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들이

단편소설

by 설민

나들이



설민


“엄마, 준비 다 되셨어요?”

자동차 뒷 자석에서 장난감 가지고 티격태격하는 두 아들들에게 조용히 하라며 버럭 소리를 지른 나는 한숨을 내쉬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곧바로 이어폰을 낀 내가 엄마에게 전화를 건 것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유행가가 끝나서 전원을 끈 후였다.

운전이 서투니 동행하기를 부탁했지만 선약이 있다며 일언제하에 거절하는 남편. 일주일 전 새 차를 사준 고마운 마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남편에게 야속하고 서운한 마음이 더 커졌다. 아픈 엄마를 두어 달이라도 집에서 모시고 싶다고 해도 대꾸가 건성인 것도 모자라, 장모 소원풀이 해드리면 안 되냐는 말에도 꿈쩍하지 않았다. 다른 것보다 차 사준 것이 할 도리를 다한 것인 양 하는 남편의 태도가 문제였다. 글자 그대로 나의 상황과는 상관없는 남의 편 같았다. 또 오늘 하루 엄마와 아이들의 안위가 내 손안에 달려있다는 극한 생각까지 다다르자 더욱 신경이 예민해졌다.

이틀 뒤인 삼일절에 안동에 가자는 엄마의 전화. 겨울 내내 봄이 되면 가고 싶은 곳이 있다고 노래를 불렀지만 이렇게 느닷없을 줄은 몰랐다. 나의 봄은 아직 오지 않았다. 아직은 춥다고 만류도 해 보았지만 나는 관심도 없는, 채소를 키우는 책이나 식물도감 같은 것을 사달라고 부탁하면서부터는 더 가고 싶어 했다. 투병을 하는 중에도 하고많은 책 중에 꼭 ‘전도진’이라는 저자의 것을 고집했는데, 알고 보니 그 저자가 안동에 있는 민속박물관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까지 알아내는 치밀함까지 보였으니 말릴 재간이 없었다. 지난주에 응급실을 간 건강상태를 핑계 삼아 가지 말까 생각도 해보았지만 며칠 사이 엄마가 전보다 기력을 되찾은 것 같아서 더 망설이게 되었다. 햇볕이 따뜻해졌지만 봄이라고 하기엔 꽃샘추위가 있었고 무엇보다 적어도 세 시간 정도의 이동을 해야 하는 게 부담되었다. 사실 어떻게든 갈 수는 있겠지만 무엇보다 나의 운전 실력을 믿을 수가 없었다. 장거리가 처음인 것도 문제지만 무엇보다 안동을 가려면 고속도로로 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운전을 하기 시작한 이래로 장거리 운전, 그것도 아직은 고속도로를 달린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하지 못한 오랜 장롱면허증 소지자 상태였던 나에게 엄마는 전에 없이 천진한 목소리로 안동에 가자고 했다. 이번에 꼭 가고 싶다고. 그런 엄마에게서 흡사 애인을 만나러 가는 듯한 설렘이 느껴질 정도였다.

10여 년의 전 딴 운전면허증이 세상 빛을 보기 시작한 것은 선뜻한 바람이 부는 초가을이었다. 남편이 타던 차를 폐차시키고 새 차를 산다는 말에 나는 전에 없던 용기를 냈다.

“그 차 내가 연습 삼아 타다가 없애면 안 될까?”

남편은 위험하다며 극구 말렸지만, 엄마의 응급실 행이 잦아질수록 나는 차가 절실히 필요했다. 초등학교 1, 2학년 연년생의 어린 아들 둘을 키우는 내 생활에서 하루 종일 같이 있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고, 남동생 내외도 맞벌이라 엄마는 늘 혼자였다. 나는 수시로 가슴 졸이며 전화를 걸어 엄마의 몸 상태를 확인하였고 느낌이 안 좋으면 택시를 타고 30여 분을 움직여야 했으니 더욱 그러했다. 그렇게 살살 타고 다닌 지 채 세 달이 되기 전에 차가 시동이 안 걸리고 가다가 멈추고를 반복하더니 급기야는 하루에 세 번의 자동차 서비스를 받아야 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중고차가 얼마쯤 하냐?’며 집 안에서 있어도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알고 싶어 하는 엄마는 조심스럽게 나에게 물었다. 차를 가지고 다니자니 위험하고 불안한 마음이 들 때 즈음 남편은 무슨 마음에서인지 나에게 새 차를 사주었다.


