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자무스
설 민
[ㄴㄱㅇㅅPRS302507LJW]
문자가 왔다. 무슨 암호 같았다. 장난이라고 여겨 무시했다.
세계적으로 번지고 있는 자무스 바이러스로 인해 도시가 봉쇄된 지 꼭 닷새가 되는 날이었다. 중국 헤이룽장 성 동북부의 작은 도시 자무스. 그곳 우리나라 기업에 근무하던 한 근로자가 여름휴가를 맞아 귀국하면서부터 사건이 터졌다. 우리나라도 바이러스 감염 지역이 되고 만 것이다. 하필이면 첫 감염 확진자가 나온 곳도 내가 거주하는 K시였다. 귀국한 근로자는 미미한 감기 증세로 처음 병원을 찾았으며 미열과 설사를 다스리는 약을 처방받고 귀가했지만 증세는 다음 날 급격히 악화됐다. 가슴 통증과 호흡곤란으로 다시 병원을 방문한 다음에야 감염 확진을 받았다. 즉시 병원이 봉쇄되고 근로자와의 밀접 접촉자들이 격리되었지만 상황은 벌써 걷잡을 수 없는 지경으로 치닫고 있었다. 근로자가 거주하는 아파트는 물론 그가 다녀간 슈퍼마켓, 주점, 커피숍 심지어는 그가 복권 한 장을 산 가게까지 속속 확진자가 발생했다. 단 사나흘 사이에 지역 집단 감염의 상황이 초래됐다.
K시 이외 지역이라고 해서 안전한 것은 아니었다. 귀국 때 근로자가 탔던 국적기의 승객들 중에서도 열일곱 명의 확진가가 나왔으며 그들 또한 이미 국내 각지에서 다양한 활동으로 숱한 시민들과 접촉한 때문이었다. 바이러스의 이동이 기민했음에도 불구하고 여느 때 마냥 방역당국의 대처는 느리고 허술했다. 우리나라가 자무스의 항로를 끊은 것이 중국 당국이 자무스 도시봉쇄 이후에 이루어졌음이 그 단적이 예다. 자무스 바이러스의 엄중함은 이전의 바이러스 감염과 비할 수 없는 전파력과 예상을 뛰어넘는 치사율에 있었다. 이는 공기전염이 가능했으며 5%를 넘는 치사율을 보였다. K시의 경우, 근로자의 첫 확진이 있은 이후 열흘 만에 372명의 확진자가 나왔으며 그중 19명의 환자가 사망했다.
K시 봉쇄령이 떨어진 것은 첫 확진 후 꼭 한 달만이었다. 그 사이 병자는 4천을 훌쩍 넘었고 사망자도 5백에 육박해 있었다. 뒤이어 M시, A시가 봉쇄됐다.
나는 도로가 은행나무 그늘에 서 있었다. 텅 빈 거리, 평소 차량이 물결치고 인파가 넘치던 중앙로 네거리 부근이 겨울 들판처럼 비어있었다. 주위의 신호등들마저 다 죽었다. 이 죽은 도시에 나 혼자 아직 숨을 쉬고 있는 듯싶었다. 가만있어도 온몸에 땀이 흘러내린다. 이런 더위 속에 마스크를 끼는 것 자체가 고역이다.
자무스. 자무스... 순간 흠칫 놀랐다. 나도 모르게 엉뚱한 단어 하나를 곱씹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입안에 굴리는 언어와 뇌리로 흘리는 말이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곤 더 놀랐다. 자무스, 잡아 묵어소, 자무스, 다 잡아 먹으소.... 송화강이 도시를 감싸 흘러 러시아로 빠져나간다던가. 중국 동북부 맨 끝에 있다는 국경도시. 러시아의 하바로프스크, 비로비잔이 가깝다는 인구 234만의 비옥한 흑토지. 도무지 중국의 지명 같지 않아서 일부러 인터넷을 검색해 본 일이 있다. 아니나 다를까 만주어에서 유래된 지명이라고 했다. 그 예전에 이곳에도 역참이 있었던 모양이다. 만주어 자무스는 ‘역의 관리가 머물던 곳’이란 뜻이란다. 지명치고 재미없다. 차라리 중국인들이 흔히 한다는 ‘태양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동쪽 끝의 새로운 땅’이란 말이 더 낫다. 우리나라 함경도 최북단에서 북쪽으로 400여 리밖에 되지 않는다. 겨울이면 영하 40도까지 떨어진다는 그 혹독한 땅에서 생겨난 바이러스는 도대체 어떤 꼴을 하고 있고 무슨 의도로 세계로 퍼져 나가는 것일까?
나는 심호흡을 하고 마침내 큰길을 건너기로 한다. 빛의 폭격. 햇살마저 섬뜩하다. 아스팔트가 뿜어 올리는 지열에 금세 숨이 막힌다. 오가는 차가 하나도 없건만 나는 또 버릇처럼 주위를 살핀다. 무거운 쇼핑백을 오른손으로 옮겨 들었다.
이상한 문자 메시지 다시 온 것도 그즈음이었다.
[ㄴㄱㅇㅅPRS302507LJW]
발신자의 전화번호가 나타나지 않았다. ㄴㄱㅇㅅ... 누구 없소?.. 더 희한한 것은 폭염 속의 내 머리 회전이었다. 처음 문자를 받았을 때와는 전혀 다른 반응이었다. 네 개의 자음 나열에서 단번에 문장 하나를 떠올렸던 것이다. 누구 없소? 그렇게 읽고 보니 그럴 싸했다. 정말 누군가 사람을 찾고 있단 말인가. 혹은 장난? 문득 먼 도시에 사는 남편을 떠올렸지만 그는 세상이 무너져도 이런 장난질을 못할 위인이었다. 고객들 중?... 그럴 턱이 없었다. 영문자와 숫자의 조합도 몇 차례 입안에 되뇌어 봤지만 감이 잡히질 않았다. 녭 둬, 미친 연놈들... 도시가 공황상태에 빠지면서 사람들도 점차 제정신을 잃어가는 것 같았다.
