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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쁜 이야기 Oct 23. 2021

바다 빛 당신 16. 삶의 표면

16. 삶의 표면

   

1945년. 12월.


혹독한 겨울이지만, 마포 미곡 상인들이 불법으로 독점하여 쌓아 둔 쌀을 검찰이 적발해 낸 덕에 동길은 한 이틀 끼니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한 사람 한 됫박” 원칙으로 동네 배급소에서 나눠주는 쌀을 받아 반 됫박은 하숙집에 5일 치 방세로 내고, 두 홉 치는 쌀밥으로 만들어 달래서, 아랫목 이불 밑에 넣어 두었다. 눈꼽만한 나머지 반의 반홉은 아주머니 손에 맡겨, 주인네 옥수수에 합해 불린 죽을 만들어 점심으로 나눠 받았다. 서울의 깍쟁이 인심이지만, 뭐라도 내놓으면 되받을 수는 있으니 다행이었다.


후-후-식혀 천천히 떠먹어야지 생각은 했어도, 급한 입이 죽을 먼저 삼켜버려 입천장이 벗겨졌다. 단숨에 없애 버린 한 끼에도 현기증은 가시지 않아, 동길은 아직 뜨듯한 내일 먹을 밥그릇에 시린 발을 붙이고 누웠다.


폐지로 도배를 바른 하숙방. 마포나루에서 지게를 메어 번 돈으로 선금을 내고 며칠씩 기숙하는 하숙집 단칸방이 서울 바닥에서 동길이 마련한 보금자리다.


 화물 짝에 담겨, 바다를 건너, 창고에 쌓였다가, 마당에 풀렸다가, 이 하숙집 집으로 들어와, 누구의 냄새를 눅진히 베어내었을 YMCA 이불. 그 이불에 굴을 만들어 토끼마냥 파고든 동길은, 칼날로 다다미질해대는 허리 통증을 그저 받아 내고 있었다.


거리에 나뒹구는 신문들로 덧발라진 엔 누구의 말인지도 모를 말들이 글과 그림으로 인쇄되어 맥락 없이 늘어졌지만, 유독 맥아더의 점령 선언문은 눈에 띄게 붙어 있어 동길은 자난  9월 7일 부로 남조선의 새로운 주인이 된 멕아더 장군의 글을 읽을 수 있었다.    

 

" 태평양 방면 미국 육군 부대 총사령관으로서 

   나는 이에 다음과 같이 포고함.   


   일본국 정부의 연합국에 대한 무조건 항복은

   제국(諸國) 군대 간에 오랫동안 속행되어온 무력투쟁을         끝냈다. 일본 천황과 일본국 정부의 명령과 이를 돕기 위해 그리고 일본 대본영의 명령과 이를 돕기 위해 조인된 항복문서 내용에 따라 나의 지휘 하에 있는 승리에 빛나는 군대는 금일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영토를 점령한다.   


조선인민의 오랫동안의 노예상태와 적당한 시기에 조선을 해방 독립시키리라는 연합국의 결심을 명심하고, 조선인민은 점령 목적이 항복문서를 이행하고 자기들의 인권 및 종교의 권리를 보호함에 있다는 것을 보장받는다.


이러한 목적들을 실시함과 동시에 조선인민의 적극적인 지원과 법령 준수가 필요하다.    

태평양 방면 미국 육군 부대 총사령관인 나에게 부여된 권한으로 나는 이에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과 그곳의 조선 주민에 대하여 군사적 관리를 하고자 다음과 같은 점령 조항을 발표한다.   


제1조 -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영토와 조선인민에 대한 정부의 모든 권한은 당분간 나의 관할을 받는다.    

제2조 - 정부의 전 공공 및 명예직원과 사용인 및 공공복지와 공공위생을 포함한 전 공공사업 기관의 유급 혹은 무급 직원 및 사용인과 중요한 사업에 종사하는 기타의 모든 사람은 추후 명령이 있을 때까지 종래의 기능 및 의무 수행을 계속하고, 모든 기록과 재산을 보존...  "


그 선언문 위에는 다시, 한번 배운 기술로 영구 수입을 보장해주는 파마 미용학원 광고가 덧붙여져 더 이상 볼 수 없었지만, 그러니까 여기도 해방이 해방은 아니란 말이었다. 


미점령 군도 소련의 붉은 군대처럼 조선의 진정한 독립을 위해 당분간 도와주려고 조선을 점령 중이니 점령군의 말을 믿고 따르란 얘기를 장군은 명령조로 해 댛다. 조선의 친구라는 소련군과 누가 비교우위 인지야 말투 만으로는 모르겠지만. 한 나라의 해방이라는 것이 바다처럼 거대하고 깊은 규모라는 자각이 들기엔 충분했다.

