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역이 예술 공간이 되다
오르세 미술관 앞에는 코끼리 동상이 반기고 있다.
오르세 미술관은 원래 기차역이었다고 한다. 폐기차역을 개조하여 만든 것이 지금의 오르세 미술관이다. 미술관을 새로 짓지 않고 원래 사용했던 건물을 예술의 공간으로 탈바꿈시킨 것이 인상적이다.
기차역이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시계탑이다. 일상의 공간이었던 기차역이 미술관으로 바뀜으로써 건물 자체가 일상과 예술의 경계를 허문다.
내 시선이 가장 오랫동안 머물렀던 시슬리의 작품이다. 작년 5월쯤 도서관에서 읽은 책, <여름>이 떠올랐다.
숲 속에서 책을 읽는 여인의 모습이 주인공 채리티와 닮았다. 상상 속으로만 존재했던 책의 한 장면을 시슬리가 대신 그려준 느낌이다.
정면에 앉아있는 세 인물, 그리고 그들과 다소 떨어져 있는 여인이 눈에 띈다. 세 사람과 뒤에 위치한 여인의 심리적 거리는 물리적 거리만큼 멀어 보인다.
벽면을 가득 채운 두 그림은 연결되어 있는 하나의 작품이다. 예술가가 설정한 가로, 세로 구도에 따라 작품의 인상이 달라지는데 이 작품은 하나의 그림에서 두 가지를 동시에 느낄 수 있다. 왼쪽 세로 구도는 서 있는 인물들을 잘 드러내고 여인들의 드레스를 돋보이게 한다. 반면 오른쪽 가로 구도는 앉아있는 인물들을 잘 표현하고 감상자 또한 앉아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르누아르의 작품이다. 르누아르 작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당시 사람들의 옷차림을 알 수 있다.
르누아르의 작품은 솜털 같은 느낌을 준다. 솜털같이 부드러우나 색은 또 선명해서 보고 있으면 귀중한 비단을 손으로 만지는 기분이다. 춤추는 두 사람 뒤 어린아이가 눈에 띈다.
모네의 풍경화이다. 모네 그림은 은은하고 차분한 인상을 준다. 다른 회화에 드러난 그의 붓질은 짧고 투박한데 이 작품은 스치듯 가벼운 느낌이다.
시슬리의 풍경화이다. 모네의 풍경화와는 다른 느낌을 준다. 인상주의 화가들의 스타일은 비슷한 듯 보이지만 각각의 그림이 자아내는 분위기는 미묘하게 다르다.
모네의 또 다른 풍경화이다. 모네의 붓질은 빛에 따라 달라지는 자연을 포착하기 위해 빠르고 짧은 것이 특징이다.
나무에 핀 꽃이 뒤에 있는 집과 잘 어울린다. 비슷한 색을 사용하여 봄내음을 한데 모아 마당의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다.
나사니엘 호손의 <라파치니의 딸>이 생각나는 작품이다. 정원에서 꽃을 가꾸는 어린 소녀의 모습이 주인공 베아트리체와 겹쳐 보인다.
정원 옆에 있는 창문으로 베아트리체의 연인 조반니가 나와 말을 건넬 것 같은 분위기가 연상된다. 실제로 작품에서 베아트리체의 아름다움에 한눈에 반한 조반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more beautiful than the richest of them - but still to be touched only with a glove, nor to be approached without a mask
(그녀의 아름다움은 꽃들의 풍성함과 비교할 수 없고, 장갑을 끼고서만 만질 수 있으며 마스크를 쓰지 않고서는 다가갈 수조차 없다)"
이 책의 줄거리를 요약하자면 라파치니 박사는 과학에 맹신하는 인물로 자신의 딸을 실험 대상으로 이용한다. 베아트리체는 정원에서 독성이 있는 식물을 기르면서 독을 품게 되고, 그녀가 사랑하는 조반니도 베아트리체의 독에 감염된다. 조반니가 가져온 해독제를 마시지만 독이 곧 생명인 베아트리체에게 해독제는 곧 죽음이다. 해독제를 마신 베아트리체의 죽음으로 소설은 끝을 맺는다.
평화로운 초원의 오후가 연상되는 작품이다. 빛과 그림자에 따라 달라지는 풀의 색이 잘 표현되어 있다. 어쩌면 우리가 보는 사물의 색은 실제가 아닐 수도 있다. 자연의 인상은 한시적이기에 의미가 있다. 순간적인 인상을 감상자에게 전달하는 예술가는 자연의 실제를 더 충만하게 해 준다.
1890년 즈음에 모네는 같은 대상을 여러 번 그리기 시작한다. 그 이유는 빛에 따라 달라지는 물체의 변화를 잘 포착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자연이 가진 특정한 인상을 잘 얻어내기 위해서"는 빛의 변화에 따라 캔버스를 바꿔야 된다고 생각했다. 모네는 루앙 대성당 연작을 완성하는데 많은 시간을 투자한다. 변하지 않는 성당은 모네로 하여금 햇빛과 그림자에 의해서 달라지는 인상에 집중할 수 있게 했다(Rewald, John."The Impressionist Brush." The Met)
밝은 그림들이 보여주듯 항상 밝았을 것만 같은 모네의 어두운 순간을 만났다. 이 그림은 모네가 사랑한 아내, 까미유의 마지막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모네에게 희망과 영감의 빛이었던 까미유가 저문 그림에는 짙은 그림자 깔려있다.
