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gden Museum of Southern Art
루이지애나주 뉴올리언스에 위치한 오그덴 미술관에 다녀왔다. 남부 미술은 처음 접하는 거여서 설렘을 안고 찾아갔다.
떠난 사람이 머물렀던 공간에 관한 사진이다. 그동안 떠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는 많은 반면 남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없다. 사람은 떠났지만 그가 머물렀던 장소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한 공간에 대한 의미는 상대적이고 가변적이다. 똑같은 공간도 사람에 따라 개별적인 의미를 지닌다. 어떤 트라우마적 사건으로 장소가 특정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장소는 어느 때와 같이 그 자리에 위치할지 몰라도 사람이 느끼는 감정은 과거와 다를 수 있다.
"트라우마는 과거의 기억이 아니다. 그것은 끊임없이 재생된다."
항상 걸었던 길이 아버지 죽음 이후에 다르게 느껴졌던 이유는, 지하철에 탄 아랍 사람들이 오스카에게 다르게 다가왔던 이유에는 9/11이라는 트라우마적 사건이 있었다. (책 <Extremely Loud & Incredibly close>)
샐리가 노예 생활에서 벗어났음에도 스위트 홈은 항상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장소가 불러일으키는 유기적인 감정은 끊임없이 트라우마 사건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책 <Beloved>)
창문에서 들어오는 햇빛과 맞닿아 있는 조형물이다. 햇빛이 들어오는 통창은 미술관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파리 루브르도 빛이 들어오게 해서 안과 밖의 경계를 허물고 투명성을 보여준다고 한다.
코로나와 인종차별, 두 가지의 팬데믹을 그린 작품이다. 마스크를 쓴 두 사람 뒤 경찰의 과잉진압을 볼 수 있는데 2020년 미국 전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blacklivesmatter가 생각났다. 마스크를 쓴 두 사람이 코로나 팬데믹과 전 세계적으로 현재 진행형인 인종차별에 대해 침묵할 수밖에 없는, 공론화하기에는 아직 역부족한 흑인들을 나타낸 게 아닐까 조심스럽게 추측해 본다.
환경 파괴의 결말로 인류의 마지막 모습이라 생각했다. 서로의 이산화탄소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지경까지 간 건가 싶었는데 설명을 보니 다이버들이 받는 훈련을 나타낸 것이란다. 산소통의 산소가 떨어졌을 때 서로에게 의지하는 법을 배운다고 한다. 그렇게 보면 인간은 홀로 살아갈 수 없는 거 같다. 세상은 모든 것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에 그 속에서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거 같다.
혀를 표현한 작품인데 여기 쓰인 설명이 마음에 들었다. "The tongue cannot be tamed (혀는 절대 길들여질 수 없다)" 우리가 무심코 내뱉는 말 한마디의 무게감이 얼마나 큰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아프게 할 수 있는가. 그냥 한 말이 결코 가볍지 않은 이유이다.
"The complex relationship between an enslaved boy and the children of his master (노예 소년과 그의 주인의 아이들 사이 복잡한 관계)"
자세히 보면 흑인 소년은 나머지 3명과 조금 떨어져 있다. 한 가족이라고 표방하지만 결코 완전히 귀속될 수 없는 괴리감이 느껴졌다. 그것이 노예 소년과 주인 사이의 관계일 수도 있고 더 나아가 흑인과 백인 사이의 관계일 수 있다.
<Marichis>라는 작품이다. Marichis는 멕시칸 음악의 한 종류이다. 남부 예술이라 그런지 확실히 멕시코 문화도 많이 보였다.
노을빛에 드리워진 구름의 색을 저렇게 표현할 수 있다는 게 인상적이었다. 예술가는 단순히 그림 실력뿐만 아니라 대단한 관찰력도 있어야 된다는 내 생각이다. 거기에 과학적인 지식까지 갖춰진다면 명암, 원근법 등 표현이 더 풍요로워질 것 같다.
뉴올리언스에서 우연히 만난 남부 예술은 나에게 또 다른 색을 선물해 주었다. 오그덴 미술관은 설명도 잘 되어있고 어느 지역에서 비롯된 예술인지 명확하게 지도 모양으로 표시가 되어있어 이해하기 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