 그러나 신문 몇 쪼가리를 읽고 정세를 어느 정도 헤아렸다 한들, 국가적 세계적 전인류적 어떤 이야기들을 진지하게 여기기에는 이미 김동길은 너무나 지치고 볼품없는 개인일 뿐이었다.   


서울역에 내리자마자 연고도 쥐뿔도 없는 처지라는 것이 현실로 와닿았기에, 물류가 오가는 시장에 가면 ‘산입에 거미줄은 안치겠지.’ 싶어 찾아든 마포 나루였다. 하루살이 신세는 면하려는 마음에 일주일은 전대를 단단히 차고서 겨울 강바람에도 몸이 부서져라 지게를 이다가, 정말 몸져누워버렸다. 전 재산인 젊은 몸뚱이에 맥이 빠지니 살길이 막막하기만 하다. 그나마 쌀 도둑을 때려잡은 검찰 덕분에 한 사흘 더 살아 볼 시간을 벌었다. 그래도 의원을 찾아갈 돈은 없으니 쉬는 동안 어금니에 힘 꽉 주고 혼자 나아야 한다.


 사랑하며 살기에도 모자란 인생이라고. 주님께 장래를 걸며 살았던 때에는 보편적 인류애야 말로 믿을 교리요 행할 삶이었는데, 서울 바닥까지 밀려와 맞닥뜨린 현실 앞엔 새삼 내가 있어야 세상도 있다는 자각뿐이다.    


그러고 보니, 반들반들 윤이 나게 닦인 책상들, 사시사철 꽃나무가 어우러졌던 연못가, 함께 성무일도를 바치던 우리들. 한 계절 전 떠나왔던 그 세계가 참으로 머나먼 꿈나라 여겨지기도 한다.   


“누구에게든 왔어야 할 고통을...

 하느님께선 가장 사랑하는 아들이 감당하기를 바라셨구나...

 동길아,

 창에 찔린 심장으로 그분이 무엇을 흘려보냈는지 보거라.

 굳건히 사랑해야 한다.

 버티고 일어서야 한다.

 사랑으로 일어서야 해.”    


동순이의 죽음 앞에 망연자실한 동길을 진실한 위로를 담아 바라봐 주시던 요셉 수사님, 볼을 쓰다듬어 주시던 손. 그러나 절대 나약에 자신을 내던지는 일은 허락하지 않으신 아버지. 아들은, 다시는 사랑으로 일어설 수 없을 것만 같아 도망갔지만, 그분의 눈빛은 어딜 가나 따라올 것이다.     

그렇다면 이 떠남이 무슨 소용일까.


아직도 이불속까지 밀려오는 후회는, 가슴에 다시 돌아가고 싶은 충동이 거세게 일었던 평양행 기차에서의 기억을 자꾸만 떠올리게 한다.


그날 그 기차 칸에서 그녀를 만나지 않았다면, 동길은 아마도 다시 기차를 바꾸어 타고, 수도원으로 돌아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돈이라곤 가져 나온 것도 없어 무임승차를 택하고, 검표원을 피해 빈자리를 찾아 앉은 후, 돈 한 푼 내지 않고 소유하게 된 안락함이 색다른 기분을 안겨주었을 때. 문득 동길에겐  낯선 기대가 올라왔다. 문명인의 대열에 합류해 볼까? 마음으로 우는 것을 그만두고, 모던 보이들이나 짓는 세상 무감한 표정도 지어 낼 수 있을 것 같아, 동길은 어렴풋이나마 제 표정을 차창에 비춰도 보았다.    


그러다 불쑥. 소름이 돋았다.

차창엔.

아버지의 얼굴이!

그러나

사실은 적나라한 내가 비췄던 것이다.    

    

무책임한 도피. 뿌리 없이 떠도는 삶. 감정대로 행동하는 나약함. 시대와 상관없는 개인주의자. 그는 사실 김동길이었다.    


동생을 두고서, 집을 먼저 나온 것은 자신이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이 땅의 누군가가 죽어 갈 때, 저는 혼자 성덕을 닦겠다고 수도원에 들어갔다. 어쩌면, 동생의 죽음은 비겁하고 무책임한 두 남자의 동시다발적 선택의 결과였다. 아버지를 용서하지 못하는 만큼, 동길은 자신도 용서할 수 없었다.    


