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라고 쓰긴 했으나 지은이보다는 엮은이라는 말이 올바르다. 이북으로 읽었던 산문집 <내가 생각한 인생이 아니야>가 저자를 처음 만난 작품이다. 책을 읽은 사람은 알겠지만 저자는 범상치 않은 인물이다. 시인이라기보다는 수행자에 가까운 느낌이랄까. 세계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고된 수행을 온몸으로 느끼기 위해, 세상으로부터 깨달음을 얻기 위해, 영혼을 맑게 정화하기 위해 노력하는 시인이 손수 엮어서 만든 시집이라니 호기심이 생겼다. 고대에서부터 근현대까지 시간을 통달하는 수십 명의 작품이 실려 있다니 궁금하지 않은가.
징검다리 휴일 중간에 연차를 써서 혼자 서울에 갔었다. 남산서울타워 전망대에 올라가 엽서 몇 장과 서울 야경 전경이 담긴 파노라마 카드를 샀고 ― 그 카드는 지금 내 앞에 붙어 있다. ― 전망대에서 내려와 명동으로 향했다. 친구들과 여름휴가를 맞이해 놀러 왔었던 거리에 고양이 카페가 있었는데, 회사에서 고양이 카페도 생각보다 좋다는 말을 듣고는 용기를 내어 가 보았다. 생애 첫 고양이 카페였다. 왠지 고양이 카페라고 하면 '관리를 제대로 안 하는 것 아닌가', '고양이 카페가 아니라 고양이 학대 카페면 어쩌나' 같은 생각이 들어서 은근히 거리감이 있었는데, 내가 방문한 곳은 남산서울타워 근처에 있는 카페 중에서 가장 리뷰가 좋은 편이었고 그래서 큰맘 먹고 찾아가기로 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동안 심장이 얼마나 떨렸는지….
그곳에서 이 책을 읽었다. 평일이어서 그런지 손님은 많지 않았고, 사장님이신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사장님은 매우 나긋나긋하고 친절하신 분이셨고, 고양이들은 정말 귀여웠다. 나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왠지 모든 손님들이 고양이처럼 조용히 움직이고 있었기에 나 또한 그런 분위기에 따라야 할 것 같았다. 캣타워, 의자, 바닥 곳곳에서 곯아떨어진 고양이들이 보였다. 살금살금 다가가 털을 쓰다듬었는데 아주 부드러웠다. 고양이들은 유연하고 여유로운 동작에 눈빛도 제법 거만하고 냉정하다. 사뿐사뿐 걸어 다니는 모습을 보니 나까지 그렇게 움직여야 할 것 같아서 은근히 고양이 눈치를 살폈다. 물론 고양이들은 도도했다. 손을 뻗어도 쉽게 다가오지 않았다. 마치 '고작 그 정도로 내 관심을 끌고 싶은 거야? 어림도 없지.'라고 말하는 듯했다.
그래도 고양이 한 마리는 나와 눈이 마주치고는 간드러진 울음소리를 내며 다가와 내 다리에 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인사인지 그냥 지나간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기뻤다. 열심히 사진을 찍다가 고양이를 쓰다듬다가 책을 읽다가를 반복했다. 독후감인데 잠시 이야기가 딴 길로 샜다. 아무튼 한산하고 조용한 그곳에서 읽는 이 시집은 생각했던 것보다 좋았다. 인상 깊은 시는 귀퉁이를 접어서 따로 표시까지 해 두었다. 책을 접으면서 읽은 책은 이 시집이 처음이기도 하다.
이 시에 실린 작품은 고전이라고 할 만한 것들이 많다. 예전부터 구전처럼 내려온 작자 미상의 시, 고대 이집트 벽화에 새겨진 시, 어느 지역 원주민들의 노래, 종교적인 잠언시나 격언시 등등. 평소에 가장 쉽게 접하는 한국의 서정적인 현대 시와는 확실히 결이 다르다. 작가의 내면이나 바깥세상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은유보다는 직관적이고 솔직한 교훈을 담은 작품이 많다.
이렇게 말하면 교과서처럼 지루하고 딱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테지만, 그랬다면 이렇게 독후감을 쓰지도 않았겠지. 오랜 세월 동안 후세에 전해진 작품에는 특별한 가치가 있다. 현대적이고 세련된 것들만 접하다 보니 정작 고전의 참맛을 잊고 있기도 했다. 담백하고 맑은 맛, 인간의 모든 구석과 세상의 모든 존재에 대해 이야기하고 노래하는 시의 이상야릇한 온기와 동질감.
