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하면 생각 나는 두 가지 - 캔버스
첫 번째 기억.
초등학교 3학년 때인가 4학년인가(사실 그때는 국민학교) 좋아하는 남자아이가 있었다. 얼굴이 하얀데 착하게 생기고 공부도 잘하는 데다 친절하기까지 한 아이. 그 애는 그림을 잘 그렸다. 미술학원을 다니던 모습을 보고 또 한 번 반하게 되었다(내가 예술하는 스타일을 좋아하는 건가?) 주책맞게 그 애의 미술학원까지 놀러 가고 그랬는데 같이 미술학원이라도 다녔더라면 어땠을까?(내가 영업의 대상은 아니었겠지?) 그때 당시 우리 집은 학원 다니는 게 쉽지 않았고 다니는 애들도 별로 없었다. 가고 싶었던 미술학원, 피아노 학원을 문턱만 가보고 들어가지 못했던 형편이었다.
아무튼 미술, 그림 하면 맨 처음 떠오는 이미지가 내 첫 썸남인 그 아이가 생각난다. 쑥스러움과 낯가림도 잊은 채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밸런타인데이 초콜릿을 당당하게 건네던 어린 나.
“야! 딴 사람한테 소문내지 마! 알았지? “
이렇게 말한 건 아마도 여자애들의 질투를 받기 싫었고, 사실 막무가내 쑥스러움으로 어색함을 참지 못하는 본투비 성향이 더 크게 작용했다. 괜히 한 번 큰소리쳐 본다.
그 애는 다른 여자애들한테 초콜릿을 많이 받았는지 능숙함이 느껴지는 여유로운 모습으로 “알았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그 이후엔 사귀게 되었을까..
난 화이트데이 때 사탕을 받지 못했다.
어른이 되고 난 후 싸이월드가 대유행하던 시절. 혹시나 하고 그 아이의 이름을 검색해 봤다.
그런데 정말 있다. 아직도 미술과 관련된 일을 하고 있는 듯 보였는데 ‘다행이다. 계속 미술을 하고 있구나’ 하는 안도의 마음이 들었다(뭐가 다행이고 무엇 때문에 안도감이 들었는지 알 수가 없었으나 그 뒤로는 싸악 잊고 구 남친이자 현 남편과의 데이트에 집중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학교라는 사회생활 중에 처음으로 좋아했던, 기억 속에 기분 좋은 느낌만 남아 있는 그 아이의 앞 날이 행복했으면 하는 마음이였던 것 같다).
두 번째 기억.
미술 수업이 있는 날이면 초등학교 앞 문구점에는 한바탕 전쟁이 치러진다.(집 근처에는 문구점이 없었고 학교 앞에만 문구점이 있었다) 한 반에 70명 하던 때의 이야기다. 오전반 오후반으로 나뉘어서 수업을 했을 때 이야기.
아침에 미술 준비물을 꼭 사야만 그날 수업에서 혼나지 않는다. 돈을 들고 문구점 아저씨와 눈을 마주치려고 애쓰면서 큰소리로 내가 살 물건을 이야기하면 된다.
“아저씨! 찰흙 하나요!! 아저씨! 아저씨!! 여기요! “
시간 안에 꼭 사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학교는 지각하고 선생님께 혼나며 ”뒤로 나가!! “ 소리를 들으며 ‘내가 잘못했구나’ 자책하는 시간을 가져야만 한다. 이때만큼은 울트라 낯가림에 소심쟁이인 나도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야만 했다. 여기서 순서를 밀리면 그냥 끝인 거다.
전쟁 같은 준비물 사기가 끝나고 미술시간이다. 말로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설명을 해주신다.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것일까? 어떻게 해야 찰흙이 그릇이 되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준비물 구매하기에 이어서 또 다른 미션을 수행하는 기분이다. 잘 못하면 또 혼이 나는 쳇바퀴 같은 일상인데, 그 쳇바퀴가 뾰족한 바늘이 달려있는 난이도 있는 무서운 쳇바퀴인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만든 그릇인데 하교 길에 망가져 버렸다.
이유는 이러하다.
나무판자에 잘 올려진 찰흙 그릇을 잘 들고 집까지(걸어서 30분 거리) 가서 응달에 잘 말려서 다음 미술 시간에 가져와야 하는 데 학교를 나서자마자 손에 들고 가다가 한 눈을 팔았다. 아주 잠깐(이유는 기억나질 않는다)
‘쿵’하는 소리와 함께 눈을 떠보니 전봇대와 내 얼굴 사이에 찰흙 그릇이 반으로 접혀 있었다.