그러자, 다시 목이 멨다. 가슴에 비통함이 번져 눈알이 빠질 듯이 뜨겁게 올라왔다. 동순이. 이름만 떠올려도 깊은 심해에 갇힌 듯 억눌리고 답답한 마음. 북받치는 한을 누르는 일을 대체 언제까지 할 수 있을까. 이대로 그저 죽고 싶었다.  그 생각에 이르자 벌떡. 동길은 뭣에 쫓기는 사람처럼 급히 기차의 복도 칸으로 갔다. 문을 열고 뛰어내려 버릴까. 그러면 죽을 수 있을까? 그 생각을 하는데.   


“발 좀 들지요?”    


소리에 퍼뜩 보니, 기차 복도 칸 벽에 웅크리고 앉은 여자가 있었다.    


“이번 역에 내려야 해서”

미안합니다.”   


그 말을 하자 신기하게도 숨이 트였다.

동길은 그 여자의 새끼줄을 밟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퍼뜩 발을 들어주었다. 짚으로 꼬인 그녀의 줄은 달걀을 감싸 안은 짚싸개와 이어져 있었다. 동길이 발을 들자마자 그녀는 밟혀 있던 새끼줄을 감아 잡아 달걀을 더 단단히 묶으며 일어섰다. 그 사이 한쪽 어깨에 메었던 원색의 파랑 빛 보자기 사이로 칠이 벗겨져 양철 그릇이 삐져나왔다. 꾸그러진 그릇에 원산정유 글자가 찍힌 걸로 보아 공업단지 근로자 중의 하나였던 것 같았다.


노동에 익숙해진 그녀의 굵은 손마디는 낮은 코에 오밀조밀 작고 앳된 얼굴과 부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키도 제법이라 소녀의 느낌은 이미 지나 간 여자였다.   


“월급 대신 받은 거라.”    


무턱대고 걸어오는 현실 이야기에, 동길이 마땅히 할 말을 찾지 못한 순간, 그녀는 상대방의 대답은 기대 않았다는 듯 낮고 허망한 웃음을 흘린 후, 기차 문을 향해 돌아섰다.   


돈 대신 물건으로 일한 품삯을 챙겨 받았나 보다. 원산시내의 일본인 재산을 인민위원회 사람들이 차지할 때에, 대세에 합류하지 못하고 떨어져 나온 사람일까.    


살림살이를 짐 채 맨 그녀의 삶을 막연히 짐작만 해 보면서, 뒤집힌 세계에 적응 못해 빠져나온 동질감을 저 혼자 느꼈다. 그녀가 그런 여자인지도 모르면서, 동길은 타인으로부터 위로받고 있었다.


무작정 그녀와 대화를 해 보고 싶다고 느낀 순간도 잠시. 기차 문이 열렸다.  신탄리역.


그녀는, 생필품 보따리를 들고 기차 밖으로 나섰다. 쓸데없는 말 한마디를 무심히 건넸던 낯선 여인은 순식간에 동길로부터 멀어졌다. 한 사람의 뒤태에 주렁주렁 물건들이 붙어 있었다. 울룰불룩 멀어져 가는 여성의 뒷모습이 새삼스러워 동길은 짙푸른 밤 속으로 묵묵히 사라지는 그녀를 한참이나 보았다.


기차가 떠나고, 더 이상 볼 수 없어진 그녀를 애써 기억으로  되살려 보기까지 했다. 단정하게 딱 떨어지는 숙녀가 아닌데도, 강가에 핀 풀꽃처럼 아사무사 예뻤던 것 같았다. 있는 줄도 모르고 있어 왔던 존재. 밟은 줄도 몰랐던 한 사람의 끈. 허망한 옅은 미소를 흘리고선 울룰불룩 뒤태로 걸어가는 그 여자.


그건 강의 표면이었다.


그녀를 통해 고향 동두천, 그 강 위로 올라온 동길은 그제야 자신이 아주 깊은 심해를 살다가 물 밖으로 나온 것임을 알았다.


어린 시절, 동순이랑 엄마랑, 동네 사람 모두가 발을 들였던 강. 민물고기를 잡고, 빨래도 하고, 오줌도 싸고, 밥도 짓던 우리 모두의 그 복잡한 침범들을, 강은 울룩불룩한 수면 아래로 너끈히 흘려보냈다. 그러고도 남은 추억은 물비린내 풍기며 담고 살았다. 우리는 그런 물을 떠다가 밥도 짓고 빨래도 하고 청소도 하면서 다시 살았다. 삶을 살았다. 가슴에 인 쓴 물 따위, 시원하게 떠내려 보낼 수 있는 그 강은 종교적 치장을 하지 않아도, 이미 예수님이 가슴에서 흘려보낸 피와 물이었다.    