모든 문학이 그저 문학(文學)만으로 존재하는 건 아니다. 그중에서도 시(詩)는 탄생 자체부터가 의미심장하다. 기승전결이 모호하지만 기승전결이 완벽하게 존재하는 글. 존재, 의미, 가치, 세상, 이치, 마음, 사랑, 사람, 관계 등에 깊은 뿌리를 두고 자신의 내면 중심에 가까워지는 글이 바로 시라는 것이다. 그러나 시는 완벽하게 정의를 내릴 수 없는 존재. 나는 문학계의 거장도 아니고 유명한 시인도 아니니 시를 논할 자격은 더욱이 없다. 하지만 누구나 이야기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 것이 바로 글, 시, 산문과 작문이 아니던가!
138p - 시는 인간 영혼의 자연스런 목소리다. 그 영혼의 목소리는 속삭이고, 노래한다. 그 목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잠시 멈추고 귀를 기울여야 한다. '삶을 멈추고 듣는 것'이 곧 시다. 시는 인간 영혼으로 하여금 말하게 한다. 그 상처와 깨달음을. 그것이 시가 가진 치유의 힘이다.
138p - 처음 시를 쓰기 시작했을 때, 나는 내가 사용한 언어들이 '다른 어떤 장소'에서 온 언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언어들은 내가, 그리고 사람들이 주위에서 늘 쓰는 그런 언어가 아니었다. 훗날 나는 그것이 영혼의 목소리임을 알아차렸다.
시는 유난히 읽을 때 마음속 무언가를 톡톡 건드리는 느낌이 든다. 탄탄하게 짜인 소설이 의식을 순식간에 몰입하게 만든다면, 시는 소설처럼 따라가지는 않되 곁을 떠나지도 않는다. 소설이 태양의 이야기라면 시는 달의 이야기 같다. 작가는 시가 영혼을 치유하는 힘을 가졌다고 말한다. 얼핏 들으면 어느 사이비 종교의 주문 같기도 하지만, 생각해 보면 정말 그렇다. 노래가 마음을 다스리고 음악이 영혼을 치유하듯이. 책과 글이 밋밋하고 재미없는 나를 그나마 다채로운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것과 같다. 시는 나를 더 생각하고, 더 느끼고, 더 호흡하는 사람이 되게 한다.
시를 쓸 때는 내가 꼭 다른 사람이 된 것 같다. 인격은 그대로인데 의식은 달라지는 느낌이다. 이게 무슨 헛소리인가 싶을 텐데, 소설을 쓸 때 나오는 단어와 시를 쓸 때 나오는 단어는 전혀 다르다. 소설을 쓸 때는 시를 쓰지 못하고 시를 쓸 때는 소설을 쓰지 못하는 것이다. 내가 읽고 쓰는 시들은 꼭 다른 세계에서 온 언어처럼 느껴진다. 분명 내가 아는 언어인데, 읽고 말하고 듣고 쓰기가 모두 가능한 언어인데 동시에 내가 알던 언어와 다른 모습이다. 안다고 생각했던 단어들이 전혀 모르는 모습으로 변할 수도 있구나. 그걸 시를 읽으면서 조금은 깨달았다. ― 그 사실을 가장 실감했던 때는 목정원 작가의 산문 <어느 미래에 당신이 없을 것이라고>와 <모국어는 차라리 침묵>을 읽었을 때다. ―
27p - 만일 빵이 부족하고 세상이 춥다면 / 그것은 비의 잘못이 아니라 / 사람들이 너무 작은 심장을 가졌기 때문이지. [장 루슬로 - 너무 작은 심장 中]
사람들의 심장이 작으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심장이 크게 뛰지 않으니 세상에 퍼지는 온기도 없어진다. 고동이 들리지 않는다. 남을 배려하고 세상을 사랑하는, 무언가를 베풀고 나누려는 인간적인 마음이 사라진다. 심장이 없다는 건 인간으로서의 마음을 잃어버렸다는 말과 같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더욱 크고 뜨거운 심장을 가져야 한다. 자신의 체온과 심장 박동을 널리 퍼뜨릴 수 있도록. 추운 사람, 배곯은 사람, 아픈 사람, 어려운 사람을 외면하지 않고 어떻게든 손길을 내밀 수 있도록.
