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유진 著, <그렇게 우리의 이름이 되는 것이라고> [단편소설집]
- 제목 : 그렇게 우리의 이름이 되는 것이라고
- 저자 : 신유진
- 출판사 : 1984BOOKS
신유진 작가의 책으로 독후감을 쓰는 것이 벌써 세 번째다. 아직 읽지 않은 산문집이 하나 더 남아 있으니, 언젠가는 네 번째 독후감이 올라올 것이다. 이렇게 취향과 감상이 조금씩 쌓이면서 내가 어떤 시절에 어떤 이야기를 사랑했는지, 어떤 작가의 무슨 책을 즐겨 읽었는지 ― 나 자신조차 전혀 몰랐던 ― 궤적을 만들어간다고 생각하면 제법 즐겁다. 때로 세세한 기록은 나를 수치스럽거나 불편하게 만들지만, 지금의 나는 삶의 일부분을 기록으로 남기는 게 좋아서 자꾸 이것저것 끄적인다.
그래서 아직 다다르지 않은 미래의 날을 종종 상상한다. 책장을 답답하게 채우고 있던 수백 권의 책과 수십 권의 공책을 전부 내다 버리는 장면을 그려 본다. 책과 담을 쌓은 나, 일기도 시도 수필도 쓰지 않고 다른 무언가에 빠져든 나를 생각해 본다. 마냥 낯설지만은 않다. 내가 책이나 글과 사랑에 빠진 ― 사랑한다고 말하기도 부끄러울 정도지만 ― 시기는 그리 길지 않다. 어쩌면 첫눈에 반해 한순간에 불타오른 사랑처럼, 책과 글을 향한 나의 애정이나 갈망이 별안간 미지근하게 식어버릴 수도 있는 일이다. 혹은 애타는 갈증을 끝내 채우지 못해 좌절감만 가득 욱여넣은 채 모든 것을 포기하고 뒤돌아 버릴지도 모른다.
그런 불안감을 안고 이 책을 읽었다. 다섯 개의 단편을 재미있게 읽었다. 몰입해서 읽었고, 한 개의 단편을 모두 읽으면 그 뒷장의 여백에 감상문을 썼다. 이 책을 한 문장으로 압축하자면 글의 맨 첫 장에 나오는 작가의 말을 빌려서 쓸 수도 있을 것 같다.
"나는 여전히 사랑하면 조금 나아질 세계를 생각한다."
그렇게 우리의 이름이 되는 것이라고
이야기의 화자인 '나'에게는 '얀(Yanne)'이라는 이름의 애인이 있다. 작은 칵테일 바에서 '나'는 그에게 '기쁠 이(怡)'에 '편안할 안(安)'을 써서 '이안'이라는 한글 이름을 지어 주었다. 이야기 내내 그의 이름은 얀이 아닌 이안으로 나오므로, 이 감상문에서도 그의 이름을 이안이라고 표기한다.
이안은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보육원에서 자라다가 프랑스로 입양되어 줄곧 프랑스에서 자랐다. 그래서 이안은 일곱 살 때까지 불렸을 자신의 한글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며, 한국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는 이안의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나'가 준 선물이 바로 이름이었다. 두 사람은 함께 집을 구하고 한 집에서 산다. 두 사람은 모두 가난하다. 한국에서 온 유학생인 '나'는 집안의 경제적 원조를 받지 못해 온갖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돈을 모았고, 이안 역시 성인이 된 이후로는 스스로 돈을 벌면서 살아왔다.
