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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쁜 이야기 Oct 17. 2021

바다 빛 당신. 15. 역류

15. 역류

 

1945년. 9월.       

  

세상은 뒤집혔고 결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번개와 같은 속도로 진격해갔다. 8월 21일. 소련군의 태평양 함대가 원산항에 정박했을 때. 경찰서에 투옥되었던 항일 투쟁 세력, 또는 어디선가 숨어 있던 인터내셔널 코뮌으로 불리는 국제 공산당의 잔존 파들이 가슴에 빨간 리본을 두르고 부두로 나와 격렬한 환호의 깃발을 흔들었다.  

  

[ 조선의 해방을 가져온 붉은 군대를 찬미한다! ] [소련은 우리의 동지!]      

   

소련군 함장이 배에서 내리기도 전에, 이미 거리마다 벽보가 나붙었다.     

1. 소련의 붉은 군대는

   조선의 해방을 위해 참전하였지만, 어떠한 내정 간섭도 없을 것이다.     

2. 우리는 조선인의 친구로, 이 땅에 참된 인민정권을 수립하고,

  조선인이 스스로 민주주의적 생활을 창설할 수 있도록 돕는다.     

3. 식민제국의 잔재를 청산하고, 국가 생활의 정상화를 위해

   조선인의 언어와 문화, 인민의 주권에 완전한 자유가 있음을 보장한다.    

     

그러나 누군가에 의해 시나브로 벽에 붙은 전단과 달리, 일본군 사령관의 항복 문서를 받아내는 주체는 조선인이 되지 못했다.     


조선 독립군이라고 부를 만한 임시정부는 아직 상해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빨치산을 이끌고 대활약한 김일성도 원산에 나타나지 않았다. 다만 공지에 쓰인 내용과 비슷한 삐라가 김일성의 이름으로 인쇄되어 사람들 사이를 떠돌았다. 그러나 그 삐라가 보장한다는 인민의 주권, 완전한 자유를 믿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왜냐하면, 조선인들 사이에는 ‘이제는 소련에 붙어야 산다.’는 말이 유행했기 때문이다.  

   

소련군은, 원산항에 당도한 저녁에 바로 일본군 사령관과 교섭에 들어가서 항복 문서를 받아내었다. 도망치거나 자결하지 못한 채 살아남은 일본인 수비대들을 무장해제시키고 수용소에 가두었다. 무정부 상태를 틈 타 도망친 일본인들이 마지막까지 파괴하고 간, 철도 열차와 불을 질러 버린 공장, 끊어 버린 전기, 수도시설 등을 복구하는 일을 주도했다. 상업 도시 원산의 경제 복구에 원산 시민들도 발 벗고 나섰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가슴에 빨간 리본을 두른 채 ‘원산 인민위원회’의 간부들이 지도하는 대로 움직였다. ‘원산 인민위원회’는 소련군이 주둔한지 한 달도 되지 않아 생겨난 적극적인 애국자들의 모임이었다. 순식간에 200여 명 이상으로 불어난 그들은 자기들끼리 선거를 치르고 위원장을 선출하더니, 원산시의 공무를 집행했다.         

원산 시민의 참여로 노동자 경찰대라는 것도 생겼다. 그들은 소련군으로부터 받은 소총과 기관총으로 무장을 한 채, 반 군복 차림으로 시가지를 행진하며 원산의 치안을 담당했다.     


시내의 거리마다 일본어 간판이 내려지고, 한국어 간판이 올라갔다. 사람들은 어디든지 모이기만 하면 걸상이나 책상 위에 올라서서 연설을 했는데, 주로 일본인들의 만행과 핍박받은 조선인의 억울함, 고문을 견뎌낸 체험, 되찾은 자유에 대한 기쁨 등을 열변했다. 철도. 우편. 전신. 해운 등 공기관의 노동자마다 직업동맹을 발족하고, 시민자치 단체도 만들었다. 청년들은 남자와 여자로 나누어 각각 청년 공산당 세포와 여성 공산당 세포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     


극장에는 소련의 영화들이 상영되었고, 합동 음악회도 개최되었다. 조선의 가수들이 소련군을 위해 [광활한 나라 나의 조국]을 부르면, 소련 병사들이 [아리랑]을 부르는 식으로  서로 간의 우정을 북돋았다.     