필사적으로 복원시킨 그녀의 울퉁불퉁함은 어디에나 계시다는 하느님의  증명이 되었다. 영원한 충실 대신 제 맘대로 발을 넣다 뺄수있고, 필요할 때만 찾아오고 아무거나 집어던져대고 장난치고 헤엄치고 배도 띄워 볼 수 있는 그런 자유로운  세계는 수도원 밖에 있었다.


단정하지 않아도 영원불변하지 않아도 멋이 제법일 것만 같아 말을 걸어 보고 싶은 세계는 한 여자 안에도 있었다.


그렇다면  이 넓은 세상 속에서 다시 한번 숨을 쉬어도 될 것만 같았다.


 동생을 그렇게 보내 버렸다는 미안함에 속이 다 뒤집힐 것 같아도, 그러고도 살아 있는 오빠라는 부끄러움에 속이 다 짜부라 졌어도 일단을 살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배신자나 비겁자의 뒤태로 수도원을 빠져나왔어도, 지금은 이게 내 얼굴이다. 모두를 위한 모든 것이 되기엔 역부족한 내 앞모습. 그리고 미처 보지 못했던 옆모습, 남겨질 뒷모습이 무엇이건, 일단 울퉁불퉁한 삶의 길에  발이나 들여 보자. 싶어. 죽으려던 객기를 버리고, 돌아가지 않는 용기를 택했다.  


거기에서부터.

그 기차로부터 어느새 여기까지 밀려온 것이다.    

서울 바닥.  

   

서로 간의 깊은 신뢰나 침묵 중의 베려 따윈 없는 얄짤없는 서울 바닥에서, 기억이 되어 더 따스한 수도원을 떠올리며 이불 안의 안락을 누리는 것은  동길이 지금 당장의 생존을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자가치유였다.


하느님이 그분을 닮았는지, 그분이 하느님을 닮았는지. 요셉 수사님의 따스한 바다 빛 눈길이 기억너머 가물지 않도록, 동길은 애써 떠올리고 또 부여잡다 이런 되새김질마저 힘에 부쳐 이불 굴 안에서 의식을 잃고 만다.

   

그런데, 막상.

꿈속에  반짝이는 눈동자는, 유미옥 아녜스다.


수도원 간호부 시절 뒷마당에서 환자들의 시트를 빨면서 남몰래 여러 번 훔쳐보았던 그 소녀. 동순이를 다시 만나려고 알사탕을 사던 길에 단 한번 마주 봤던 그 눈길이 마음에 길을 내자, 아직은 더 살고 싶다고 내 꿈이 말했다. 이제부터라도 사람 꼴은 하고 살자며 그녀가 꿈에 까지 찾아왔다. 눈을 떠 보니, 저녁 어스름. 동길의 남성성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살라고 힘을 내어 버렸다.  그러니 다시 살아야 했다.



동길은 어느 정도 지져진 허리를 다잡고 빨랫감을 소쿠리에 담아 욱천으로 나갔다. 집집마다 밥 짓는 냄새를 피워 올리는 이 시간이 혼자 사는 동네 총각이 빨래하러 나오기엔 가장 적절했다.


수도원에서 수녀님들과도 함께 해본 빨래 솜씨라 한 겨울 게울 물이 무서울 리 없지만은, 동네 빨래터는 또 달랐다. 이곳에선 수도원에서처럼 기도하며 침묵 중에 방망이를 두드리는 대신. 아낙들 사이에 말이 나온 누군가를 들어 올려 으레 입방아를 찧으며 끼리끼리 친교를 다져댔기 때문이다. 듣는 재미야 있었지만 맞장구까지 쳐주기엔 피곤한  아낙들의 입방아를 피하기 위해.  식구들 밥 짓는 저녁시간을 골라 동길은 다시 한번 내일을 준비한다. 


깊은 심해와도 같은 수도원에 머물렀다면 절대 가지지 못했을 개인적 삶을, 동길은 바닥이라 불리는 부평초 같은 인생들 사이에서 틔울 것이다. 그렇게나 증오하던 아버지의 어느 모습도 내 한 부분이라는 것을 알기에, 이제 자기 인생을 요람부터 무덤까지  오롯이 하느님께만 맡기지는 않을 배짱으로 미래를 가늠해 보고 예감해 보는 일도 나쁘지 않다. 그리 여기며 남루한 청춘이 숨을 틔워 들어선 빨래터엔 또 다른 뜨내기가 있었다.


옥아.


어디서 굴러먹다 온 개뼉다귀. 라고. 아낙들 사이에 입방아가 오르내리던 그녀가 그녀임을 동길은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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