병원에서의 진단은 ‘유방암’이었다. 엄마는 내가 어릴 적부터 성인이 된 이후에도 기도하러 간다는 명목으로 하루 이틀 집을 비우기도 하고 외출이 잦았지만, 통증을 느끼고 난 이후 몇 년 간은 가족에게 짐이 되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또, 병원 치료에 대한 불신으로, 아픈 몸을 숨기고 혼자서 산천초목이 있는 시골로, 인연이 있는 절로 돌아다니면서 투병생활을 한 셈이었는데 각자 생활에 바쁜 자식들은 자유롭게 옮겨 다니는 엄마를 이해하지 못했었다. 장수라는 지역의 병원 응급실에서 연락을 받기 전 까지는. 그 후로 종합병원에서 검진을 받은 결과, 6개월 시한부인 유방암이라는 병명을 알았을 뿐, 사실 동생네 있는 거나 외딴 시골에 있는 것은 매 한 가지이기는 했다. 특별한 병원치료를 받지 않았으므로. 링거조차 들어가지 않는 -링거를 맞으면 몸이 퉁퉁 부어올라 얼굴을 알아볼 수가 없었다.- 본인이 특이체질이라는 엄마는 병원치료를 완강히 거부하였고 급기야는 협박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지금 수술받으면 엄마는 바로 죽는다고. 몇 달이라도 더 보려면 그냥 내버려 두라고. 그런 엄마를 보니 결혼 후 한동안 잊고 있었던 옛 일이 떠올랐다.

내가 초등 3학년 때였다. 그때의 일을 다시 떠올리니 선명하게 기억난다. 단지 그것이 꿈이었는지 생시였는지는 지금도 정확히는 모르겠다. 나는 엄마의 병실 앞에 서있는 시커먼 형체의 낯선 아저씨들한테 필사적으로 매달리며 ‘저리 가’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것이 실제 상황이라고 여겼지만, 산에서 낙상하여 다리 골절로 입원한 엄마가 페니실린 쇼크로 죽을 뻔한 그 시각에 내가 꾼 꿈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지금도 등골이 오싹할 정도다. 그런 고비를 넘기고 살아난 엄마는 통증을 고스란히 감내하며 오랫동안 치료했었다.

엄마의 왼쪽 가슴에 종기처럼 염증이 생기더니 열이 나고 고름이 차올랐다. 통증이 생기면서 종종 그래왔다. 엄마는 소독과 소염진통제 처방을 받기 위해서 병원이나 한의원을 찾았을 뿐이지 다른 치료는 하지 않았다. 제법 풍만했던 한쪽 가슴이 다 꺼지고 쪼그라들 무렵까지 엄마는 그렇게 1년여를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통증을 안고 잘 견디고 있었다.


“도착했어요. 혼자서 내려올 수 있겠어요?”

동생이 사는 빌라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엄마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공휴일인 데다가 엄마가 오래간만에 외출을 하러 간다는 이유로 동생네 내외는 벌써 외출을 한 상태였다. 혼자서 내려오겠다는 엄마를 기다리는 게 갑갑증이 난 나는 시동을 껐다. 아이들에게 바로 내려올 테니 차문 열지 말고 얌전히 있으라고 다짐을 받은 나는 빌라 3층으로 올라갔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빌라였기에 혼자 내려온다는 엄마가 못 미더웠다는 게 더 정확한 심정이었다. 현관문이 열려있었다.

“혼자 있는데 왜 문을 열어놓았어요?”

들어서자마자 오래간만에 단장한 엄마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은회색의 비둘기 깃털같이 보이는 머리카락도 귀 뒤로 넘겨 깔끔하게 손질하고, 아래위로 흰색 법복과 누빔으로 만든 회색 마고자, 그리고 하얀 실크 목도리까지 단정하게 하고 거울 앞에 선 엄마의 모습이 눈이 띄었지만 ‘우리 엄마 맞아? 정말 멋지다’는 칭찬 한마디보다는 문을 열어 놓았다는 핀잔의 말이 먼저 나왔다. 해는 좋은데 바람이 불어 쌀쌀하니 옷을 더 단단히 챙기라고 말한 나는 엄마의 손을 잡고 계단을 내려왔다.

“아침밥은 좀 드셨어요?”

“응. 기운 내서 가려고 한 그릇 뚝딱했다. 너는 먹고 왔어?”

챙기지 않아도 엄마보다 더 잘 먹는데도 새벽에 일어나 샤워하고 내가 애들 챙기느라 빈속으로 올까 봐 간식으로 먹을 고구마를 쪘다며 가방에서 흰 비닐봉지를 살짝 들어 올렸다. 김이 서려 있는 게 아직도 온기가 남아있는 듯했다.

