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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상 바오로 Oct 17. 2022

프로젝트 파이낸스 강의/제8강(참고자료3)

(에피소드) 개도국 PF 프로젝트에 default가 발생하면 벌어지는 일

서양의 합리주의에는 항상 ‘사유’라는 중간자가 개입된다. 즉, 모든 판단에는 그 근거가 되는 ‘왜’라는 질문이 따라붙는다. 동양적 사고체계는 대체적으로 이러한 매개적 사유를 거부한다. 매개체를 통할 경우 왜곡이 일어난다고 보는 것이다. 대신, 감각과 직감을 중요시한다. (그래서 지적 직관을 중요시하는 베르그송의 철학이 동양적 사유방식과 유사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라고 들은 바 있다.) 이러한 사고체계는 대개 과학의 발전에 부정적으로, 그리고 예술의 발전에 긍정적으로 작용하는 경향이 있다... 고 들은 바 있다.   

한편, 감각과 직관의 철학은 동양적 자연스러움을 배태하게 되는데, 그 자연스러움의 멋들어진 예는 아래와 같다.  


“소학은 어떻든가? 글이 아니라 몸과 같았습니다. 스스로 능히 알 수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랬지, 그랬겠어. 그랬습니다. 물 뿌려 마당 쓸고 부르면 대답하는 일이 근본이라고 했는데, 그 분명함이 두려웠습니다.” (「흑산」, 김훈)  


“어찌 홍시라 생각하느냐? 예? 저는... 제 입에서는... 고기를 씹을 때... 홍시 맛이 났는데... 어찌 홍시라 생각했으냐 하시면 그냥... 홍시 맛이 나서 홍시라 생각한 것이온데...” (MBC 드라마 「대장금」, 정상궁의 물음에 대한 어린 장금의 답변)  


즉, 동양의 자연스러움은 말이나 글이 아니라 몸이다. 젖먹이가 젖 달라고 우는 것이며, 여인이 귀밑머리를 날리는 것이며, 사내가 바지춤을 올리는 것이며, 그리고...


그리고, 복지부동형 인간이 부동하는 것이다. 그에게 왜 부동하느냐고 묻는 것은 무의미하다. 동하지 않는데, 어찌 부동하지 않을 수 있겠냐는 답변만이 되돌아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의 부동 행위는 행위예술(주요 관광지에서 볼 수 있는 페인트 떡칠형 아방가르드)로서 감상해 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와의 모든 소통 행위는 무한 루프에 갇히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이곳에서는 쇼생크 탈출에서 썼던 방법이든 프리즌 브레이크에서 썼던 방법이든 모조리 소용이 없다. 예술은 생리적으로 계획의 대상이나 분석의 대상이 되기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유일한 대응방법은 법에서 정한 절차에 따른 철거뿐이다. (아니면 나 또한 내 몸에 페인트를 부어버리는 방법이 있다. 나아가, 똥을 바르면 이길 수도 있다.)




... 그는 여유 있는 표정으로 “아이고~ 마, 잘 지냈습니까~?” 했다. 나는 운율을 맞춰 “아이고~ 어데예~” 했다.    


그는 “내가 이래 봬도 U국에서 8년이나 근무해서 그놈들 생리를 자~알 압니다.” 라고 했다. U국 인간들을 묘사하는 그의 손짓은 그야말로 자유로워 보였다. 나는 “아이고~ 그래 잘 아시는 양반이 어째 그래 밖에 못했습니까?” 라고 했다.


나의 송곳과 같은 타박에 그는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 생각지도 못한 지점에서 쑥 들어와 자존심이 상했던 것이다. 긴 침묵은 상대방에 대한 예의가 아니므로 이번에는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나는 “어떻게든 합의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대로 손 놓고 있다간 사업이 아예 망가질 수도 있으니, R국 파트너와 서로 조금씩 양보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라고 했더니, 그는 곧바로 “어데예~ 우리가 잘못한 것이 있어야 양보를 하지요. 양보하면 지는 거예요. 양보는 배임이에요, 배임.” 이라고 했다.


초등학교 때 읽은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염소들이 떠올랐다. 까만 염소든 하얀 염소든 모두 배임을 한 게 틀림이 없다. 윤리 선생님은 우리에게 뭘 가르치신 걸까? 게다가... 지금 상황에서 R국 상대방은 염소가 아니다. 곰이다. 다만 자기도 잘못한 게 있어 염소에게 욕을 먹고 있는 곰이다. 그리고 나는... 외나무다리 아래에서 입을 벌리고 있는 악어다. 곰이 떨어지면 나도 상처를 입겠지만, 설마 곰이 떨어지겠어?  


해서 말했다. “음... 그러다가 떨어지면 어떡해요? 제가 먹을 수도 있는데...” 했다. 그는 “아니, 한국 악어가 한국 염소 먹으면 됩니까? 힘을 합쳐서 R국 곰 몰아내야지요. 안 그렇습니까?” 했다. 거 참 학습능력 떨어진다.   


“아니, 저는 다리 밑에 있잖아요... 제가 어떻게 곰 몰아내요? 게다가 악어라고 해도 물 밖에서는 새끼 곰 상대하기도 쉽지 않은 거 잘 아시면서...” 라고 하니, 그는 “그럼 뭐 저도 안 움직이렵니다. 곰이 먼저 움직이겠지...” 라고 했다. 곰이 먼저 움직인다는 것은 앞발로 단숨에 염소의 숨통을 끊어놓겠다는 건데, 알고나 하는 소린지 모르겠다.




