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대한민국의 초상. 가족의 저녁은 이미 각자의 저녁이 된 지 오래인데... 더 이상 대가족 문화도 아니고 심지어 핵가족이어도 부모 자식이 한자리에 모여 저녁을 먹는 일은 드물다. TV연속극이나 토크쇼에 가끔 대가족이 등장하여 끈끈한 가족애를 자랑하며 과거에 대한 향수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기는 하지만 그럴수록 현실은 그와 다르다는 것을 반증할 뿐.
TV에서 흥미롭게 관찰하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삼시 세끼를 먹기는커녕 한 끼도 제대로 해 먹기 힘든 도시생활자들에게 '차줌마'를 유행시킨 '삼시 세끼'와 집밥은 엄마밥이 아니라 집에서 스스로 해 먹는 밥이라고 정정한 '집밥 백 선생'. 미디어를 접수한 가히 대세라 일컬어지는 남성 요리사들의 경연장 '냉장고를 부탁해' 에서부터 '아빠 어디 가' '나 혼자 산다' '꽃보다 할아버지' '오늘 뭐 먹지?' 등등. 공중파와 케이블을 모조리 도배하는 건 지겨울 정도로 온통 남성, 남성뿐이다. 근래 들어 왜 유독 남성들만을 관찰한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까?
현재 진행 중인 삶 양식이 변화하므로 전통적 남성성이 현대 지식사회의 생산에 기여하는 바가 줄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곰곰이 들여다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깨닫게 된다. 과거 밖에 나가 돈을 벌어옴으로써 가사노동을 면제받고 차려주는 밥상을 받아먹던 가부장의 권리가 무너졌으니 남자들도 이제 밥 하는 법을 배워야 하고 스스로 살림을 영위할 줄 알아야 하며 각자 혼자서 밥 먹는 사회로 변화하는 것 또한 자연스러운(!) 사실이라는 것을. 먹방이 범람하거나 심야식당 같은 드라마가 유행하는 것도 크게 다르지 않다.
당장 피부로 느끼는 이 같은 현실을 이해하면 1인 가구의 급속한 증가와 인생에 닻을 내리고 정박하지 못하는 삶에 대해 좀 더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게 될 뿐 아니라 왜 다이소 그리고 이케아가 한국에서 하필 지금 시점에 큰 사업적 기회를 얻게 되었는 지를 알 수 있다. 이와 함께 양성 평등의 추세는 동등한 인간의 권한과 책임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게 하고 시대 변화를 수용하지 못하는 제례인 명절이 끝난 직후에 왜 백화점 매출이 늘고 이혼율이 급증하는지 그 이유를 설명해 준다.
언제나 여성은 더 빨리 시대 변화에 적응하며 도전한다. 태생적 조건과 항상적 상시적 차별에 시달리는 여성은 생존 앞에서 더욱 민감할 수밖에 없다. 만약 이를 여성이 기회주의적이라서 그렇다고 비난하는 남성이 있다면 나는 그에게 말해주겠다. 당신이 무엇을 상상하든 무엇을 고집하든 실제와 다르다. 고로 당신이 믿는 상식은 더 이상 상식이 아닐 수 있다고.
가치관과 시대 변화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아빠/남성은 리모컨을 들고 거실 소파에서 혼자 잠잘 수밖에 없으며 편의점에서 라면으로 대충 끼니를 때우며 만성 피로와 불규칙한 식습관에 몸을 망칠 수밖에 없다. 남성들조차 상시적인 고용불안에 시달리는 마당에 남성적 권위를 내세워 여전히 가정에서 군림하려는 남성은 도태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매일 여자가 차려주는 밥을 먹고 싶고 아내가 해주는 따끈한 아침밥을 먹고 싶다는 남성이 있다면 그에게도 말해주겠다. 이제 그 여자는 당신 어머니밖에는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고. (아니다. 요즘은 그 어머니들조차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먹고 사느라 제 밥조차 챙겨 먹지 못하는 여성들이 허다하다.)
친구와 크리스마스이브 저녁을 보냈다.
크리스마스 캐럴 음악을 들으면서
벗과 오손도손 같이 나누는 밥상.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나라가 어수선하고
이래저래 어렵고 힘들고 아프고 괴롭고 불안한 세밑에
오늘밤만큼은
너와 나
하마터면 이 소소한 일상의 행복을 영원히 잃어버릴뻔했다.
무도한 정권에 맞서
12월 3일 밤 여의도로 달려간 그 모든 분들에게 감사를
악의 평범함을 떠올리며 동시에 선의 의지를 믿으며
시대정신이 함께 하는
크리스마스 이브의 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