외할머니와 엄마를 보자 아이들이 창문을 내려 손을 흔들었다. 바람이 한차례 지나가자 가지런히 빗어놓은 깃털 같은 엄마의 머리카락이 힘없이 흐트러졌다. 나도 으슬으슬 몸속으로 한기가 드는데 집 안에만 있던 엄마였기에 더 선뜻한 느낌이 들 것 같아 서둘러 차를 타자고 했다. 몸에 냉기가 드니 전기장판을 켜고 솜이불을 덮어도 춥다는 엄마의 말이 생각났다. 한 번은 감각이 무뎌져 허벅지에 화상까지 입은 일도 있어서 놀란 적도 있었다.

“이 차가 도 서방이 사준 차야?”

일주일 된 새 차를 한 바퀴 돌며 엄마는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색깔도 참 좋다.”

“추워요. 빨리 차에 타셔요. 엄마가 즐겨하는 회색이라 그런 건가?”

조수석 문을 열어 엄마를 차에 태운 나는 운전석에 앉으며 의자와 연결된 열선 버튼을 눌렀다.

“안전벨트 매시고, 좀 있으면 엉덩이가 따뜻해질 거예요. 참 얘들아 할머니한테 인사.”

아이들의 인사를 받으며 뒤를 돌아보는 엄마는 주머니에 챙겨놓은 만 원짜리 지폐를 한 장씩 건네주었다. 으레 신이 난 아이들이 고맙습니다,라는 인사를 반복했다.

“그리고 이건 니 거다.”

내 무릎 위에 올려놓은 것은 노란 편지봉투와 목주였다.

“이게 뭐예요?”

“오늘 무사히 안전 운전하라고 주는 뇌물”

자식이 주는 용돈도 허투루 안 쓰는 엄마의 단호한 성격은 아파도 사그라지지 않는 가보았다. 과일이나 간식거리를 사가도 꼭 공것은 없는 거라며 빚지기 싫으니 돈을 받아가라는 게 엄마의 논리였다. 그냥 좀 넘어가시지,라는 핀잔을 주어도 돈이 아니면 다른 무엇으로라도 보답을 해야 직성이 풀렸다. 제법 어린이 티가 나는 아이들에게 조끼와 목도리, 그것도 남자아이들에게 노란색과 연두색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털옷을 짜준 것도 2년 전의 일이었다. 고맙게는 받았지만 사실 아이들에게 입혀보고 둘려보지도 못하고 옷장으로 들어갔다. 그런 옷은 내 어릴 적에나 어울리고 통하는 것이었다. 솜씨 좋은 엄마를 둔 덕에 초등학교 시절, 빵모자와 숄, 스웨터와 털바지, 공기 돌 만한 방울 달린 양말까지 입고 다닌 게 나였다. 어린 마음에도 안 입으면 엄마가 서운해할까 봐 입을 뾰로통하게 내밀고 학교에 간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좀 당황스러웠던 털실 옷 패션은 내가 제법 등치가 엄마만 해졌을 때 끝이 났다. 털옷의 장점이자 단점은 재활용이었다. 지겹다 싶으면 풀어서 다시 다른 옷으로 탄생시켰으니, 조끼나 목도리 같은 것을 풀기 시작하면 덜컥 걱정부터 되었던 게 기억났다.

길을 모를까 봐 전도진 선생님한테 길을 물어놓았다고 하며 엄마가 건넨 쪽지에는 아주 간략한 위치정보만 적혀있었다.

[남대전 IC에서 경부고속도로 타다가 중앙고속도로를 타고 서안동 IC로 나와 안동댐 근처]

문득 내가 대책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비게이션도 없고 사실 지도를 펴고 보아도 잘 모르겠어서 무작정 갈 수 있겠지,라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운전하는 것도 막무가내이지만 표지판 하나에만 의지하고 가려는 베짱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모르겠다.

“자, 안동으로 출발”

고속도로로 들어가기 전 엄마가 준 뇌물을 잘 사용한다는 의미에서 봉투에 든 돈으로 주유를 가득했다. 무언가를 신세를 지거나 선물을 받으면 그만큼의 대가는 치러야 하므로 나의 오늘 임무, 엄마랑 아이들을 무사히 안동으로, 또다시 집으로 데리고 와야 했다.

