안 놔?"
"그래 안 놔 씨X. 따라 나와 이 새끼야."
어느샌가 그들 주변의 사람들은 그들에게서 조금 떨어져 있었고, 그들 주위로 원을 이루며 서있었다. 그쯤 되자 맨 끝자리 나이 지긋하신 할아버지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에게 다가가셔서 입을 떼셨다.
"그, 젊은 사람들이 아침부터 이렇게 지하철에서 언성을 높이고 싸워대면 쓰겠어요? 둘이 하도 싸워대니까 애엄마가 앉지도 못하고 내렸네."
그러고 보니 어느샌가 임산부가 사라졌다는 걸 나도, 그 사람들도 그제야 눈치를 챘다.
"누가 잘했고, 잘못했고를 떠나서 아침 출근길에 다들 힘들 텐데 이러지들 맙니다."
하지만 남자는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여전히 격앙된 모습으로 씩씩 거리며 멱살을 놓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래서인지 옆에서 보기에는 아직은 싸움이 끝날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느새 지하철은 내가 내릴 역에 가까워졌기에, 나는 그 싸움이 끝나지 않았다 하더라도 내려야만 했다. 지하철 속도가 느려지고 천천히 정차를 시작하자 내릴 문 앞에 지하철 직원인지 공익 요원인지 알 수는 없는 유니폼을 입은 남자 두 명이 보였다. 아무래도 누군가가 싸움이 일어났다고 신고를 한 모양이었다. 그들은 탑승을 기다리는 승객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먼저 들어와 멱살을 잡고 있는 둘을 떼어놓았다.
"여기서들 이러시면 안 됩니다. 두 분 다 내려주시죠."
그제야 흥분이 조금 가라앉은 남자가 멱살을 풀었고, 중년 아저씨도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그리고 부부로 보이는 커플과 중년 아저씨, 그리고 두 직원이 함께 내렸다. 나도 출근을 해야 했기에 따라 내렸다. 플랫폼에 서서 직원들 중 한 명이 얘기했다.
"두 분 싸움이 역에도 신고가 들어왔지만, 경찰에도 신고가 들어가서 지금 경찰분들도 오셨거든요. 역무실로 가셔서 간단하게라도 두 분 다 진술을 하고 가셔야 합니다."
그러자 남자가 말했다.
"진술은 무슨 진술이요? 이 인간이 시비 걸어서 그런 건데."
"이 인간이라고? 끝까지 예의를 밥 말아먹었네? 어린놈의 자식이 사사건건 이따위로 말할 거야?"
중년 아저씨도 지지 않고 맞받아 쳤다. 그러자 남자가 다가가며 주먹을 드는 제스처를 취하자 직원 둘이 황급히 달려들어서 둘 사이를 떼어놓았다. 그리고 각자 한 명씩 맡아서 역무실로 데려가려 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에스컬레이터로 발걸음을 옮겼다. 싸움도 대충 끝난 듯 보였고, 나도 출근은 해야 했기에 이제는 그들의 싸움에 딱히 흥미가 없어졌다.
그렇게 역을 나와 역에서 3분 거리인 고객사로 발걸음을 옮겼다. 고객사 로비에 도착해서 고객사 파트너 분께 전화를 걸었다. 내 전화를 받고 담당자분이 1층 로비로 마중을 나와 주었고, 그를 따라서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그가 사무실이 위치한 21층을 누르고는 나에게 말을 걸었다.
"날씨가 많이 덥죠?"
"아, 네. 요새 날씨가 장난 아니네요."
"오실 때 지하철에서 에어컨은 시원하게 틀어주던가요?"
"에어컨은 시원하게 틀어놓긴 했던데. 도중에 승객들끼리 싸움이 일어나가서 그거 때문에 시끌시끌하기도 했고 사람들이 싸우는 사람들 피해서 서있느라 다닥다닥 붙어있었어서 생각보다 많이 덥더라고요."
"아, 지하철에서 싸움이 났었어요? 아침부터 큰일 치르셨네요."
"뭐, 제가 싸운 건 아니니까요. 덕분에 지루하지는 않게 왔습니다."
21층에 도착해서 그가 유리문 옆에 달려있는 단말기에 출입 카드를 갖다 대자 유리문이 자동으로 열렸다. 그곳에 들어서자 널찍한 공간에 3인용 소파가 4개 늘어져있었고 마주 보는 2개 소파들 사이로 작은 테이블이 놓여있었다. 그는 나를 그 소파들 중 한 곳으로 안내하고는 구석에 위치한 탕비실의 에스프레소 머신으로 커피를 내려왔다. 커피를 쭉 들이켜니 그제야 몸의 긴장이 풀리고 시원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팀장님이 곧 출근하시면 저랑 같이 들어가서 인사하시죠."
"네."
"저는 지금 할 일이 있어서, 잠깐 자리에서 일 좀 하고 있을게요. 팀장님이 바로 제 대각선 자리라 오시면 바로 알 수가 있으니, 그때 같이 인사하시면 될 것 같아요. 그때까지는 여기서 좀 쉬고 계세요. 땀도 좀 식히시고요."
잠시 후 파트너가 나에게 와서 말을 걸었다.
"팀장님이 오늘따라 좀 늦게 출근하셨네요. 지금 오셨으니까 같이 가서 인사하시죠."
그렇게 그를 따라 팀장 자리로 향했다. 팀장은 컴퓨터 화면을 보고 있어서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파트너가 팀장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팀장님, 오늘 투입되기로 한 정XX 차장님 오셨습니다."
그러자 팀장은 고개를 돌려 자리에서 일어나며 나에게 인사를 했다.
"자~, 안녕하세요. 영업 2팀 팀장, 박XX라고 합니다. 차장이라더니 생각보다 젊으시네? 아, 젊어서 싫다는 얘기가 아니에요. 나는 젊은 사람들 좋아합니다. 아무래도 젊은 사람들이 나보다는 사고방식이 유연하고 엘레강트할 테니까요."
… 매우 길고 힘든 하루가 될 듯 한 예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