52p - 그 사막에서 그는 / 너무도 외로워 / 때로는 뒷걸음질로 걸었다. / 자기 앞에 찍힌 발자국을 보려고.
이 시는 '오르텅스 블루'라는 시인이 쓴 작품이다. 파리 지하철 공사에서 공모한 시 콩쿠르에서 8천 편의 응모작 중 1등으로 당선되었다고 하는데, 그의 본명은 '프랑수아즈 바랑 나지르'이며 첫사랑에 실패한 후 정신 발작을 일으켜 병원에서 요양 중일 때 이 시를 썼다고 한다. 얼마나 큰 외로움을 담아서 이 시를 쓴 것일까. 그는 홀로 사막을 걷고 있었다. 사람들이 가득한 도시에서도 사막을 걷는 것처럼 외로웠고, 그 속에서도 사람의 온기와 애정이 그리워서 뒤로 걸으며 자신의 발자국을 바라본 것일까. 이 시는 우리나라에서도 제법 유명한 편이라고 한다. 감명 깊게 읽어서 에이포용지에 시를 써서 책상 앞에 붙여 두었다.
58p - '이곳'보다 더 나은 '그곳'은 없다. / 다른 사람들은 모두 당신을 비추는 거울이다. [체리 카터 스코트 - 삶이 하나의 놀이라면 中]
힘든 시절을 견딜 때나 목표를 위해 열심히 노력할 때 필요한 것은 역시 믿음과 희망이다. 한계에 다다르는 것 같으면, 이 고난이 끝난 후 맞이할 멋진 세상을 상상하면서 버티곤 한다. 인내는 쓰지만 열매는 달다는 말이 있듯이. 노력을 배신하는 결과는 있다지만 노력 없이 얻어내는 결과는 절대 없다고 하듯이, 이렇게 버티다 보면 반드시 더 좋은 날이 올 것이고 나의 진짜 삶을 시작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믿음과 희망이 헛된 마음이라 말하는 자가 있는가? 그렇다면 마음이 아프기도 하다. 그런 말은 믿음과 희망에 배신당한 사람이 품은 좌절감일 테니까. 앞이 캄캄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기분일 테니.
하지만 그곳이 나의 진짜 삶이라면, 지금 나는 가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인가? 이상적인 미래를 바라보기 위해 추레하고 볼품없는 현재를 외면하고 멸시하는 건 이기적인 마음이 아니다. 인간이라면 당연하게 품는 두려움이자 자기방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을 하찮게 여긴 자가 과연 미래에도 자신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을까, 그런 의문이 든다. 한 곳만 바라보고 달리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는 내가 어떤 길을 지나왔는지 전혀 알 수가 없으니까. 이곳이 싫어서 저곳으로 간다고 해도 이곳에 있었던 내가 다른 인간으로 거듭나는 건 아니다. 누구에게나 외롭고 우울하고 아픈 순간은 찾아오니까. 대부호나 세계적인 톱스타라고 해서 나보다 월등하게 행복한 건 아닐지도 모르겠다. 오히려 가진 게 많은 만큼 더 많이 외롭고, 우울하고, 아플지도 모른다. 모든 이상과 환상은 결국 겪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품을 수 있는 마음이니까.
112p - 내가 생각해야만 하는데도 생각하지 않은 것과 / 말해야만 하는데도 말하지 않은 것 / 행해야만 해는데도 행하지 않은 것 / 그리고 내가 생각하지 말아야 하는데도 생각한 것과 / 말하지 말아야 하는데도 말한 것 / 행하지 말아야 하는데도 행한 것 / 그 모든 것을 용서하소서. [젠드 아베스타 - 여섯 가지 참회]
놀라운 시다. 여섯 가지 참회에 우리가 살아가면서 행하는 모든 실수와 후회가 들어 있다. 해야 했는데도 하지 않은 것, 하지 말아야 했는데도 해버린 것은 어찌나 끈질기게 나를 따라오는지. 평생 떼어낼 수 없는 그림자와 같다. 그림자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없다. 그림자는 내가 존재함으로써 당연히 나를 따라오는 존재니까. 마음, 감정, 삶을 나의 그림자처럼 생각하면 마음이 편하다. 어둡게 드리우는 그림자가 아니라 어딜 가든 당연하게 나를 따라오는 그림자.