38도선을 기준으로 조선의 북쪽에 주둔한 소련군 위수사령부는 다수에게 환영받았다. 그들을 지지하는 인민 민주주의자들은 자본가들의 공장을 빼앗아 실업자들에게 일자리를 주었고, 모국어에 굶주린 주민들을 위해 출판물도 간행했다. [망치] [신지식] [농민]이라는 이름의 신문들이 인민경찰들의 잡지와 함께 원산 시민들에게 배달되었다.    

 

가톨릭 신자들 중에도 새로운 조국 건설에 참여하기 위해 ‘인민위원회’의 일원이 되어 활동하는 사람이 늘었다.



이 모든 일들이 해방 후 한 달 도 되지 않아 일어났다. 세상은 뒤집혔고, 너무나 빨리 내달렸다. 억눌렸던 사람들, 빼앗겼던 사람들은 본능의 속도로 자신들의 것을 되찾았다. 그들의 아우성이 수도원까지 들이닥쳤다. 청진시 전투로 원산까지 피난을 왔던, 회령과 연길 등 조선 북동부 수도회 수사님들과 수녀님들을 홍태화 원장 신부님이 본래의 사목지로 돌려보내자마자, 소련군이 무장한 채 덕원 수도원을 찾아왔다.   


그들은 우선적으로 수도원의 우유, 돼지, 오리, 포도주 등을 징발해 갔다. 원산시가 안정되면 인민위원회에서 적절한 처리를 해 줄 것이라는 태도로 [징발 증명서]를 발급해 주었다. 군인들과 주민들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한 번 시작된 징발은 수시로 이어졌지만, 소련군들은 미안해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믿고 있는 공산주의 세상에서는 남의 물건과 내 물건이 따로 있지 않기 때문이다.     


가톨릭에서는 모든 것은 하느님으로 부터왔지만 재산을 관리하는 청지기로써의 주체성은 타인에게 빼앗길 수 없는 사적 영역임을 가르쳐 왔다. 이러한 사상의 차이로 수사님들과 소련군 사이에 긴장감이 조성되었으나, 어느 날 저녁. 소련군 고위 장교가 그레고리오 신부님의 오르간 연주를 들은 이후 태도를 바꾸었다.   

  

그들은 무기 대신, 한국인 통역을 데리고 왔고, 예의를 갖추어 원장실을 방문했다. 겉으로 위협적인 모습은 더 이상 없었다. 다만, 수도원의 재정 담당인 다고베르트 앵크 신부님을 불러 회계장부를 조사하고, 수도원의 이름으로 운영되는 병원과 농경지, 목축지, 토지 면적 등에 대해 좀 더 면밀한 정보를 요청했다. 수도원에서 출판된 인쇄물 목록들을 검열하다가 <인간의 영혼은 물질인가, 정신인가? >라는 소책자의 자세한 내용을 물었다. 책의 저자인 루페르토 클링자이스 신부님이 불려 갔다. 소련군 장교는 책의 저자에게 질문하는 대신, 자신의 입장을 전달했다. 자신은 인간 영혼의 불멸성에 대해 동의하지 않지만, 자신의 어머니도 신자이긴 하다고. 종교 시설은 공공기관이므로, 이 모든 조사과정이 인민민주주의 국가건설 계획의 일환이라고 설명하며, 스탈린 헌법에 의해 인민민주주의 국가는 종교의 자유를 허락하고 있으니 안심하라는 내용의 말도 건넸다. ‘소련은 조선인의 친구다.’ 슬로건 같은 마지막 인사도 잊지 않았다.        