통행과 이동이 엄격히 통제되면서부터 팀원들마저 하나 둘 사무실을 떠났다. 제 집에 틀어박혀 꿈쩍을 않겠다는 직원도 많았다. 고객 만나기가 힘들고 소비마저 급격히 줄다 보니 내 한 달 수입도 반 토막이 되고 말았다. 이런 지경인데도 D시에서 하숙을 하고 있는 철없는 아들 녀석을 용돈을 올려달라는 성화만 부려댔다.
다시 가로수 그늘에 서서 숨을 골랐다. 비스킷 같은 과자류, 식용 캔류, 화장품류... 쇼핑백에는 주문자에게 전할 물품들이 들어 있었다. 드문 고객의 드문 주문이니 제 때 갖다 주아야 마땅하지만 하필 오늘 타이어가 찢어질게 뭐람. 마스크를 벗고 입가의 땀을 닦고 있을 때 휴대전화 벨이 울렸다. 수상한 문자를 띄운 위인임을 직감했다.
“야, 너 뭐야?”
통화버튼을 누르자마자 한 소리를 날렸다. 뚜욱- 바로 통화가 끊겼다. 낯선 전화번호였다. 두 번째 전화가 온 것은 내가 고객의 아파트 경비실에 도착했을 때였다. 전화번호가 좀 전의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고서도 나는 정중하게 음성을 고쳤다.
“여보세요? 디렉터 윤성애입니다.”
“혹시, 케이엠 디렉터 윤성애 씨인가요?”
중저음의 부드러운 남자 목소리였다.
“필요한 제품이 있어서 연락드렸어요. 청소 세제가 필요한데 좀 갖다 주실래요?”
남자는 직접 만나서 설명도 함께 듣고 싶다고 했다.
나는 남자에게 당신이 이상한 문자를 보냈느냐고 물어보려다가 그만두었다. 한시라도 빨리 수리점에서 차를 찾아오는 일이 급하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일하는 생필품 판매회사 KM에서도 영업회의는 물론 소모임까지 금지되었다. 시내의 직영 매장들도 모두 문을 닫았다. 고객의 전화 주문만 허용됐다. 주문을 받고 물품 전달을 하는 직원들은 반드시 시에서 발급한 통행증을 목에 걸어야만 했다. 생필품 판매, 전달자들에게만 부여된 통행증이었다. 이 통행증을 받기 위해서는 사전 건강검진을 통과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양곡부터 화장지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필품의 유통은 시 정부의 엄격한 통제를 받아야 했기에 회사의 영업실적은 바이러스 창궐 이전의 반 수준에도 미치지 못했다. 어디 사는 어떤 고객이 어떤 물품을 얼마나 샀느냐 하는 것을 세세히 당국에 보고해야 함으로써 직원들은 주문접수, 전달 판매 자체보다 보고 서류 작성에 더 많은 시간과 기운을 빼앗기고 있었다.
이렇듯 고객이 사라지고 실적이 급감하는 때에 물품과 함께 고객 스스로 대면 설명을 요청하는 주문을 받은 일은 가뭄 속에 단비를 맞는 행운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그러나 모든 행운은 불운을 등지고 있다는 말도 있다. 그렇다. 오랜만에 직접 고객을 만난다는 설렘이 있는 반면 바이러스에 대한 두려움은 나도 온전히 지우질 못한다.
남자의 주문은 허튼수작이 아니었다. 제 주소를 적은 문자를 보내왔던 것이다. 타이어 교체가 끝났다는 정비소의 전화를 받은 직후였다. 3시까지 와 주면 좋겠다는 붙임 말이 있었다. 메시지를 확인하던 나는 푸흐흐, 혼자 웃음을 흘렸다. 파랑새 아파트 302동 507호 이진우. 남자의 주소와 이름이었다. 암호처럼 보내온 PRS302507LJW의 정체가 그렇게 손쉽게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나는 새 전화번호를 저장하며 이름 칸에다 [웃긴 사내]라고 적었다.
자동차에서 내리기 전 거울을 보며 화장을 고쳤다. 땀으로 얼룩진 파운데이션을 고르게 펴 바르고 립스틱을 다시 칠했다. 마무리로 티슈를 입에 물었다 떼었다. 처음 만나는 고객에게는 더 신중을 기해야 했다. 부스스해진 파마머리를 손으로 가라앉혔다. 물티슈로 구두를 닦았다. 차에서 내려 제품이 들어있는 쇼핑백과 소비자에게 줄 책자를 챙겼다.
이 일을 해온 것이 하루 이틀이 아니지만 언제나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는 긴장이 되었다. 마스크를 썼다.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검은 마스크에 선글라스를 낀 건장한 남자가 다가왔다. <방역> 완장을 팔에 두르고 있었다. 손에 든 책자와 쇼핑백부터 훑어본 그가 물었다.
“무슨 일로 오셨나요? 통행증은?”
아파트 자치대원 같았다.
“생필품 전달예요.”
나는 무심한 태도로 걸고 있던 통행증을 그의 코앞으로 밀어 보였다.
“열 체크 좀 하겠습니다.”
남자 또한 이런 일이 이력이 났는지 기계적으로 비접촉 체온계를 내 이마 쪽에 댔다.
“덥죠?”