삶에 녹아 있는 모든 것들은 시간이 지나면 변하기 마련이다. 고통과 행복이란 감정은 영원하지 않고 퇴색된다. 그러나 그림에는 여전히 남아있다. 특정 장소와 계절 그리고 시간이 불러일으킨 인상은 그림 속에 영원히 남아 오래도록 지속된다. 유한한 인간의 생명을 작가의 작품이 이어가는 것이다.
이번 오르세에서 모네가 풍경화뿐만 아니라 인물화도 많이 그렸다는 것을 새롭게 알 수 있었다. 모네의 풍경화는 두터운 붓질이 특징이라면, 그에 비해 인물화는 가볍고 얇은 붓질이다. 여인들 밑에 깔린 풀은 유화의 두꺼운 질감이 눈에 보이지만 인물들을 채색한 것을 보면 질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모네가 그린 인물에는 대부분 표정이 없는데 자연의 한 부분으로 인물을 바라본 느낌이다.
두 작품은 모네의 딸 쉬잔을 그린 그림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사랑하는 아내가 죽고 난 뒤 모네는 딸을 바라보며 까미유를 떠올렸을 것이다.
물에 비친 인물들과 자연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세 인물은 각각 다른 곳을 응시하고 있는데 같은 것을 보더라도 각기 다른 것에 초점을 두어 개별적인 의미를 만들어내는 인간의 특성이 엿보인다. 인물들의 밝은 색의 옷차림과 채도가 높은 배경은 조화를 이룬다.
모네가 지베르니에 정착했을 때 그린 정원의 모습이다. 모네는 일본식 다리가 있는 정원에서 많은 그림을 그렸다. 자신이 좋아하는 수련과 다리가 있는 정원을 캔버스에 담아내는 일이 얼마나 감격스러웠을까. 마치 새하얀 옷에 수련을 하나하나 수놓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백내장을 앓고도 계속 그릴 수 있었던 이유는 아름다운 정원의 모습을 포착하는 일이 모네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후기 인상주의에 대표적인 화가 빈센트 반 고흐의 자화상이다. 냉소적인 표정은 그의 감정상태를 짐작케 한다. 배경은 파란 물감과 헤엄치는 듯한 붓질로 되어있는데, 그의 불안한 내면을 상징한다.
뉴욕 모마(MoMA)에 있는 <별이 빛나는 밤>보다 1년 앞선 작품이다. 모마에 있는 <별이 빛나는 밤>은 하늘의 비중을 크게 두어 밤하늘이 쏟아내는 에너지가 크게 느껴지는 반면, 오르세에 있는 작품은 전체적인 밤의 인상을 보여주어 고흐가 저녁에 느꼈을 감정이 드러난다. 작품 하단에 위치하고 있는 커플은 밤의 또 다른 인상을 부여하는데, 그림으로만 느껴졌을 밤풍경에 인간적인 요소를 더해 고흐가 바라본 밤을 감상자 또한 눈으로 보고 있는 듯한 사실적인 느낌을 준다.
이 작품은 <아를의 반 고흐의 방> 연작 중 하나이다. 다른 버전을 시카고 미술관에서 볼 수 있었는데 전시 작품에서 사라져서 보지 못했었다. 벽면에 걸린 두 인물의 초상화가 눈에 띈다. 고흐의 두꺼운 붓질은 이 작품에서도 드러나는데 특히 가구 표면에서 임파스토 기법(붓이나 나이프로 물감을 두텁게 칠해 표면의 질감을 드러내는 유화 기법)이 두드러진다.
풍경보다 인물에게 먼저 눈길이 갔던 작품이다. 투박하게 그린 인물이 묘하게 인간적으로 다가왔다. 예술가는 사실을 실제보다 더 실제처럼 그려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고흐는 자신의 붓 스타일로 표현했다. 기분을 알 수 없는 여인의 눈에서 약간의 재미도 느꼈다.
고흐가 그린 대부분의 교회는 어둡다. 창문으로 보이는 안은 불이 꺼져있고 해가 저물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고흐는 목사인 아버지에게 기독교적인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 신은 하나님이 아니라 "Something up there (위에 있는 무언가), " "Something that can't be named (이름 지을 없는 무언가)"였던 것이다.
고갱의 작품들이다. 그는 선명하고 채도 높은 색을 주로 사용했다. 예술의 원시적인 기반을 찾기 위해 남태평양 타히티 섬으로 간다. 그곳에서 만난 남태평양의 원주민들을 대상으로 고갱은 많은 그림을 남겼다.
누워있는 두 사람의 모습이 마치 사랑스러운 커플을 연상케 한다. 잠이 덜 깬 듯 보이는 그의 입가에는 미소가 번져있다. 사랑하는 연인과 함께 아침을 맞이하고 하루를 시작하는 것만큼 행복한 일이 있을까.
마이애미에서 본 바다의 이미지가 떠올라 나도 모르게 이끌렸던 작품이다. 흔히 파랗게만 표현되는 하늘과 바다에도 자세히 바라보면 여러 색이 있다. 내가 마이애미에서 느꼈던 감정을 화가가 대신 표현해 주는 기분이었다. 에메랄드 색의 바다와 노을로 물들인 하늘은 그때의 감정을 다시금 불러일으킨다. 태양이 지나간 자리에는 흔적이 남는다. 마치 태양이 가진 에너지가 너무나도 뜨거워서 온 하늘을 물들이고 나서야 사라지는 것처럼. 세상에 흔적 없이 사라지는 것은 없다. 빛에 따라 달라지는 자연의 인상을 그린 모네, 깜깜한 밤하늘이 쏟아내는 에너지를 포착한 고흐처럼 섬광처럼 반짝이고 사라지는 것이 순간이라면, 우리는 예술가가 남긴 '흔적'을 통해 자취를 따라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