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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장장애자의 밥상

by 홍재희 Hong Jaehee



1.


과거 스트레스성 위장장애라 불린 속쓰림, 더부룩함, 소화불량, 급체, 복통, 변비, 설사, 구토, 위무력증 등의 위장병은 이제 기능성 위장장애라고 불린다. 자칫 방심하면 말짱 도루묵, 멀쩡한 듯 다 나은 줄 알았다가도 순식간에 재발하는 병이다. 내가 심각한 기능성 위장장애 환자라는 걸 받아들인 이후 내 밥상은 과거와 판이하게 달라졌다. 병원약도 듣지 않아서 여러 가지로 이 병에 대해 공부를 하다 다음 글을 읽고 빵 터졌다.

"기능성 위장장애는 죽을 만큼 아픈 만성통증에 시달리지만 죽지는 않는다. 반면 암은 자각증상이 없을 만큼 평소에 안 아프다가 걸리면 죽을 수도 있다."

코로나 시기는 식단을 바꾸고 일상을 재조직하는 최적의 시간이었다. 아플 때마다 병원에 달려가 임시방편으로 약을 먹었지만 그때뿐이었다. 약을 먹고 일시적으로 통증이 가라앉았을 뿐이지 근본적으로 달라진 것이 없었다. 식이요법으로 치료한 후 몸 상태가 많이 호전되었다. 결국 내 위장병은 밥상 밖에 답이 없는 병이었던 셈이다. 식단조절, 소식하기, 정해진 시간에 규칙적으로 밥 먹기, 천천히 씹어먹기, 산책과 운동, 뭉친 이혈을 자극하는 마사지와 목욕, 사회적 거리두기, 날마다 같은 시간에 기상 취침, 알코올 니코틴 카페인 없는 일상을 석 달 이상 지속한 결과였다.

만성통증은 삶의 질을 떨어뜨린다. 통증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스트레스 때문에 통증이 반복된다. 그 고통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먹는다는 행위 자체가 비극의 근원으로 느껴지는 순간이다. 몸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때가 되었다는 것을, 늙어가는 몸을 정신이 보살펴야 한다는 것을, 병증과 함께 살아가기를 배운다. 다시 한번 겸손해진다.

-친구가 날 보더니 얼굴 좋아졌다 한다. 또 한 번 빵 터졌다. 디톡스 제대로 하고 있나 보다. 청정한 몸뚱이가 되고 있다.


2.

세발나물을 사서 뭐 해 먹을까 궁리하다가 무침도 하고 전도 부쳐 먹는다. 케일 한 봉지에 천 오백 원 하길래 냉큼 집었다. 기쁘다. 행복하다. 서양 채소 중에 치커리, 셀러리, 루꼴라, 베이비 스피니치를 좋아하는데 이참에 케일을 하나 더 추가하기로. 생으로 씹어먹어도 쌉쌀한 맛이 그만이다. ​


​간이 세고 자극적인 음식을 약한 위장이 견디질 못하기 때문에 모든 요리에 최소한 간을 한다. 양념이 많이 들어가는 요리는 지양한다. 채소는 살짝 데치거나 찌거나. 아예 생으로 먹는다. 팔팔 끓이고 기름에 달달 볶아야 하는 요리도 최단시간으로 줄였다.



3.

밥상 차리기. 품이 너무 많이 들어가는 일이다. 매번 다른 걸 해 먹기가 얼마나 귀찮은지 모른다. 그렇다고 허구한 날 외식을 할 수도 날마다 인스턴트를 사 먹을 수는 없고.....

시중에 파는 비비고, 오뚜기, 동원 죽은 영혼이 빠져나간 텅 빈 육신, 아무 풍미도 없는 껍데기 같은 맛이 난다. 사실 그건 맛 자체가 없는 거다. 칼로리 외에는 무미한 죽. 궁리 끝에 방앗간에서 흑임자와 깨를 사 왔다. 인스턴트 죽을 끊일 때 들깨가루나 흑임자와 깨를 듬뿍 넣는다. 그 위에 참기름을 쳐서 먹으면 그나마 죽다운 맛이 난다.

어릴 적 숱하게 흰쌀죽을 먹었더랬는데 죽의 신세계에 입문했다. 죽이 이렇게 맛있을 줄은 예전에 미처 몰랐다. 오늘은 또 어떤 죽을 해 먹을까. 손 덜 가고 맛은 나고 위장에 좋은 죽은? 꾀가 늘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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