홍태화 원장 수사님은 9월 1일 팔도구에서 사목 중이었던 엔젤 마로첼로 수사가 소련군에 의해 살해된 이야기를 친구라고 주장하는 장교 앞에서 꺼내지 않았다. 말이 모략이 되는 순간 무엇이 나올지 모르는 상대이기 때문이다. 풍문에는 풍어제를 치르고 출항하는 어선단의 배들을 두고, ‘이 배들이 모두 소련으로 공출된다.’는 흑색선전을 하는 이들도 있다고 했다. ‘조선의 해방은 미군의 원자탄 투하에 있지 소련군의 공로가 아니다.’ ‘소련군이 전쟁에 참전한 기간은 열흘 남짓이 전부다.’라는 간 큰 말을 퍼트리는 자들도 있다고 들었다. 그러나 소련군들 앞에서는 누구도 그 말을 하지 않았다. 소련군과 원산 시민 간의 정치적인 불신을 조장하려는 모략가로 몰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라를 찾았다는데, 주인 아닌 주인이 다시 주인이 되었다. 그러나 독일인 수도자들 역시 이 땅에 주인아닌 주인으로 비춰졌기에, 주인 행세를 하기 위해 자리를 잡은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온 것임을 공고히 하려는 듯, 급변하는 물결 속 시시각각 세워지는 새로운 질서들을 침묵으로 보고만 있었다. 어찌보면, 그동안 가꾸어 온 수도원의 여러 소유물들을 합법적으로 빼앗기느라 손 쓸 틈이 없었다는 편이 더 옳을 것이다.


요셉 수사님의 진료소도 루방으로 까지 밀려온  전후 부상자들을 돌보느라 손쓸 틈이 없었다. 각 성당마다 장례미사도 심심찮게 올려졌다. 동순이의 죽음도 마찬가지로 치러졌다.


그렇다. 손 쓸 틈도 없이 동순이가 죽었다.   


새어머니는 동해 문화 집을 운영하는 대신, 일본인 장교 하나를 선택했다. 그녀의 선택을 알고 있는 사람은 동순이 밖에 없었다. 그러나 동순이는 3년 만에 찾아온 제 오빠에게 그 말을 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떠났다는 얘기에 얼굴빛이 먼저 붉어지는 오빠를, 제 딴에 염려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동순이가 진작 그 말을 했더라면. 동길은 그 집을 깨 부수어서라도 동순이를 당장에 데려왔을 것이다. 그러나 비밀은 서로 간에 은폐되었고, 사건은 일어나고 말았다.     


동해 문화 집이 한 일본군 장교의 사적 공간으로 변하게 된 계기가, 아버지가 새어머니를 떠난 이후였는지, 아니면 이미 다른 정부가 생겼기 때문에 아버지가 떠나 버렸는지는 모른다. 그녀도 떠났으므로.    


일본 천황이 라디오를 통해 항복문을 발표하던 날.

일본 본토 사람들이 그 방송을 듣고 머리를 땅에 대며 통곡할 때에. 성모승천 대축일을 맞아 성 데레사의 집 아이들이 새로운 연극을 선보일 때에. 천황의 발표에도 항복을 거부한 일본군들이 청진시에서 소련군과 피 튀기는 전투를 벌이고 있을 때에. 대부분의 조선인들이 아직 해방이 온지도 모르고 묵묵히 자신의 삶을 버팅기고 있을 때에. 패배를 인정할 수 없었던 한 오만한 일본 군인은. 나지막이 ‘무사의 도’를 읊조리고는 자신의 칼을 꺼내 내연녀를 죽이고, 동순이도 죽인 후, 자결했다. 복수의 여지도 주지 않고 악이 악을 행하고는 떠나 버렸다.


그의 한 생이 어떠하든 모든 미사는 정성을 다해 올려졌다. 온 사제와 수도자, 신자들의 기도를 모아.    

 

덕원 수도원 자치구의 흥남 본당 사제인 이춘근 라우렌시오 신부는 소련군이 만든 포로수용소에 갇혀 있는 일본인들을 찾아가 위로했다. 수용소 내에서 발생하는 폭력과 자살을 막기 위해서, 아직도 천황을 신(神)으로 믿고 있는 일본 제국의 신민이지만 그리스도교를 믿기도 하는 몇몇 일본인들을 위해서, 미사도 드렸다. 흥남뿐 아니라, 고산과 영흥 등 많은 성당에서 ‘일본인들의 무사 귀환’을 위한 미사가 올려졌다. 정성을 다해. 온 사제와 수도자, 신자들의 기도를 모아.         


