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내내 저녁과 재즈펍 사이의 시간에 빈둥거렸다. 더위를 식힌다는 명목으로 호텔방에서 잘도 그런 시간을 보냈다. 치앙마이의 막바지가 되어서야 드디어 마음을 먹었다. 앙 깨우 저수지에 가보겠노라고. 한낮에 가는 건 정말 정신나간 짓 같아서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시간에 가기로 했다. 일몰이 유명한 호젓한 호수라는 점도 한몫했다.
볼트를 타자니 뭔가 아까운 거리였고 걸어가자니 땀으로 온몸을 적실 것 같아 자전거를 택했다. 따릉이처럼 저렴한 가격에 빌릴 수 있는 공유자전거가 있어서 사용법을 열심히 알아보고 1 DAY PASS를 결제했다. 생각보다 인프라가 잘 갖춰져 있었고 따릉이보다도 더 산발적으로 퍼져있었다. 숙소 바로 앞에 자전거 스테이션이 있어서 나가자마자 자전거를 탈 수 있었다.
쪼리 대신 운동화를 신었다. 짐을 최소한으로 줄였고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 날이 조금 흐려 보였지만 이 도시에서 비를 맞은 적이 많지 않기 때문에 신경 쓰지 않았다. 호텔 로비를 나섰고 나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물을 세 방울 맞았다. 호텔방 안에서는 내리지 않던 게 어쩜 내가 로비를 나오자마자 떨어질까. 외출 1분 만에 나는 몸을 틀고 방으로 돌아왔다.
몇 해전, 비가 온 뒤 자전거를 신나게 타다가 물 웅덩이에서 시원하게 넘어져 까진 팔꿈치가 시큰했다. 여기까지 와서 그러고 싶진 않았다. 뭐, 내일도 있으니까.
마지막날이었다. 오전에 꽤 많은 비가 내렸지만 역시나 점심쯤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구름이 갈라지고 파란 하늘이 보였다. 비로소 오늘이야 말로 저수지와 자전거의 날이다. 한낮의 일정을 마치고 숙소에서 정비했다. 어제 했던 만반의 준비를 반복했다. 로비를 열고 나서도 비는 내리지 않았다. 자전거의 잠금을 풀고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달렸다. 아침에 내린 비는 한낮의 태양에 모두 증발했다. 습기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게 10분쯤 달렸을까. 길을 잘못 들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괜찮았다. 이럴 줄 알고 조금 일찍 나왔다. 다시 되돌아가도 무리 없이 일몰의 호수를 눈에 담을 수 있었다. 그런데 내가 간과한 것이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퇴근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는 점이다. 내가 머물고 있는 곳은 큰 사거리를 기준으로 끔찍한 교통체증을 보인다. 인도가 좁고 변변찮은 치앙마이에선 자전거도 꼼짝없이 차도로 달려야 했다. 몰아치는 차와, 그 사이사이 알알이 박혀있는 오토바이를 피해서 되돌아가야 했다. 생각보다 시간이 지체될 것 같았다.
둘은 구름이 몰려오고 있다는 점이었다. 매우 빠른 속도로, 매우 엄청난 놈이 오고 있었다. 그 색과 크기가 심상치 않았다. 이곳에서 본 그 어떤 구름보다 색이 짙었다. 그 녀석은 어느새 내 머리 위로 자신의 양탄자를 깔았다. 단순히 비유가 아니라 정말 양탄자처럼 파란 하늘을 서서히 뒤덮었다.
너, 자전거 타지마. 분명 그 양탄자 같은 놈은 내게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결국 나는 이십 분 만에 숙소 근처 쇼핑몰 쪽에 있는 스테이션에 자전거를 반납했다. 저수지는 구경도 못하고 신나게 도로에서 이곳의 교통체증과 도로시스템에 대한 저주만 퍼붓었다. 그리고 땀을 식히러 간 쇼핑몰에서 충동적인 쇼핑을 했고 그동안 치앙마이에서 본 비 중에서 가장 세차고 거센 비가 와장창 내렸다. 고집을 부려 저수지로 갔다면 가진걸 모두 잃고 이곳의 날씨에 대해 세찬 저주를 퍼붓었을 것이다. 이번 여행에서 내린 가장 완벽한 결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