그가 나 대신 5층 버튼을 눌러 주며 뜻 없이 한 마디 했지만 나는 대꾸를 않았다. 복도식 아파트였다. 507호. 나는 호흡을 가다듬고 헛기침을 했다. 벨을 눌렀는데 안에서 기척이 없었다. 한 번 더 누르려는데 문이 열렸다. 젊은 남자였다. 도어 핸들을 쥔 채 그가 나를 바라봤다. 전혀 감정이 실리지 않은 눈빛. 오랜만에 마스크를 하지 않은 남자를 보는 셈이었다.
“안녕하세요? 윤성애라고 합니다.”
내가 먼저 명함을 건넸다.
“아, 예. 들어오세요.”
흘러내린 앞머리를 한 손으로 쓸어 올리며 남자가 비로소 웃음을 보였다. 헐렁한 회색 운동복 바지에 하얀색 반팔 면 티셔츠를 입었다. 그가 맨발로 현관에 나왔다는 사실은 내가 그를 뒤 따라 실내에 들어갈 때 알았다.
“검문은 잘 통과하셨나 보네요. 오며 가며 엄청 귀찮게 하던데.”
머리카락이 거의 눈과 귀를 덮는 덥수룩한 스타일이었지만 목 뒤에는 컬이 살아있었다. 지저분할 수 있는 머리카락을 자연스럽게 연출한 남자였다. 여자도 어울리기 어려운 헤어스타일인데 그에겐 그것이 자연스러워 보였다. 코 밑과 턱에 수염이 거뭇거뭇 나 있지만 한눈에 봐도 눈, 코, 입술의 선이 고왔다.
“신혼이세요?”
내가 물었다. 딱 봐도 남자 혼자 살 것 같지 않은 깨끗하고 정리정돈이 잘 된 거실이었다.
“아니요. 저 혼자 살아요.”
“정말요? 집이 참 깨끗하네요.”
“칭찬이시죠?”
ㅁ자 형태의 모던한 식탁을 가리키며 남자가 의자에 앉으라고 했다. 전화기의 목소리보다 더 차분하고 느린 말투였는데 묘한 여유가 있었다. 직접 식탁 의자를 꺼내준 남자가 또 쏠린 머리카락을 손으로 빗어 넘겼다.
“집에 밀크 티 있는데, 어때요?”
참 오랜만에 소비자 집에서 차를 대접받는다는 생각에 나는 냉큼 좋다고 했다. 그가 그릇들이 정갈하게 정돈돼 있는 찬장에서 은색 박스 하나를 꺼냈다.
“제가 로열 커튼 커피 잔을 좋아하거든요. 옥색이 깃든 청록색 빛이 예뻐서 샀어요. 그동안 같이 마실 사람이 없어서 모셔만 놨었는데, 오늘 첫 개시네요.”
그가 말하는 브랜드 이름은 내가 처음 들어보는 것이었다. 혼잣말하듯 하면서도 드문드문 쉬어가는 그의 말투가 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의 뒷모습을 보았다. 제법 키가 크고 마른 체구였지만 봉긋한 엉덩이가 도드라졌다. 나는 제품과 카탈로그를 식탁에 올려놓고 그를 기다렸다. 파스텔 톤의 밝은 거실과 주방은 작고 아늑한 동네 카페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인덕션 위의 스테인리스 주전자가 물을 끓이는 동안 그는 박스에서 꺼낸 커피 잔을 식기세정제로 천천히 닦았다. 키친타월로 정성스레 물기를 없앴다.
“너무 예쁘지 않아요?”
그가 고개를 살짝 돌렸다. 오뚝한 콧날과 턱 선이 도드라져 보였다. 잔 하나를 들어 나에게 보여주었다. 주방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에 눈이 부셨다. 밀크티 티백을 잔에 넣고 물을 붓는 과정 하나하나에도 절대 급할 것이 없었다.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쟁반을 조심조심 들고 오는 그를 보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커피 잔 하나에도 행복감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그동안 까맣게 잊고 살았다. 커피 잔은커녕 행복이란 말 자체를 깡그리 잊고 살은 듯싶다. 순간 괜스레 코끝이 찡해지며 눈물이 나려 했다. 뽀얗게 우러난 밀크티를 마셨다. 부드럽고 달콤하고... 뒷맛이 쌉쌀한 차를 마시자 긴장했던 마음이 풀어지면서 전신이 편안해졌다.
“회원가입을 해야 성애 씨한테 더 좋은 거 맞죠? 제가 공부 좀 했죠.”
38세의 남자 이진우는 자발적으로 회원가입까지 해줘서 한층 더 나를 기분 좋게 해 주었다. 주로 재택근무를 하는 편집 디자이너라고 했다. 프레젠테이션 대행이나 유튜브 업로드 등 남들이 좀 더 잘 꾸미고 싶지만 재주가 달려서 또 귀찮아서 하지 못하는 일을 대신해 주고 보수를 받는다고 했다.
“이 제품은 처음 써보시는 건가요?”
내가 물었다.
“그렇죠. 다른 건 꼼꼼하게 따져보고 구매하는데 세제 종류는 귀찮아서 그냥 눈에 띄는 거 주문해서 썼거든요. 그렇지만 요즘은 자무스가 하도 설쳐대서 좀 좋은 제품 써볼까 하고요.”
“저를 어떻게 아셨어요?”
“좋은 제품을 검색해 보니 케이엠 제품이 가장 많이 나오대요. 그래서 본사로 전화했었지요. 제품을 사용해보고 싶다니까 연락처 셋을 알려주더군요. 여기서 가까운 데 사는 사업자들이라면서... 그 사람들의 인스타를 찾아봤어요. 거기서 성애 씨를 만났죠.”
