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3일의 악필 편지
저는 기억력이 정말 나쁜 사람입니다. 흔히 말하는 덜렁이지요. 지갑이나 핸드폰을 잃어버리는 건 예삿일이라 이제 이런 일로는 쉽게 당황하지도 않습니다. 그래도 이따금은 저의 나쁜 기억력을 원망할 때가 있는데, 사람들에게 상처를 줄 때입니다. 제가 기억력이 나빠서 하는 실수들이 상대에게는 자신에게 관심이 없기 때문에 잊어버린 것으로 보이기가 쉽거든요. 중요한 약속을 까맣게 잊어버리거나, 오래 된 커플링을 잃어버렸을 때... 저는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기분이었습니다.
그게 아닌데, 당신이 내게 소중하지 않은 사람이라 그런 게 아니라 그냥 내가 머리가 나빠서 잊어버린 것뿐인데, 그러나 이미 제 행동으로 상처를 받은 사람들에게 그걸 납득시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지요. 저를 잘 아는 사람들은 그게 악의없는 실수라는 걸 알기에 더 답답해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제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제게 화를 낸다고 제가 쉽게 고칠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니 어쩌겠어요. 그래서 저와 가까워진 후에도 제 실수로 인해 상처를 받고 저를 떠나는 친구도 있었습니다.
잊어버린다는 것은 이렇듯 상처가 되곤 합니다. 망각은 관계를 파괴하는 무서운 힘이 있습니다. 치매에 따라붙는 영혼의 병이라는 수식어는 그런 뜻이 아닐까 저는 조심스레 넘겨짚어 봅니다. 아주 친밀하고 따스한 관계에서 우리는 비로소 서로의 영혼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런 관계가 조금씩 허물어지는 것이 어떤 느낌일까요? 소중한 사람이 영혼을 잃어가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 어떤 고통인지 제가 감히 이해할 수 있을까요?
아마 가장 마음 아픈 일은 그 사람을 도와줄 방법이 없다는 것이 아닐까요. 추석날 작가님의 편지를 받아들고 저는 생각에 잠겼습니다. 이런 명절마다 작가님을 따스하게 안아주는 손길이셨을 할머님의 망각을, 언제까지고 묵묵히 지켜봐야 한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요. 한 존재와 그 존재와의 관계가 서서히 지워지는 무력감에 대해 제가 어떤 말을 할 수 있을지, 저는 모니터를 앞에 두고 태산같은 막막함을 마주합니다. 조심스럽게 단어를 골랐다 지우기를 만복하며 이 답장을 써내려갑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관심을 잃지 않고 기억하는 일뿐이겠지요. 영혼의 질병에 맞서 싸우는 사람들의 고통을 이따금 되새기며 읊조리는 일이겠지요. 그 수고를 기억하는 일이 언젠가는 최일선에서 치매와 맞서 싸우는 이들의 등을 받쳐주는 든든한 힘이 되기를 바라면서요. 거대한 망각의 소용돌이 앞에서 너무도 막막한 간병 가족들을 위한 도움의 손길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억한다는 것은,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주 힘이 센 일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태산같은 절망을 넘는 것은 희망하는 자의 몫이니까요.
기억함으로서 누군가의 희망을 도울 수 있다면, 기억력이 나쁜 저도 기꺼이 잊지 않도록 애쓰겠습니다. 공교롭게도 올해는 치매 극복의 날과 한가위가 같은 날이었습니다. 아마 바람이 선선해지고, 또 사람들의 웃음이 푸근해지는 철이 오면 떠올릴 수 있겠지요. 작가님의 편지를, 그리고 희망을 기억하려 애쓰는 사람들이 있음을요.
인스타그램에서 활동 중인 워니파파 작가님(https://www.instagram.com/heena.papa)께 받은 편지의 답장입니다. 워니파파 작가님이 쓰신 편지는 지월 작가님의 인스타그램 계정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워니파파님과 제가 소속된 글쓰기 공동체 흰 종이 위의 날개는 치매 기념의 날을 맞아 치매가정 지원 캠페인 ‘이름을 잊어도’를 진행하는 아름다운재단에 소액을 기부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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