창피함은 둘째요. 이걸 어떻게 해결해야 될지 막막함이 앞섰고 눈물이 났다.
그런데 그 기억은 선명한데 그 해결책은 전혀 기억이 나질 않는다. ^^;;
(생각해 보면 언니 오빠가 도와주지 않았을까 싶다)
‘나는 미술을 못하는 사람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술이 잘하는 것과 못하는 것으로 구분할 수 있는지 의구심이 든다. ‘미술은 어려운 거야 ‘라고 단정했던 지난날들이 떠오르며 흘려보냈던 시간들을 다시 주워 모으고 싶다. 그때 그 애를 따라서 미술학원에 등록했다면 미술 실력이 좋았으려나.
지금은 그림을 좋아한다. 미술관 관람도 좋아하고 혼자 그림도 그린다.
여기 아름답다고 표현하고 싶은 보드게임이 하나 있다.
저처럼 그림 잘 못 그리는 분들, 예쁜 것을 좋아하시는 분들, 예술적인 감각을 키우고 싶으신 분이 있다면, 이 게임을 추천한다. 저처럼 미술 트라우마 있으신 분들이 혹시나 있다면 이 게임으로 우리 같이 미술가가 되어보자.
크라우드 펀딩으로 탄생한 게임. 코리아 보드게임즈에서 2021년에 출시된 ’ 캔버스‘
그림카드를 이용하여 나만의 작품을 만드는 게임이다.
게임 박스부터 눈길을 끈다. 박스 뒷면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글씨가 없다. 다만 유화그림만이 이 게임의 정체성을 말해준다. 박스를 오픈할 때도 디테일을 놓치지 않았다. 슬라이드 형식으로 열게 되어 있는데 마치 물감박스를 여는 느낌을 준다.
박스 그 자체를 액자처럼 걸 수 있도록 구멍을 뚫어놨다(실제로 우리 집 벽에 며칠 걸려 있었다.) 후에 확장판을 사고 보니 박스 그림이 연결되는 재미를 주니 확장판도 같이 구매하는 것도 좋겠다.
게임을 시작해 보자.
우리의 역할은 ‘화가’이다(이 점도 마음에 든다. ’ 우린 모두 화가야! 그러니 마음껏 예술성을 펼쳐봐 ‘라고 이야기하는 느낌) 투명한 필름으로 만들어진 그림 카드를 잘 모으고 겹쳐서 나만의 작품을 만드는 게임으로 그림을 겹쳐서 심사위원의 심사 기준에 맞춰서 그림을 만들어 나가는 게임이다.
게임의 독특한 점은 그림이 그려진 카드가 투명카드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투명카드를 겹쳐서 나만의 작품을 만드는 것이 이 게임의 관건. 게임이 종료된 후 내 작품을 출시하고 같이 게임한 동료들에게 평가를 받을 수도 있다(동료들의 평가는 확장판에서 적용되는 룰이지만 본판에서도 하우스룰로 적용해서 동료들의 평가를 받아보자)
보드게임 모임 공지를 할 때 박스 사진만 올려도 존재감 가득한 게임. 예쁜 게임은 재미없다는 편견을 깨부수어 주는 ‘캔버스’
*하우스룰이란? 설명서에는 없는 룰이지만 참여자 간 합의하에 룰을 변형해서 플레이를 할 수 있다. 우리 집만의 룰이란 뜻.
'캔버스' 본 판인 박스 그림이 시선을 끈다.
본판과 확장판을 열결해 놓고 찍은 사진이다. 그림이 연결돼서 완성된 하나의 작품이 되었다.
그림을 만드는 재료인 카드가 투명으로 되어 있다. 이런 카드를 3장씩 묶으면 하나의 작품이 되는 것이다.
쉽죠?
작품 제목이 자연스레 지어졌다. '고조되는 항복' 제목과 그림에 어울리는 나만의 해석을 곁들이면 작품의 소개가 끝난다.
작품 소개를 이렇게 하려고 한다.
"여기 혼자 평생 살겠다고 다짐한 한 여인이 있다. 자연을 돌보며 사는 삶이 꽤 만족스럽거든. 자연은 내가 관심을 주는 대로 성장하는데 그걸 지켜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어느 날 나에게 고백을 한 사람이 생겼다. 꼭 대포로 꽃다발을 쏘는 것 같은 느낌이다.
한 번은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 보고 싶은 마음을 표현한 그림이다."
억지로 구겨 넣은 느낌이 나죠? 네 그런 게임입니다만 꽤 진지해지는 걸 경험하실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