“그러셨군요. 저한테 제일 먼저 연락하셨나 보네요?”
“아니요. 다른 사람한테도 다 신호를 보냈는데 감감무소식이었고 성애 씨 한 분만 깜박깜박 등대 불빛을 비춰 주었지요.”
“신호요? 거기 누구 없소, 여기는 파랑새, 여기는 파랑새... 그게 진우 씨 SOS였어요?”
“사람이 하도 그리워서 장난 좀 쳤어요. 요즘 통 얼굴 보고 이야기할 사람이 없어서.”
그가 장난스럽게 말을 이었다.
“사실은 내 핸드폰에 저장되어 있는 사람들 모두한테 다 보내 봤어요. 누가 나를 찾아주나 보려고요.”
진우가 한 모금 차를 들이켰다.
"누구 하나 답신이 없는 것 있죠?”
밀크티를 삼키는데 순간 내 목이 뻐근해졌다. 나 또한 많은 사람들을 알고 있다 여겼고 그들과 어울려 살고 있는 데도 실은 마음 터놓을 사람 한 명이 없었다.
“재미있어요. 자무스가 쳐들어오기 전까지 우리 모두가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서로서로 소통하며 살고 있다고 여겼죠. 그런데 이게 뭐예요. 바이러스가 한 번 휩쓸고 나니 그 견고해 보이던 공동체도 한순간에 무너지고 말잖아요. 자의든 타의든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져 큰 바다의 섬처럼 고립되고 말았어요. 섬과 섬을 이어주는 통로도 없어요. 더 무서운 것은 사람들이 저마다 홀로 무인도에 표류해 살면서도 아직까지 자신이 고립돼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점이에요. 서로서로 소리 지르고 불꽃을 올리면서 ‘여기를 봐주세요.’ 해야 하는데도 그러기는커녕 되레 제 섬의 빗장을 더욱 굳게 하고선 누구도 얼씬 못하게 한다는 점이에요. 혼자 그렇게 있으니 우선은 안전한 것 같죠. 아무 탈 없이 몇 백 년을 그렇게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죠? 허허. 아뇨 서서히 그렇게 스스로 죽어가고 있는 걸요.”
“그러고 보면 진우 씨도 나도 각각이 섬이군요. 요행 제가 진우 씨의 신호를 받았고 제가 횃불을 들고 바다를 건너왔고...”
나도 그의 말을 시늉 내어 답했다. 그렇게 봐서 그럴까, 문득 진우를 무인도에서 만난 남자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데모 통을 꺼냈다. 상품 설명은 제대로 해주고 떠나야 할 것 같았다. 진우가 내 옆으로 자리를 옮겨 앉았다. 그가 내 귓가에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파랑새아파트에 진짜 파랑새 한 마리가 날아오셨어요.”
내가 멋쩍어하자 그가 머리를 크게 뒤로 젖히며 웃었다. 한껏 웃으니 입이 시원스럽게 커 보였다.
5시가 넘어 그 집을 나왔다. 무심코 아파트를 올려다보았는데 베란다에 나선 진우가 두어 번 어색하게 손을 흔들었다. 맞장구를 쳐줄 수 없기에 나는 고개만 까딱 숙여 보이곤 걸음을 재촉했다.
다음날 오전 10시경 [웃긴 남자]한테서 또 전화가 왔다. 어제 받은 세제 용기의 뚜껑이 도통 열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다시 방문 약속을 잡았다.
진우에게 가지 전, 먹거리부터 사두려고 슈퍼에 들렀다. 이전의 대형마켓들은 백화점과 마찬가지로 시 정부에 접수되어 10부제 물품판매가 시행되고 있었다. 주민등록번호 끝자리가 1인 사람은 1일, 11일, 21일, 끝자리가 5인 사람은 5일, 15일, 25일만 마켓에서 직접 생필품을 구입할 수 있었다. 한 사람이 구입할 수 있는 물량도 한정돼 있었다. 이러한 강제조치로 사재기와 절도, 약탈 등은 많이 줄어들었지만 일상생활의 불편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장바구니 하나만 들고 매대 사이를 걷던 나는 한 남자와 어깨를 부딪쳤다. 미안합니다, 내 잘못이 아니었음에도 얼른 사과를 했는데 남자가 괜찮다고 손을 내저었다. 콧수염을 기른 50대였다. 괜히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부침가루 한 봉지를 사기 위해 창고 앞 코너를 돌던 때였다. 누군가가 갑자기 내 허리를 껴안으며 입을 틀어막았다. 저항할 겨를도 없었다. 순식간에 창고 안 통로로 끌려 들어갔다. 완강한 힘에 이끌려 벽면에 붙여진 다음에야 나는 상대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아까 그 사내, 콧수염이었다.
“맛있게 생겼어. 아줌마 나한테 한 번 줘”
투덜거리듯 지껄이며 그가 내 젖가슴을 더듬었다. 사정없는 손길이었다. 내 마스크는 언제 벗겨졌을까. 사내의 두꺼운 입술에 내 입술에 덮쳐 왔다. 고개를 젖히려 안간힘을 썼지만 그의 손힘을 뿌리칠 수 없었다. 손을 뻗어 매대를 더듬었다. 잡히는 것이 있었다. 식용수병인 듯싶었다. 사내의 손길이 내 사타구니 쪽으로 내려간다 싶은 순간 그걸로 머리통을 갈겼다. 어이쿠, 소리 내며 그 자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여전한 폭염이었다. 다시 텅 빈 거리를 걷고 있는데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마스크를 쓰지 않았다고 경찰한테 딱지까지 떼였다.