고속도로에 진입하자 엄마는 테이프 듣는 곳이 어떤 거냐고 물었다. 왜 그런지를 물으니 고사는 못 지내 줄망정 천수경 테이프라도 듣고 가자는 거였다. 라디오는 모르겠으나 멈추지 않는 한 계속 반복할 천수경을 틀고 세 시간 정도를 가야 한다는 게 무리다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오늘은 그렇게라도 마음의 위안을 얻고 싶었다. 아이들이 듣기 싫다고 아우성 댔지만 조용히 듣고 가라는 단호한 외할머니의 말에 가만히 있었다. 그들도 외할머니에게서 뇌물을 받았지 않았는가!

최근 들어 엄마는 부쩍 살아온 지난 이야기를 많이 하기 시작했다. 겨우 열세 살 정도의 나이었을 때 6.25 전쟁을 겪은 이야기부터 나의 외할아버지의 꿈 덕분에 폭격을 피할 수 있었던 이야기, 사업을 하던 외할아버지가 갑자기 교통사고로 죽으면서 알코올 중독자가 된 외할머니와 네 명의 어린 동생을 지켜내야 했던 이야기, 친정을 지키기 위해 북에서 피난 온 아버지와 만나 결혼한 이야기 등등. 마치 나보고 기억하고 있으라는 것처럼 반복적으로 이야기를 했지만 나의 뇌 기억용량은 한없이 적었다. 아마도 늘 들어도 새로운 이야기처럼 대꾸를 해서 또 말을 하는가 보았다. 무엇보다 결혼하여 10 여 년간 아이 못 낳아 받은 고통과 수모, 아버지의 여자 편력 이야기는 너무 놀라웠다. 내 남편이 바람을 피운다는 것보다 더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처음에는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듣기 싫을 때도 있었다. 오래전 세상을 떠난, 좋은 기억으로 남기고픈 아빠에 대한 이미지를 훼손시키기 때문이었다. 기억이란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던 지간에 최종적으로 내가 남기고픈 것들로만 이루어진다. 몇 번을 듣고 나니 그제야 결혼을 해서 아이 낳고 사는 딸에게 엄마로서의 위엄보다는 같은 여자로서의 고충을 털어놓고 싶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따지고 보면 30대, 지금의 내 나이에 친정에서는 엄마가 가진 손재주로 가장노릇하며 동생들 가르치고 결혼시키고, 시댁에서는 외도하는 남편에 셋이나 되는 시동생들을 거느리고 산 것 아니었는가? 나 같으면 살 수 없었을 세월이었다. 아이를 낳기 위해서 영험한 절이나 산에 올라 기도한 가피로 나와 남동생을 낳았다니, 이러한 설화 같은 이야기에 공감을 전혀 못하는 남동생은 엄마가 절에서 지내고, 인적 드문 산에서 생활을 하는 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처음에는 동생과 마찬가지로 엄마를 오해한 나도, 드문드문하는 엄마의 이야기가 염주알처럼 엮어지면서 조금씩 이해를 해가지 시작했다. 그렇게 된 것은 엄마가 아프고 난 이후였으니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너도 나처럼 딸이 있어야 할 텐데. 엄마 죽으면 외로워서 어쩌냐?”

잠시 천수경 독경 소리에 집중해 있던 나는 엄마가 물어보는 소리인지 불경소리인지 헷갈렸다.

“엄마, 나한테 뭐라고 했어?”

너도 딸이 있어야 한다고. 말을 되풀이하던 엄마는 뒷자리에서 장난감 가지고 슁슁거리며 놀던 아이들에게 말을 걸었다.

“이놈들, 너네 내 딸 속 썩이면 혼날 줄 알아?”

하며 주먹을 보인다. 무슨 영문인지 그게 어떤 의미인지 알 리가 없는 아이들은 할머니의 주먹에 자신들의 손을 감싸며 깔깔대고는 할머니와 권투를 하는 시늉을 한다.