동길은 속이 뒤집혔다.

역류하는 분노를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불변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에 내가 죽을 것 같았다.    

 

인간의 죄가 진홍빛 같이 붉다 하더라도, 용서를 구하면 하느님의 자비에 한계는 없다. 창조주이시며 인류의 구속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이를 위한 모든 것이다. 인간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의 사랑도 마땅히 그를 닮아야 한다. 개인을 위한 개별적인 것은 모든 이를 위한 모든 것에 비해 우선순위에서 항상 밀린다. 그래서 가톨릭(catholic)은 ‘보편적’ 종교다.    


그러나 인간의 사랑은.

그래서 김동길은 지금.    


수도 선배들이 변함없이 스타시오를 서며 성전 앞에서 저녁 미사를 준비하고 있을 때, 조용히 기숙사를 나왔다. 개별적 분노를 안고서, 더 이상 타인을 섬길 수도, 보편적 사랑에 참여할 수도 없을 것 같았다.


정적만 남은 텅 빈 복도.

수도원 기숙사의 한  닫힌 방문에서 폐렴 환자의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김치호 베네딕도 신부의 방. 8년을 공부해서 사제가 되었는데, 형은 1년도 되지 않아 조금씩 앓기 시작하더니, 제대로 된 사목 활동을 해 볼 겨를도 없이 폐병으로 몸져누웠다. 형의 똑똑한 지성과 아름다운 인품과 누구보다 깊은 신앙심이, 하느님으로부터 직접 성별되는 고귀한 사제직에 아무런 소용이 되지 못했다.     

그러나 형은 여전히 사제다. 그리고, 수도원의 누구도 돌봐야 할 짐 더미가 되어 버린 청년 사제를 홀대하거나 불쌍히 여기지 않았다. 그는 그의 처지대로 존중되고 있었다.     


동길은 그 방을 못 본체 하고 나와 버렸다.

요셉 수사님께도, 원장 수사님께도 인사를 드리지 않았다. 태주가 수도원 형제들에게 둘러싸여 격려와 애정 어린 포옹을 받으며 수도원을 떠나던 모습에 비하면, 동길의 떠남은 스스로가 생각해도 비루하다. 그러나. 요셉 수사님의 바다 같은 눈동자에 대고, 원장 신부님의 누구보다도 깊은 베려심에 대고, 내가 믿던 사랑이 배반당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이 수도원의 그 누구도 동길을 배반하지 않았으므로.     


동길에게 닥친 기막힌 슬픔에 누구보다 마음 아파하고, 함께 울어 주고, 손을 잡아 주신 분들이 모두 이 세계 안에 있었다. 어떤 시련에도 변함없이. 사랑. 누구를 만나더라도 변함없이. 사랑. 만을 행하는 이 세계는. 하느님을 닮은 그대로. 영원불변이다.     


그러나 영원한 성실. 그 무한한 순종에.

동길은 더 이상 합류할 수 없었다.


창에 찔리시고도 사랑의 피와 물을 쏟으시고, 구멍 뚫린 손과 발로 죄인을 안아주시는 예수님을 도저히 닮을 수 없다. 머리론 다 배운 사랑이지만 몸이 배겨내지 못했다. 남의 죄와 내 죄가 뒤섞인 그곳에 가장 약한 자가 희생되는 일. 그 흔 한 일이 나에게도 일어났다는 사실에 몸서리를 치며, 부지불식간에 악의를 가진 누군가에 여해 제 현실이 물어뜯긴 몸으로, 그렇게 피가 나는 심장을  그리스도 처럼 묵묵히 열어 젖힌 채 죄인들을  품어 안지 못해서. 토악질을 하고 마는 몸이라... 이 세계를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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