머리꼭대기부터 발끝까지 씻느라고 시간이 늦어졌다. 속도를 내어 차를 달렸음에도 불구하고 약속시간에 늦고 말았다. 이미 5분이 지난 후였다. 진우의 아파트에서 두 차례 검문을 당했다.
엘리베이터를 타러 가는데 항상 문제를 일으키는 오른쪽 발목이 삐끗했다. 시큰거리며 아팠다. 무릎까지 아파왔다. 앞으로는 단화를 신고 다녀야겠다며 발목을 문질렀다. 헐레벌떡 뛰어가 벨을 누르는 순간 아차 싶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마스크를 벗고 얼굴 상태를 점검한다고 한 것을, 그 짧은 시간에 잊어버리고 만 것이었다. 후회와 동시에 현관문이 열렸다. 진우는 어제보다는 더 단정한 차림에 볼륨 있는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었다. 갓 외출에서 돌아온 차림 같았다. 검정 셔츠 때문인가. 어제는 보지 못했던 가는 목걸이가 유독 눈에 띄었다.
“늦었어요. 죄송해요. 검문이 더 심해지대요.”
“주민들도 그런데 오죽하겠어요. 저도 막 집에 왔어요. 원두 사가지고 왔거든요. 오늘은 같이 커피 마셔요.”
진우가 갓 볶아온 원두가 담긴 종이봉투를 들어 올렸다.
“덥죠? 땀 좀 봐. 같이 샤워할래요? 나도 외출하고 와서 씻고 싶은데.”
내가 놀라 쳐다보자 그가 얼른 손사래를 쳤다.
“아이, 농담이에요. 손부터 씻고 와요. 마스크도 벗고.”
거울을 보았다. 볼의 마스크 자국이 마치 주름같이 자글거렸다. 이제는 한번 얼굴에 배긴 자국이 오래가는 나이라는 것을 확인시키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볼에 바람을 빵빵하게 채워 봐도 금세 펴질 리가 없었다. 욕실에서 손을 닦고 나왔다. 원두커피를 갈았는지 진하고 향긋한 향기가 주방에 가득했다. 오늘의 케냐커피는 두 번째 애장품 잔에다 마시자고 했다. 완충비닐에 꽁꽁 싸놓은 머그잔을 꺼냈다. 깔끔하게 테이프를 제거하고 천천히 비닐을 풀어헤치는 그의 손놀림을 나는 홀린 듯이 보고 있었다. 진한 갈색 잔이 나왔다. 컵의 전체적인 모양이 원통형이 아닌 물방울 같았다. 또 한 개는 약간 어두운 인디언 핑크색이었는데 두 색깔의 조화가 어울리는 듯 아닌 듯 오묘했다. 컵의 밑 부분을 손으로 감싼 진우가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는 나를 바라보며 속삭이듯 말했다.
“특히 이 부분은 가슴을 만지는 느낌이랄까, 그래서 좋아요.”
“엄청 노골적이고 응큼하군요.”
내가 가볍게 쏘아붙이자 그가 얼른 고개를 저었다.
“오랜만에 사람하고 이야기하니 너무 좋아서 그래요. 성애 씨 온다니까 소풍 가기 전날처럼 마음이 들뜨는 거 있죠? 어제 성애 씨 가고 난 뒤에 한참 동안이나 허전해서 혼났어요. 일도 손에 안 잡히고... 제 하는 일이 원래 혼자서 하는 거라 사람들과 어울리는 일도 없지만 막상 도시를 바이러스한테 빼앗기고 나니 사람이 그리워 못 견디는 거 있죠? 사실 저도 여기로 이사 온 지 얼마 안 돼서 아는 사람도 별로 없어요. 오죽하면 커피잔도 이제 오픈하겠어요?”
“그래서 제가 왔잖아요?”
문득 그에게 마켓에서 있었던 일을 말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혼자만 당한 일이 아님은 나도 잘 알고 있었다. 바이러스에게 도시가 점령당한 뒤부터, 바이러스보다 더 무서운 것이 사람이었다. 의료시스템이 무너진 지도 벌써 오래됐다. 호텔과 대학 기숙사까지 의료시설로 변경되었지만 환자를 감당할 의료진이 없었다. 교외의 참치 냉동창고가 시체 보관소로 바뀌었다는 소문도 공공연하게 돌았다.
봉쇄된 도시를 몰래 빠져나가려고 하는 자들이 줄지 않고 약탈, 강간 같은 강력사건이 연이어지는 가운데 치안 유지를 위해 머잖아 군이 진입할 것이란 소문마저 파다했다. 중앙정부가 몇몇 도시에 대한 계엄령 혹은 위수령을 발동을 검토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그래서 퍼져 나갔다.
“절망적인 상황이지만 성애 씨와 저는 아직 일을 할 수 있음을 다행이라 여겨야 되겠지요.”
진우의 말이었다. 외출이 제한된 시민들이 종일 집에서 유튜브나 인터넷을 찾고, 학교들이 온라인 수업을 하고 회사들까지 대부분 재택근무를 하는 처지라 진우가 하는 일에는 큰 타격이 없는 것 같았다.
덥지만 따뜻하게 마시는 커피가 맛있다며 그가 물을 끓였다. 고이 접었다 편 여과지에 갈아놓은 커피를 넣어 내리는 모습이 평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진우가 한 것처럼 커피 잔의 바닥을 손으로 감싸며 물었다. 화제를 돌리고 싶었다.
“친구도 만나고 연애도 할 나이인데 그동안 왜 집에만 있었어요?”
“어릴 때는 운동도 좋아하고 친구들도 만나고 했는데, 점점 사람 만나기가 싫다 보니 이렇게 되네요. 다른 사람들이 내가 만들어 준 자료로 멋지게 프레젠테이션을 하고 활기차고 재미나게 유튜브 찍은 것을 보면서 그냥 대리만족하는 것 같아요.”