한 시간 여를 달려오니 지루해진 아이들이 슬슬 싸우기 시작한다. 감정은 빛의 속도보다 빠르게 변화하는가 보다. 속 썩이면 혼내 줄 거라는 엄마의 주먹다짐의 효력이 발휘하기도 전에 슬슬 화를 돋우고 있는 게 아닌가. 조금 전만 해도 같이 잘 놀더니만 손가락만 한 흰색의 작은 강아지 인형을 서로 가지고 놀겠다고 소리를 지른다. 내가 그만하라고 몇 번을 말했지만 들은 채도 안 한다. 아이를 키우면서 나도 내가 몰랐던 면을 많이 발견한다. 생각보다 아주 많이 감정적이라는 점. 그리고 그 사소한 일은 스파크처럼 불씨를 만들기도 했다. 악다구니로 싸우는 아이들을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마치 아픈 엄마를 맘껏 돌보지 못하는 죄책감. 병원치료를 거부하는 완강한 엄마에 서운함. 수술을 한다 해도 해결해야 할 병원비에 대한 걱정. 살가운 딸은 아니었지만 엄마와 같이 있을 시간이 별로 없을 것 같다는 불안감. 그동안 그런 감정들을 누름돌에 눌러놓고 있었거늘 아이들이 나의 신경을 들쑤셔놓는 느낌이었다. 순간 나는 엄마가 옆에 앉아있다는 것, 운전 중이라는 것도 망각한 채 아이들에게 조용히 하라고 소리를 질렀다. 차 안에 정적이 흘렀다. 한 주먹도 안 되는, 그보다 더 작은 인형을 내놓으라고 한 나는 손에 쥐어지자마자 창문을 열고 밖으로 던져버렸다. 정말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아이들이 얼마나 좋아하는 인형인지도 잘 알고 있었다. 코에 찡하니 전율이 흐르고 눈물이 핑 돌았지만 이를 악다물고 참았다. 운전 중이라 아이들을 쳐다보지는 못하지만 많이 놀랐을 터였다. 그렇게 쏴한 분위기에서 불경소리만 청아하게 울려 퍼졌다. 머지않아 휴게소 표지판이 보였다. 찬물을 마신 것처럼 흥분이 가라앉았다. 아이들도, 나도, 우리보다 더 마음이 불편할 엄마도 쉬어야 할 것 같아 휴게소에 들렀다.

“힘들지 않으셔?”

어색한 분위기를 깨기 위해 능청스레 말을 걸며 주차를 했다.

“하나도 안 힘들다. 딸내미 하고 손자들하고 여행 가니 신나고 기분도 좋아.”

그에 질세라 엄마도 아무 일 없다는 듯 너스레로 되받아쳤다.

“그런데 왜 안동은 가려는 거예요?”

참 빠른 질문이었다. 떠나기 전에 물어야 했을 것을 안동 가는 고속도로에서 묻고 있으니 말이다. 아이들에게 간식으로 엄마가 쪄온 고구마를 내밀자 손도 안 댄다. 사실 그네들이 먹고 싶은 건 달달한 호떡이고 핫바 같은 간식이다. 그것을 알 도리 없는 엄마는 반 정도를 까서 아이들 손에 쥐어준다. 내 것까지 까는 것을 보고 나는 손사래를 쳤다. 분명히 한 입씩 먹고 내 차례가 될 것이었기 때문에. 나는 보온병에 싸 온 따뜻한 물을 종이컵에 따라 엄마에게 건네며 대답을 기다렸다. 잠시 뜸을 들여 이야기를 하려는데 고구마를 한입씩 먹은 아이들이 약속한 것처럼 먹던 고구마를 나에게 준다. 불과 몇 분 전의 거친 회오리바람을 잊은 듯 아이들은 음료수와 과자를 사달라고 조른다. 할머니가 준 용돈으로 사 먹기로 약속하고 매점으로 가니 자기들 돈은 아까운양 딱 한 가지씩만 고른다. 기분으로 엄마가 쏜다며 핫바 하나씩을 들려주니 환호성이다. 차 안이 조용해지니 엄마는 그제야 입을 열었다.

“6시 내 고향 프로에 그 양반이 나왔는데, 딱 엄마가 살고 싶은 대로 지금 살고 있는 거야. 전원 생활하면서 채소 키우는 책도 내고, 채식으로 건강관리도 하고. 민속박물관에서 사람들에게 서예도 가르치고. 남자가 참 곱고 단아하게 생겼더라.”

“잘 생긴 건 아빠도 안 빠지지. 혹시 안동에 있는 사람한테 반한 거 아냐?”

엄마가 말을 자르는 나에게 눈을 흘겼다.

“아무튼 꼭 그 사람 만나보고 싶어서 전화도 했다.”

내가 상상했던 것과는 달리 안동에 가는 이유는 참 설득력 없었다. 그런 단아한 양반을 보러 아픈 몸을 이끌고, 운전하면서 속도가 빨라질수록 심장이 벌떡거리고 어디선가 경적소리만 들어도 움찔하는 나를 앞세워 올 일이 무엇이란 말인가. 바꿔 생각하니 이런 순진무구한 이유를 들어줄 사람이 나밖에 없을 것도 같았다. 남동생도 남편도 무슨 목적도 없이 그냥 가자고 움직이는 호락호락한 성격들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엄마, 아직은 쌀쌀한데 나무 색은 좀 달라진 것 같네?”