이 외에도 인상 깊게 읽은 작품이 많다. '비슬라바 쉼보르스카'라는 시인이 쓴 <첫눈에 반한 사랑>은 시의 전문이 인상에 남는다. 간단히 축약하자면 자신들이 어떠한 운명으로 만나 사랑하게 되었다고 믿는 두 사람이, 사실은 어딘가에서 수만 번 서로를 스쳤을지도 모르고 전혀 자각하지 못한 사이 이어진 연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내용의 시다. 운명이나 인연이라는 말은 지극히 비현실적이면서도 왠지 모르게 낭만적이다. 전혀 논리적이지 않지만 괜히 한번 믿고 싶은 마음이 든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해서 연인이 될 확률은 얼마나 희박한가? 그렇게 생각하면 비단 사랑이라는 건 정말 미약한 운명이나 인연의 끈을 타고 날아와 태어나는 건지도 모른다.
'제프 딕슨'이 처음 인터넷에 올린 뒤 많은 사람들이 한 줄씩 보태어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는 <우리 시대의 역설>이라는 시도 있다. 기술이 발전하고 산업이 발달하면서 세상은 점점 빠르고 간단하고 풍족하고 편리해졌지만, 그만큼 느리고 복잡하고 부족하고 어려워진 것들이 함께 생겨난 현대 사회를 비판하는 내용이다. 이 시도 전문이 모두 마음에 든다. 계속 이어지고 있다면 지금도 뒷내용이 더 생겨났을까? 궁금해진다.
116p - 건물은 높아졌지만 인격은 더 작아졌다. / 고속도로는 넓어졌지만 시야는 더 좁아졌다. / 소비는 많아졌지만 더 가난해지고 / 더 많은 물건을 사지만 기쁨은 줄어들었다. / 집은 커졌지만 가족은 더 적어졌다. / 더 편리해졌지만 시간은 더 없다. / 학력은 높아졌지만 상식은 부족하고 / 지식은 많아졌지만 판단력은 모자라다. / 전문가들은 늘어났지만 문제는 더 많아졌고 / 약은 많아졌지만 건강은 더 나빠졌다.
시의 일부만 읽어도 우리 시대의 역설을 완벽하게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생활이 풍족하고 외관이 화려해질수록 내면은 점점 빈곤해지고 수분기 없이 메마른다. 빈부격차나 사회 양극화는 말할 것도 없다. 우리는 아주 가까이 있는데도 서로를 보지 못한다. 스마트폰의 머나먼 유럽의 아름다운 바다를 감상하다가 눈앞의 전봇대를 확인하지 못해서 부딪힌다. 바로 옆에 있는 사람과도 대화하지 않는다. 함께 사는 사람인데도 그의 목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는다.
비단 지금 사회만의 문제점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백 년 전에도 사회는 비슷했을 테니까. 가진 자는 더 많이 가지고, 가지지 못한 자는 더 많이 빼앗기는 세상이었겠지. 조선 시대에도 구세대는 신세대를 보면서 "요즘 사람들은 이렇고 저런 게 문제다!"라고 이야기하며 훈계했다. 가지는 게 많아질수록 만족감은 점차 줄어드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좋을까. 이대로 특별한 일도 나쁜 일도 없이 그럭저럭 평범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면 좋을 텐데. 마음에 가득 찬 욕심과 미움은 한 움큼 덜어내고, 빈 공간에는 다른 걸 넣고 싶다. 이해심이나 사랑 같은 거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작가는 이 책을 쓰면서 인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인지를 유심히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나도 생각해 보았다. 자기 자신을 다스리는 마음, 삶을 허투루 보내지 않으려는 마음, 그리고 무언가를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 삶은 무언가를 통달하기 위해 사는 게 아니다. 살다가 보면 어느 순간 다다른 곳도 있고, 그렇지 않은 곳도 있을 뿐. 성인(聖人)과 현인(賢人)이라고 무조건 위대한 것만이 아니고, 평범한 사람이라고 해서 보잘것없는 존재도 아니듯이 말이다. 어쨌든 우리 모두 어딘가에서는 둘도 없이 소중한 존재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