진우가 잔에 커피를 따라주며 말을 이었다.
“나름 친구들이나 여자들한테 인기가 있었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런 때가 닥치니 먼저 연락하고 걱정해 주는 사람이 없네요.”
그가 푸푸, 소리 내어 웃었다.
고개를 숙였다. 그의 머리카락이 또 한쪽 눈으로 흘러내렸다. 진우의 얼굴에 그늘이 생겼다. 커피를 반쯤 마셨을 때, 잘 안 따진다는 뚜껑 여는 법을 설명해 주었다.
핸드폰의 문자를 확인하는 때 진우가 말했다.
“나, 더 주문할 게 있어요.”
어제 두고 간 카탈로그를 펼치더니 진우가 옆으로 다가왔다. 관심이 있는 제품에 밑줄까지 쳐있었다. 이것들의 사용감이 어떠냐고 물었다.
“스킨 하고 로션이 떨어졌어요. 남자 거 말고 여자들이 쓰는 제품으로 추천해 줘요.”
내가 새삼 진우의 얼굴을 살폈다. 피부상태를 잠시 보고 책자를 넘겼다.
“진우 씨는 피부톤이나 결이 좋아 보이니 이 제품이 좋겠어요. 남자들이 기본적으로 여자들보다 피부가 두껍고 피지가 많아요. 또 잦은 면도로 수분공급이 중요하거든요.”
책자를 손으로 가리키며 설명을 하는데 아무 대꾸가 없었다. 고개를 돌려 진우를 바라봤다. 진우가 기습적으로 입을 맞췄다. 내가 놀라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를 밀쳤다.
“나랑 자면 안 돼요?”
진우가 나를 부둥켜안았다. 키스를 하려고 했다. 나는 한 번 더 진우를 힘껏 밀쳤다. 휘청거리며 뒤로 물러선 진우가 부엌 싱크대 쪽으로 걸어가며 머리카락을 쥐어 잡았다.
어제의 일이 불편했지만, 다음날 내가 먼저 전화를 했다. 마음이 두근거렸다. 전화를 받지 않았다. 차라리 잘 되었다고 여겼다. 시청에 들러 통행증을 다시 발급받았다. 열흘마다 갱신해야 했는데 이를 위해선 또 건강검증과 한 시간의 화상 교육이 필요했다.
며칠 사이 내 통행 가능 구역도 훨씬 좁혀졌다. 어제까지만 해도 통행이 가능했던 진우의 아파트를 나는 오늘부터 갈 수가 없었다. 이렇게 다시 진우와 내가 각각의 섬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교육을 마치고 나오니 진우의 전화가 와 있었다.
“제가 통행증 재발급받느라 전화를 못 받았네요.”
그에게 작별 인사쯤은 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오늘 화장품 갖다 줄 수 있죠?”
그는 나의 사정을 알지 못했다. 구차하지만 설명을 해야 했다.
“제 통행구역에 변동이 생겼어요. 오늘부터 저는 길 건너 파랑새 아파트엔 가질 못해요. 저 대신 그 아파트 출입이 가능한 직원에게 말해놓을게요. 아니면 택배로 보내도 될까요?”
“무슨 말이에요? 성애 씨 아니면 안 돼요. 지금 빨리 갖다 줘요.”
흥분한 목소리였다. 난처했지만 일단은 진우의 아파트로 가 보기로 했다. 광장 초입에서 투명 플라스틱으로 얼굴을 가린 경찰이 내 차를 세웠다.
“파랑새아파트에 가려고 해요. 다급한 물품 전달이 있어요.”
통행증을 살핀 경찰이 고개를 저었다.
“허가 외 지역이네요. 안 됩니다.”
“물건만 문 앞에 놓고 얼른 나올게요.”
경찰에게 사정을 했다. 때마침 대학병원 근처에서 폭음이 터지고 검은 연기가 치솟았다. 경찰이 황급히 그쪽으로 차를 몰고 가는 것을 보고 나도 엑셀레이터를 밟았다. 아파트 정문을 들어서다가 이번에는 자치대의 검문을 당했다.
“안됩니다.”
통행증을 본 그도 경찰과 똑같은 소리를 했다.
“한 번만 봐줘요. 얼른 갔다 갈게요.”
창문을 내려 음료수 한 병을 건네주었다.
“겨우 이걸로...”
음흉하게 웃던 사내가 느닷없이 내 블라우스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가슴을 움켜쥐었다 놓았다. 순간적인 행동이라 막을 틈조차 없었다.
“이 나쁜 놈!”
소리를 질렀더니 그가 픽 웃으며 들어가란 시늉을 했다. 불쾌한 마음으로 엘리베이터를 탔다. 이번에는 절대 집안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몇 번이나 했다. 현관문고리에 쇼핑백을 걸고는 전화를 했다. 벨소리가 안에서 울렸지만 받지 않았다.
“왜 벨 안 누르고 전화해요?”
바로 문이 열리면서 진우가 내 손을 잡아끌었다. 금세 현관문 잠금 소리가 등 뒤에서 났다.
“오늘은 그냥 제품만 드리고 갈게요. 화장품 사용은 별 다를 게 없어요. 그리고 저는 지금 여기 있을 수가 없어요. 여기까지도 간신히 왔다고요.”
내가 다급하게 말했다.
“내가 불편해요? 나 봐요!”
앞을 막아 선 진우의 말투가 어제와는 달리 퉁명스러웠다. 떼쓰는 어린아이 같기도 했다.
“불편해요. 그냥 제품만 받으시죠. 이 손 놓고요.”