휴게소를 나와 출발하자 생각했던 것보다 운전이 편안해졌다. 그제야 나무와 산이 보이기 시작했다. 꽃인지 뭔지 모를 분홍색과 흰색 점들이 찍혀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얘, 저기 저런 데는 뭐 파는 데야?”

“어디요?”

휴게소도 지났는데 물건 파는 상점이 있다는 말인가 싶었다. 내 시야에는 들어오지 않는 그 어딘가는 뭐란 말인가? 산을 지나 어느 도심쯤을 지나는 듯 아파트며 건물들이 보였다. 그중에서 유독 눈에 들어오는 곳이 있긴 했지만 설마 엄마가 그것을 물었을까 싶어서 모른척하고 다시 되물었다.

“엄마는 안경 쓴 나보다 시력도 좋아. 내 눈에 아무것도 안 보이는구먼.”

“저기 성인용품이라고 쓰여 있잖아?

나는 좀 당혹스러워 살짝 뒤를 돌아보았다. 휴게소에서의 간식이 정말 달콤했는지 두 녀석이 머리를 맞대고 자고 있었다.

“모르지 나도. 아마 말 그대로 성인들이 필요한 거 팔겠지?”

“저런 간판을 몇 번 봤는데 참 궁금하더라고?”

“울 엄마 별 것이 다 궁금하시네.”

“너, 도 서방하고는 잘 지내냐?”

잘 지내냐는 말이 포괄하는 의미가 참 다양하겠지만 성인용품 간판을 두고 이야기하는 중간에 물어보니 어떻게 해야 할지 말문이 막혔다. 잠시 적막이 흐르는 틈을 타고 어느 사이에 천수경 첫 구절이 들려왔다. 한 두어 바퀴째 돌아가는 카세트의 스님 목청은 변함없이 쩌렁쩌렁 울렸다.

“엄마도 아빠한테 사랑받고 싶었는데, 아이 못 낳는다고 하도 바깥으로만 나돌고 친동생들에 시동생들 뒷바라지하려니 억척만 남더라.”

제법 통통했던 살집도 통증에 힘이 부치고, 제대로 못 먹다 보니 바람 빠진 풍선처럼 자글자글해진 엄마의 얼굴에도 여전히 고운 모습은 남아있었다. 엄마도 참 예뻤지. 어릴 적 동네를 지나다니면 엄마보다 인물이 못하다는 이야기도 들었고, 양장점에서 옷을 맞춰 입으면 엄마를 따라 하는 아줌마들도 있었으니. 따지고 보면 그런 엄마를 신앙으로, 산으로 내 몬 대표적인 사람은 아빠였기 늘, 어느 정도 컸을 때까지 나와 남동생은 엄마가 가정에 소홀한 사람인 줄 알았다. 아빠는 집을 자주 비우는 엄마를 욕했고 엄마대신 아빠와 남동생 밥을 차려야 하는 나는 불편하고 힘들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아빠의 짐 실어 나르는 튼실한 자전거를 타고 시장에 가서 양과자와 마른 쥐포를 사 오고, 가끔씩은 영화를 보고 나와 먹는 물만두와 평양냉면의 맛이 엄마와 소소하고 긴 일상을 함께 했던 시간보다 더 달콤했다.

“엄마는 왜 아빠랑 결혼했어?”

물어보고 나니 이 질문도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말의 속내는 왜 아빠 같은 사람하고 결혼을 했는지 묻는 말이었지만 이러는 나 자신도 ‘왜 나도 남편하고 결혼했지?’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싶었다.

“사업하다 네 외할아버지 돌아가시자 도와줘도 모자랄 친척들이 목재소 사업체 다 뺏어가고 빚쟁이들 난리 치는데 일꾼들 밥만 해 줄줄 알았던 외할머니는 그 뒤에 매일이 술이고, 맏이였던 내가 나설 수밖에 없었지. 난 그때 허우대 좋은 남자들은 다 사업을 일구는 수완이 있는 우리 아버지 같은 줄 알았어. 그래서 결혼을 했는데, 네 아빠는 평양에 가면 집도 있고 비단가게도 있는 부자라면서 일도 제대로 안 하려고 하는 바람에 외할아버지 사업도 고스란히 뺏겨서 그대로 정리하고 돈도 없어서 두 배로 힘들었지.”