대화는 한국(공기업) 사업주와 파트너인 U국 사업주간 의견 불일치 때문에 default가 발생한 사업에 대한 문제 해결 방안을 도출하기 위해 모인 자리에서 나눈 내용이다. 논의는 지지부진했고, 나는 정해진 날까지 해결방안을 제시하지 않으면 담보권을 실행하겠다고 윽박질렀다. 그는 속이 탔다. 문제가 터져도 내년에 터질 것이니, 올해만 무사히 넘기면 이 짐은 후임자에게 넘길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는 입으로는 “힘을 합쳐 이 난국을 헤쳐나가자”고 말하지만, 속으로는 ‘올해만 제발 문제 삼지 말아달라’고 외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같은 편(?)’이어야 할 것 같은 이 금융공기업 직원이 자꾸만 “어데예~ 문제가 있으면 초장에 때려 잡아야지요~” 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환장할 노릇인 것이다.  

사실 환장할 사람은 나다. 나는 금융기관 직원이다. 통상적인 광경은 이래야 한다. 우선 문제가 생긴 사업의 사업주들끼리 협의를 거쳐 해결방안을 마련하고, 이후 금융기관에게 공손하게(왜냐하면 약속을 어긴 것은 즤들이니까), 그리고 미안한 마음으로 도움을 청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인간들은 즤들끼리 싸우고 나서, 서로 자기 편 들어달라고 내게 징징거리는 것이다. 하도 어이가 없어, 그럼, 이렇게 저렇게 해보세요, 하고 방법까지 알려줬더니, 그건 배임이라고 헛소리를 한다.    


배임 운운은 매우 한국적인 개소리다. 이 사업의 준거법은 영국법이다. 영국법상 회사의 부도가 예상되면, 그 회사의 임원은 채권자들의 이익을 보호하여야 하는 의무가 있다. 그런데 그는 왜 배임을 운운하는 걸까? 그는 아마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배임 같아서 배임이라고 말했는데, 왜 배임이냐고 물으면... 내 맘입니다.” 아마도 인터넷 포털에서 매일 보는 것이 배임 관련 뉴스이니, 자신도 그 정도 급은 되는 인물로 착각하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그런지, 배임을 운운하는 그의 태도는 참으로 당당해 보였다. 팔짱 끼고, 다리 떡 벌리고. 매우 자연스러운 탐관오리의 자세이다.   


더 이상 얘기할 것이 없어 금세 마감된 회의를 마치고 회사로 돌아오는 길에 탄 택시에서 우리는 분통을 터뜨렸다. 저 인간들 공기업 직원 아니냐,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하는 사업을 저딴 식으로 방치해도 되는 것이냐, 이것이야 말로 국민에 대한 배임 아니냐, 계속해서 금지된 곳에서 예술행위를 하시겠다고 하면 확 철거해 버리면 되지 않느냐 등등. 분노가 절정에 달할 즈음, 택시 기사님이 슬그머니 입을 여셨다.

“많이 힘드시죠? 저도 예전에 공기업에서 근무했습니다.” 하셨다. 우리는 (나 포함) 공공기관 직원 전체를 싸잡아 험담을 늘어놓고 있던 중이어서 흠칫했다. “아, 네... 그러셨어요? 혹시 어디서 근무하셨어요?” 했다.   

“석탄공사에서 근무했죠.” 라고 하시길래, “어휴... 석탄... 많이 힘드셨겠다. 에... 그리고 저 같은 금융기관 직원들 상대하느라 힘드셨겠네요?” 라고 답하며 전현직 공공기관 직원 간 거국적인 화해를 시도했다.   


“아유... 금융기관 상대는 일도 아니었습니다. 저는 그... 사회부 기자들 상대했는데, 그 양반들 생각만 하면 지금도 자다 벌떡 일어납니다. 아니, 그 왜 예전에는 가끔씩 연탄 불량품이 좀 있었지 않습니까? 추울 때 연탄에 불 안 붙으면 참 화가 많이 나죠. 그런데... 그때마다 기자양반들이 우리 회사 욕하는 기사를 그렇게 써대더라구요. 아니, 연탄에 문제가 있으면 연탄공장에 항의를 해야지, 왜 석탄공사를 물고 늘어지냐구요, 참.” 이라고 하셨다. 나는 냉큼 “네에, 그 양반들, 라면 맛이 없으면 밀가루 공장 탓할 양반들이죠, 암요.” 했다.


그래, 세상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갑을관계가 중요하고, 인센티브가 중요한 거지, 개별 행위예술가에게 무슨 죄가 있겠냐. 게다가 공운법(공공기관운영에 관한 법률)을 한 번 봐라. 예술 안 하게 생겼나. 또, 부동 씨가 부동한 것은 어릴 때부터 부동자세 교육을 많이 받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동산을 이기는 것이 부동산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일 수도 있고, 그리고... 그래,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는 마치 필경사 바틀비의 'I prefer not to'를 그만의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지. 아무렴 그렇고 말고...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


"카톡" 울렸다. 부동 씨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빠르게 내용을 읽은 나는 나지막이 "XX" 하고야 말았다. 서양의 합리주의란 것도 다 개소리다. 정약전과 김훈이, 정상궁과 장금이가 저 멀리서 나를 보며 낄낄거리며 웃고 있었다. 그래, 인생 뭐 있냐, 똥칠 한 번 하지 뭐. 정신줄 놓고 중얼거리는 내 표정을 바라보는 동료의 얼굴은 이미 똥 빛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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