나도 지지 않고 대꾸했다. 진우가 위압적으로 내 앞에 버텨 섰다. 차마 그를 쳐다볼 수 없었다.
“오늘부터 저는 여기 못 온 다구요. 그만 돌아갈게요.”
“매일매일 바뀌는 법이 그렇게 엄중해요? 나 보라고요. 고개 들어요!”
애원하듯 말하는 진우가 다리를 벌려 자세를 낮추더니 내 얼굴 가까이에 대고 말했다. 벽 쪽으로 나를 몰아세웠다. 계속 외면하자 눈을 맞추던 진우가 강제로 키스를 했다. 그의 가슴을 치며 밀어냈다. 손을 제압했다. 다시 키스를 했다. 볼과 목을 애무하는 진우를 피해 고개를 돌렸다. 진우의 가슴에 귀가 닿았다. 심장소리가 크게 들렸다. 진우가 다시 한번 키스를 했다. 숨이 멎을 것같이 다급하고 깊었다. 휘청거리자 진우가 날아 안아 들었다. 거실을 지나 방문을 열고 들어가는 동안에도 키스를 멈추지 않았다. 거친 숨을 몰아쉬던 진우가 숨을 고르며 천천히 말했다.
“당신, 나랑 있으면 안 돼? 나, 당신 만지고 싶어.”
나를 침대 위로 쓰러뜨렸다. 내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나랑 씹해요.”
그가 셔츠를 벗었다. 부드러운 진우의 애무. 내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몸이 떨렸다. 남편과 이혼한 이후로 오랫동안 해보지 않았던 관계라 더 당혹스러웠다. 숨 가쁘게 애무하면서도 그는 말을 끊지 않았다.
“여자를 안아보는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죽을 것 같아.”
그의 손길은 조심스럽고도 부드럽게 나의 몸속을 드나들었다. 그의 손아귀에 잡힌 젖가슴이 커지고 꼭지가 섰다. 진우의 성기가 부풀어 올랐다. 이윽고 그것이 내 치골을 지긋하게 누르며 삽입을 했다. 진우의 뭉뚝한 성기가 몸속을 밀고 들어오는 순간 움찔했다. 내가 양손으로 그의 가슴을 밀어냈다. 찢어지는 것 같은 통증과 함께 전율이 흘렀다. 온몸에 긴장감이 풀렸다. 편안해졌다. 진우가 나의 입술을 질근거렸다. 촉촉한 촉감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귀를 애무하며 진우가 무슨 말인가를 하려 했으나, 바로 몸에서 떨어지며 나의 배 위에 사정을 했다. 나에게 티슈를 주었다. 바로 누우며 진우가 한숨을 쉬었다.
“아쉽다. 더 잘할 수 있었는데.”
내가 일어서려고 하자, 진우가 못 움직이게 팔로 등을 감쌌다.
“그냥 있어요. 나 더 보고 싶어. 엎드려 있지 말고 바로 누우면 안 될까?”
진우가 느리지만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 나의 등부터 엉덩이까지를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그가 물었다.
“당신, 자무스가 어딘지 알아?”
옆으로 누우며 진우를 바라봤다. 그가 내 가슴을 갈색 물방울 모양의 컵을 감싸듯이 어루만졌다.
“동쪽 끝의 새로운 땅, 행복의 도시래. 아이러니컬하지? 우리 거기 가자.”
내가 그의 얼굴을 덮고 있는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쓸어 올려주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해주고 싶었던 일이었다. 마주 보며 이마와 눈썹, 눈과 콧날, 인중과 도톰한 입술을 손가락으로 만졌다. 진우가 다시 나를 껴안았다. 이번에는 내가 먼저 키스를 했다. 이마와 눈을 차례로 입 맞췄다. 신음하듯 그가 좋다는 말을 반복했다. 그이 차례가 되자 그는 나의 목덜미와 쇄골, 가슴과 배까지 입술로 애무했다. 다시 한번 몸을 섞었다. 내게 안긴 진우가 울먹였다. 내가 위로 갈게, 진우를 앉혀놓고 내가 그의 허벅지를 올라탔다. 교합 자세가 되었다. 둘이서 함께 거칠고 긴박하게 몸을 움직였다. 마침내 진우가 뒬 몸을 젖히며 큰 숨을 내뱉었다.
“자기 정말 끝내준다. 미치겠어.”
몸을 밀치려 해도 한동안 안고 놓아주지 않던 진우가 침대 위에 바로 누웠다. 진우의 눈을 의식하며 옷을 입었다. 화장을 수정했다. 그를 봤다. 계속 알몸으로 누워있던 진우가 이불을 몸에 감싸고 옆으로 누우며 머리카락을 손목에 차고 있던 고무줄로 묶었다. 이마가 시원하게 드러나는 듯했지만 이내 잔머리가 흘러내렸다.
“안 가면 안 돼? 한 번 더 하자.”
그가 졸랐지만 나는 아무런 대답도 않은 채 밖으로 나왔다.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 집 비밀번호 당신 핸드폰 뒷자리로 바꿔놓을게.”
현관문을 닫았다. 후텁지근하던 공기가 저녁시간이 되자 선듯하게 느껴졌다.
다음날은 약간의 두통과 어지러운 증세가 있어 집에 있었다. 진우에게서 전화가 왔다. 받지 않았다. 후끈 달아오르는 얼굴, 설레다 못해 두근거리는 마음에 그의 전화번호를 찾아보기는 했지만 통화는 누르지 않았다. 할 수가 없었다. 뻐근한 몸과 목의 키스마크를 보면서 진우를 떠올렸다. 몸서리를 쳤다. 진우에게서 계속 전화가 왔다. 받지 않았다.