‘나는 엄마의 의지대로만 하려고 하는 강하고 억척스러운 그늘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싶었다. 하지만 엄마의 그런 강단은 어린 나이에 가장이 되어 대가족을 거느리고 보살피기 위한 생존방식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따지고 들자면 엄마가 나에게 무섭게 대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엄마의 후광에는 늘 호랑이띠라는 이미지에서 느껴지는 위엄이 있었다. 엄마가 좋긴 했지만 나에게는 다소 어렵고 두려운 상대였다. 그런 엄마에게서 떨어지면 홀가분할 줄 알았건만, 그보다 더 철벽같이 어려운 존재가 나타났으니 그것은 남편이었다. 변함없고 완고한 스테인리스 도시락.’

혼자 생각에 잠겨있는데 큰아이가 아직 멀었냐며 하품을 한다.

“저기 안동이라고 써진 표지판이 보이네.”

엄마는 눈이 부신 듯 잠시 인상을 찌푸리더니 안동이라는 말에 활짝 웃는다. 우리 딸 운전 믿고 맡길 만하다면서.

톨게이트에서 안동댐을 찾아가고 나니 민속박물관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목적지가 눈앞에 보이니 긴장이 풀렸는지 갑자기 허기가 졌다. 점심때가 되어서 배고프지 않은지 물으니 엄마가 박물관 다녀와서 먹자고 결정을 내린다.

공휴일이었지만 주차장은 한산했다. 엄마는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차에서 내렸다. 차 안이 답답했던 아이들도 내리자마자 주차장 공터를 내달린다. 2층으로 된 건물. 약간의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니 안동의 문화와 옛 선조들의 생활양식이 소개되어 있었다. 일층을 둘러보고 이층으로 올라가는데 엄마가 멈칫한다. 아이들은 벌써 2층 난간에서 빨리 오라고 손짓을 한다. 다소 숨이 차오른 엄마에게 천천히 가자고 팔을 잡는데도 쉬지 않고 올라간 데는 이유가 있었다. 엄마가 찾던 ‘전도진’이라는 사람이 2층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삼일절 특별행사로 2층 전시실 사이의 복도에서 가훈을 붓글씨로 써준다는 안내 입간판이 보였다. 가훈을 써주는 흰 한복을 입은 노인. 작고 가는 선이 도드라진 노인은 마치 쌀알 같았다. 작은 체구에 단아함이 묻어났다. 그가 바로 엄마가 찾는 사람인 듯했다. 평범치 않은 복장의 할아버지가 뭐 하는 거냐고 호기심으로 다가간 아이들. 가훈을 묻자 다시 나에게 쪼르르 달려온다.

“엄마, 가훈이 뭐야?”

다소 난감한 노릇이었다. 이제 갓 초등학교에 들어간 아들에게 선 듯 대답하지 못하는 이유는 가정을 이끄는 부모로서 가훈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런 생각도 없이 결혼을 하고 준비도 없이 아이를 낳아 기르다 보니 8년이라는 세월이 훌쩍 지나버린 거였다. 모른다고 할 수가 없기에 급조로 ‘정직하게 살자’. 뻔한 거짓말같이 말을 내뱉고 말았다. 아이들이 할아버지한테 가서 말을 걸고 있는 사이에 엄마는 내 옆에 서 있었다. 다소 상기되어 홍조를 띤 엄마가 숨을 고르며 합장을 하고 ‘전도진’이라는 사람에게 반배를 한다. 그 노인이 엄마만 보고 있을 리 만무했지만 절에서 부처님 전에 참배하는 듯 대하고 있었다. 가훈을 받아 들고 뛰어오던 작은아이가 넘어져서 울지 않았으면 우리가 서 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리지도 않았을 터였다. 합장을 한 엄마가 ‘전도진’이라는 사람에게 다가갔다. 아이는 울음을 그치지 않았지만 그보다 나는 엄마가 무슨 말을 할지가 더 궁금했기에 그 뒤를 따랐다.

“처사님, 대전에서 온 혜림화입니다.”

혜림화는 절에서 불리는 엄마의 불명이었다. 처음에는 뚱하게 쳐다보더니만 엄마가 며칠 전 통화한 내용을 상기시키자 그제야 반가운 내색을 했다.

“편찮으시다면서 생각보다 빨리 들르셨네요. 건강은 어떠신가요?”

“오늘 좋습니다. 처사님을 만나니 기분이 좋아요.”

