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개인적으로 포장마차 분위기를 정말 좋아한다. 선선한 저녁, 허술한 접이식 테이블과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서 술과 안주를 먹으며 보내는 시간은 천국이다. 적당히 소란스러운 거리를 보면서 내가 이 도시에 잘 녹아들었다는 묘한 안도감과 편안함은 그 어떤 술집과 식당도 주지 못하는 감성이다.
그래서 을지로는 '적당히' 소란스럽지 않다는 것만 제외하면 얼추 이 조건에 맞아 들어간다. 하지만 을지로는 서울에서 손에 꼽히는 구도심이지만 어디선가 갑자기 튀어나온 것 같다. 그 긴긴 시간 동안 왜 을지로는 내 눈에 띄지 않았을까.
지금도 을지로는 해가 지면 포차거리를 살짝만 벗어나도 섬짓해지는 곳이다. 굉음을 내는 인쇄소와 인공의 조명집, 어둑어둑한 골목길은 이곳이 유명한 포차골목의 바로 뒤편이라는 사실을 까먹게 만든다.
그래, 을지로는 분명 이런 곳이었다. 이런 골목 구석구석에 잠들어 있는 맛집들은 모두 로컬들의 차지였다. 호탕하고 때로는 괄괄한 아저씨들이 노가리를 구워 먹을 것만 같은 곳. 도심 속이지만 시골의 풍경이 떠오르는 곳. 전봇대는 나무가, 오래된 빌라들은 산이 되어 정겹고 가끔은 고요하게 무서워지는 곳. 이것이 을지로였다.
허나 을지로에서 로컬들은 자취를 감췄고 사람들이 북적였다. 그곳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남들과 다르고 싶어서 그만
홍대병. 주로 홍대에 자주 출몰하는 10-20대가 걸리는 병으로 남들과는 다른 길을 걷고 싶어 하는 병이었다. 홍대병은 개성이 강하고 유행을 따라가지 않는 사람들을 부르는 멸칭이다.
아마도 이들은 먹는 것, 마시는 것 역시 남들과는 다르고 싶었던 모양이다. 홍대, 건대, 명동, 강남 같은 대중적인 장소보다 구석진 골목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찾은 유적 같은 곳이 을지로였다.
그들은 인쇄소 옆에 자리한 호프에서 노가리와 맥주를 시켰다. 그런데 이게 뭘까. 미칠듯한 가성비와 맛, 분위기는 대체 뭘까.
물론 이들만 을지로를 지금의 힙지로로 바꿔놓은 것은 아니다. SNS와 그즈음 해서 불어닥친 뉴트로 열풍이 숨어있는 공신이었다. 각종 요소들이 합쳐지면서 지금의 을지로가 됐다.
이런 영향으로 호프에 자리한 사람들은 을지로의 다른 모습이 궁금했다. 미지의 유적을 탐험하듯 맛집들을 발견해내기 시작했다.
주로 서울의 역사와 함께한 노포들부터 시작했다. 엄청난 가성비와 맛을 보장하는 전통, 인공적으로 구현할 수 없는 푸근한 분위기와 그 속에 숨은 힙함은 노포를 전세대가 아우르는 식당으로 만들었다.
그다음 타자는 그렇게 형성된 상권과 민심을 파고드는 신생 식당이었다. 원래 을지로에서는 보기 힘들었던 일식과 양식, 퓨전 한식집들이 들어섰다.
을지로에서 신선함을 맛보고 싶었던 소비자들은 열광했다. 다른 상권에 비해 저렴하고 맛도 있었으며 무엇보다 핫플레이스였다는 점은 SNS로 무장한 20대를 끌어들였다.
복고, 늘 그리운 과거
우리는 늘 과거를 그리워한다. 과거에는 늘 낭만이 있었고 현재에는 느낄 수 없는 따듯함이 묻어있는 것 같다. 하지만 과거에 도사렸던 불편함과 촌스러움까지 그리워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레트로에 새로운 것을 입혀서 뉴트로를 탄생시켰다. 과거를 그리워하는 나의 부모 세대와, 그런 과거를 경험하고 공감하고 싶은 20~30대를 모두 사로잡는 괴물 트렌드의 탄생이었다.
뉴트로의 성지는 단연 을지로였다. 을지로 때문에 뉴트로라는 트렌드가 급부상한 것이 없지 않아 있다.
하지만 이런 뉴트로의 성지 하면 또 떠오르는 곳이 바로 성수다. 성수와 을지로는 닮은 듯, 다르다. 둘 다 공업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로컬들만 찾는 곳이었다가 뉴트로를 발판 삼아 새로운 상권을 형성한 케이스이다. 20~30대는 과거와 공존하는 현재를 보기 위해 각각의 장소를 찾았고 거리를 풍요롭게 했다.
성수는 낮이 더 화려한 곳이다. 파란 하늘과 햇살이 비치는 서울숲 옆에서 성수는 낮에 더 빛났다. 카페거리와 산뜻한 식당들은 가볍게 얹어진 복고 트렌드에 청량하게 올라간 현재 같았다.
반면 을지로는 밤에 더욱 그 진가를 발휘했다. 어둠이 내리면 휘황한 조명이 거리를 밝혔고 오밀조밀 모여있는 포차와 식당들은 우리를 홀렸다. 생기가 넘치다 못해 줄줄 흘러내렸다. 늘 시끌벅적했고 정겨웠다. 이런 을지로는 성수에 비해 진하고 깊은 과거에서 최신 트렌드를 스포이드로 몇 방울 떨어뜨린 것 같았다. 더 매니악하고 짙은 과거의 향이 났다.
그 많던 로컬을 누가 옮겼을까
덕분에 을지로는 서울을 대표하는 핫플레이스가 되었다. 청계천 옆, 공업소들이 즐비하던 거리에서 완전히 탈바꿈한 것이다. 숨어있는 노포를 찾아다니고 새로 생긴 맛집을 가는 재미가 쏠쏠하다. 로컬들이 넘쳐났던 그곳에는 이제 나와 같이 맛과 분위기를 찾아온 소비자들로 가득하다.
그렇다면 로컬들은 어디로 갔을까. 내가 마지막으로 을지로에 방문했을 때, 을지로를 찾은 대부분의 방문객이 나와 비슷한 세대들이었다. 거리는 활기를 얻었지만 정겨움을 차차 잃어가는지도 모르겠다.
외식경영에서 을지로는 분명 굵직한 족적을 남겼다. 물론 긍정적으로. 뉴트로라는 트렌드를 수면 위로 올려놓았고 구도심에서 또 하나의 거대한 상권을 형성했다. 발길이 끊이지 않고 새로운 매장들이 들어서며 거리가 활발해졌다. 을지로는 대단한 성취를 이루었다.
하지만 가끔 야외 테이블에서 치킨에 맥주를 먹으면서 앞 건물의 인쇄소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보면 기분이 묘해진다. 우리가 저들의 터전을 빼앗은 것만 같은 기분. 그 누구도 탓하지 않고 비난하지 않지만 나는 유독 그런 생각이 든다.
모두가 행복한 곳에서 생업이 이어지는 곳. 을지로는 핫플레이스이기도 하지만 여전히 인쇄소와 조명가게가 불을 밝히는 곳이기도 하다. 로컬들은 일을 마치고 어디서 회포를 풀까.
내 생각과 다르게 의외로 을지로의 핫한 가게의 단골이라는 우스운 상황일 수도 있지만 내가 잠시 눈을 돌리면 셔터를 내리고 어디론가 사라진다. 마치 골목이 고요해질 아침이 오기까지 잠시 숨으러 간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