[또 하고 싶어.]
[전화 좀 받아!]
연이어 오는 진우의 전화와 문자를 무시했다.
저녁이 되자 또 문자가 왔다.
[나 좀 이상해.]
[나 아파.]
나는 답을 하지 않았다. 혼자서 소주를 마셨다. 밤새 드라마를 보면서 히죽거렸다. 분명 로맨틱 코미디이고 상황이 웃긴데 설움이 북받쳤다. 이혼 후, 환상만 남는 드라마를 보지 않았었다. 밤새 16부작 드라마를 연속해서 봤다. 보면서 울고 웃었다. 눈이 충혈되었다. 퉁퉁 부어올랐다.
다음날, 딱히 목적지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더 이상 집안에 혼자 있기 싫어서 나왔을 뿐이었다. 갈 곳은 없었다.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 빼고는 크게 아픈 것도 아니었기에 차 안에서 고객들에게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고 인사를 나누었다. 바람이 일자 거리에 휴지며 쓰레기들이 굴러다녔다. 돌아다니는 사람들도 별로 없는 데다 바람까지 부니 황량하기 짝이 없었다. 바람에 날린 검정 비닐이 자동차 앞 유리를 덮었다. 흠칫 놀랐다. 불현듯 진우가 보고 싶었다. 아프다는 그가 걱정되었다. 두려웠다.
며칠을 미루다가 전화를 걸었다. 파랑새아파트 전체가 봉쇄될 수 있다는 속보를 들은 후였다. 전화를 받지 않았다. 핸드폰으로 뉴스를 보는데 전화가 왔다. 진우였다. 힘없는 목소리였다.
“나 감염된 것 같아. 오지 마. 혹시 내 문자 보고 올까 봐.”
곧 전화가 끊어졌다. 망설이다 내가 전화를 걸었다. 두세 번을 반복해서 걸자 전원이 꺼져있다는 메시지가 들렸다.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다급해졌다. 바로 진우의 집으로 향했다.
다른 때와는 달리 이상하리만큼 동네가 조용했다. 검문하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대신 상가 앞에 세워 둔 트럭에서 너 댓 명의 남자들이 짐을 내리고 있었다. 보급품 상자같이 보였다. 차를 멀찌감치 주차하고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아파트 입구로 들어섰다. 더욱 을씨년스러워진 아파트 단지 앞 상가를 지나가는데 방호복 입은 한 남자가 나를 보더니 손짓을 했다. 못 본척하며 진우의 집 쪽으로 뛰어갔다. 그에게로 가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또 오른쪽 발목을 삐끗했다. 이제 힐을 신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진우의 집 앞에 섰다. 벨을 눌렀다. 기척이 없었다. 다시 눌렀다. 눈물이 났다. 또 누르려다가 핸드폰 뒷자리로 비번을 바꿔놓겠다는 말이 생각나서 번호를 눌러보았다. 문이 열렸다. 커튼이 쳐있고 형광등이 꺼져있어서 좀 어둡기는 했지만 정갈한 분위기가 흑백 사진을 보는 것 같았다. 진우를 부르며 거실로 들어갔다. 몸이 떨려 잠시 주저앉았다. 방문이 닫혀있었다. 노크를 해도 대답이 없었다. 호흡을 가다듬고 문을 열자 진우가 누워있는 게 보였다.
“괜찮아?”
입술이 말라 허옇게 부르트고 며칠 전보다 볼이 더 홀쭉해있었다. 그가 나를 알아본 것 같았다. 그의 얼굴에 반가움인지 두려움인지 모를 빛이 살짝 비쳤다.
“오지 말라니까.”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가 깊은숨을 내쉬었다.
“미안해. 내가 미안해.”
내가 그를 감싸 안았다. 뜨거운 체온이 내 몸으로 전해 왔다. 또 눈물이 났다. 진우의 눈시울도 붉어졌다. 목이 늘어난 헐렁한 면 티셔츠를 입은 그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가는 목걸이가 그의 쇄골 위에서 반짝거렸다. 입을 삐죽거렸다. 물을 찾는 것 같았다. 거실로 나가 냉장고를 열었다. 음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생수 두 통이 전부였다. 찬물을 조금 데웠다. 물을 주기 전에 젖은 수건으로 입술을 적셨다. 며칠 동안 아무것도 안 먹은 모양이었다. 몸을 일으킨 뒤 수저로 물을 조금씩 흘려 넣어 주었다.
“이제 살겠다. 당신 보니까. 나 좀 일으켜줘. 답답해.”
진우가 나의 부축을 받아 거실로 나왔다. 그를 소파에 앉혔다. 환기를 위해 베란다로 나섰는데 소독차가 지나가는 게 보였다. 무슨 구경거리가 있는 양 진우도 구부정한 자세로 베란다에 나왔다. 휘청거리는 그를 부축했다.
“군대가 들어온대. 섬들끼리도 더욱 아득히 멀어질 수밖에...”
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누가 그래?”
“들었어. 오전에 방송에 나왔어”
“그럼 어떻게 돼”
“총으로 바이러스를 쏴 죽이겠지 뭐”
그가 또 푸푸 웃었다.
다시 먼 데서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말 그대로 햇빛 쏟아지는 거리엔 개미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우리 한 번 더 하면 안 돼?”
진우가 웃음 끝에 말했다.
“죽으려고?”
마음 같아서는 나도 그와 한 번 더 하고 싶었다.
환시 같았다. 개미새끼 한 마리 없던 도로에 개미 떼의 행렬처럼 차량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꼬리에 꼬리를 문 군용 트럭과 장갑차. 탱크도 있었다.
커튼을 닫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