“전시실은 둘러보셨나요? 제가 행사만 아니면 안내해 드릴 텐데.”

“이제 봐야지요. 저 다음에 또 올 테니 처사님이 가꾸는 텃밭 구경 좀 시켜주세요.”

“그러세요. 자연에서 가꾼 채소 드시고 건강해져야지요. 머지않아 요양과 치료를 목적으로 자연식을 하는 공간을 만들려는데 그때 꼭 오세요.”

“꼭 오고 싶네요.”

처음 만나는 사람들이 잠시 끊긴 대화를 이어가는데 제일 좋은 방법은 다른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거였다. 엄마는 딸과 손자들과 함께 왔다며 인사를 시켰다. 공손하게 인사는 했지만 어색한 기운이 역력했다. 노인은 가훈을 써주는 일을 해야 한다며 이내 붓을 손에 쥐었고, 건강하시라는 인사를 서둘러했다. 세 시간 남짓을 달려와 3분도 안 되는 만남. 그리고 30분도 안 되는 관람 코스. 나는 마음이 헛헛했지만 엄마는 그렇지 않았나 보았다. 2층 전시실 관람을 마치고 내려오는 중간에도 ‘전도진’이라는 사람에게 눈길을 주며 흐뭇해했다.

“엄마, 이제 가도 되겠어요? 서운하면 더 있다 가고.”

“배고프다. 밥 먹으러 가자.”

아프고 난 이후로 오래간만에 속 시원하게 듣는 소리였다. 입이 소태 같다, 모래 씹는 것 같다면서 밥을 잘 먹지 않던 엄마가 먼저 먹을 것을 찾다니. 지리를 모르니 도로변에 있는 음식점 중에서 고르자고 타협을 하고 차에 올라탔다.

“안동에 오면 헛제삿밥을 먹어봐야지.”

처음 듣는 소리에 그게 뭐냐고 물으며 도로변을 보니 제법 [헛제삿밥]이라는 간판이 눈에 띄었다. 겉보기에 깔끔해 보이는 식당으로 들어가 음식을 시켰다. 나는 사실 이름부터 거부감이 들었다. 웬 제삿밥? 이런 심정이었다. 식탁 위에 깔린 종이 매트에 헛제삿밥의 의미가 상호와 함께 쓰여 있었다.

“요거 읽을 수 있는 사람?”

엄마가 아이들에게 말한다. 둘 다 서로 경쟁하다시피 더듬거리며 읽어 나간다. 그 의미 인즉은, 제사 지내고 난 후 잔여 음식으로 비벼 먹는 비빔밥이라는 거였다. 다소 색다르다면 고추장이 아닌 간장에 비벼 먹는 거랄까? 그보다 나는 안동식혜가 더 특이했다. 전이나 탕국은 흔히 보던 것이었는데 쌀알이 동동 떠있는 달달한 식혜가 아닌 칼칼한 물김치 같은 느낌이었다. 점심때가 조금 지난 시간이라 식당 안의 손님은 우리들 뿐이었다. 비빔밥을 먹고 난 아이들은 식혜가 맛이 없다며 남겼다. 엄마는 본인이 평소 먹던 양을 다 채우고 나서도 아이들이 남긴 안동 식혜까지도 다 먹었다. 과식하는 거 아니냐며 못 먹게 하는데도 엄마는 오래간만에 입맛에 맞고 속이 개운하다고 했다.

배를 두둑하게 채운 엄마는 오늘 하루 나들이가 고단했는지 집으로 오는 내내 잠을 자고 있었다. 엄마가 너무 오래 잠을 잘 때는 문득 불길한 생각이 들어 가슴에 손을 대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지 않거나 등이 바닥에 붙으면 죽는 거라는 이야기를 하던 엄마의 말을 떠올리며 미세한 심장박동이 느껴지면 안심을 하곤 했는데, 지금 내 옆에서 너무 곤하게 자고 있는 엄마를 차마 쳐다볼 수가 없었다.

오늘 아침 엄마를 보았을 때 가슴이 철렁했었다. 그 이유는 하필 죽으면 입혀달라며 고이 개어 둔 옷을 입은 게 아닌가. 설렘을 갖고 나들이 갈 때 선택한 옷이 왜 하필...... 날은 어둑해지고 고속도로도 점점 어두워지고 차 안은 나 혼자 있는 것처럼 조용하다. 아이들도 자고 있었기에.


삼일절. 이번 공휴일을 엄마와 함께 보내는 선택을 하지 않았다면 과연 나는 어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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