유복한 부모를 두지 못한 젊은이들의 지갑 사정이야 어디서든 비슷한 양상을 보일 것이다. 사회적 신분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외모, 재산, 학벌, 인맥, 사교성, 부모의 직업, 가정환경 등에 따라서 암묵적인 계층이 빼곡히 존재하는 세상이다. 하물며 타국인, 이방인, 가난한 학생 따위의 이름으로는 누릴 수 있는 자유도 청춘도 시작부터 밑바닥에 가까운 셈이다. '나'는 한국에 있는 친구들을 비롯해 남들에게 보여줄 만한 일상을 누리지 못한다. 예쁜 카페나 분위기 좋은 식당은 물론 에펠탑도 볼 일이 없지만 그래도 이안과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데이트 같은 것'을 한다. 이안이 자신이 일하는 공연장에서 얻어 온 공짜 티켓으로 공연을 보는 것이 바로 그 데이트 같은 것이다. 그들은 일주일 치 식비가 들어가는 고급스러운 와인바나 레스토랑에 가지 못한다. 빈곤한 사랑에 들어선 불안정한 기운을 느끼면서 책을 읽었다.
그리고 이쯤에서 엄청난 스포일러 하나. 이야기가 시작되는 시점부터 이안은 이미 세상을 떠나고 없다. 그는 극장에서 일어난 테러 사건의 피해자였고 '나'는 11월에 열린 추모식에서 이안과 영원히 이별했다. 그러니까 이 단편은 이안과의 '빈곤하고 불안정하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이어가는 사랑'이나 '끝을 향해 내달리던 남루한 사랑의 말로' 따위가 아니라, 그저 연인을 잃은 내가 쓰는 수취인 불명의 편지와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나'는 이안을 만나러 가는 일이 기쁜 일이 아닌 것 같아서 피로한 마음을 느꼈다. 그래서 이안에게서 온 전화를 받지 않았다. 늦어서 미안하다고 얼굴을 보고 사과하면 된다고 생각하면서. 그렇게 '나'는 이안과 다시는 통화하지 못하는 사이가 되었다. 이안에게서 받은 마지막 문자는 "오지 마"라는 말이었다.
'나'는 이안과 같은 테러 사건에서 생존한 이의 인터뷰를 본다. 테러 사건에서 살아남은 남자는 "의식을 잃기 전에는 아내에게 전화 한 통만 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라고 말한다. 그는 자신이 아무 말 없이 죽어 버리면 자신의 아내가 평생 테러범들의 종교와 인종을 향한 분노와 증오를 품고 살아갈 것 같아서 무서웠고, 그래서 착한 무슬림 신자들이 파는 케밥과 쿠스쿠스를 좋아하는 아내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전하고 싶었다. 자신이 공포에 떨며 죽어간 게 아니라 사랑한 기억을 안고 죽었다는 것만을 기억해 주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인터뷰 영상을 보면서, 그저 아내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는 남자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나'의 마음은 얼마나 그날로 되돌아갔을까. 이안에게서 온 마지막 전화를 받는 자신을 수없이 상상했을 것이다. 죽어가면서 이안이 자신을 떠올렸을 순간을 필사적으로 되짚었을 것이다. 얼마나 많은 죄책감과 자괴감이 '나'를 폭력적으로 물들였을지 차마 짐작할 수조차 없다.
32~33p
"(전략) 모르겠어요.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지른 짐승 같은 놈들이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인간이 혐오스러워서 견딜 수 없지만 또 마지막까지 휴대전화를 꼭 쥐고 있었던 사람들을 생각하면, 누군가에게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만 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했던 사람들을 생각하면, 나는 사람을 미워할 수 없어요. 무서웠죠. 끔찍한 공포였고요. 지금도 그 자식들을 죽여버리고 싶어요. 그렇지만 그 모든 것을 이기고 마지막에 남은 것은 아내의 얼굴이더라고요. 그곳에 있던 사람들, 모두 그랬을 거예요. 그러니 증오로는 살 수 없어요. (후략)"
내가 사는 세상은 분노와 증오로 가득하다. 차별과 혐오, 멸시와 경시, 몰지각한 이기심과 타인을 전혀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 차가운 마음이 매일 비처럼 쏟아진다. 이런 세상에서 살다 보면 자꾸 나도 그런 마음에 물든다. 누군가를 향한 경멸과 경계심이 피어난다. 사랑과 이해가 오랜 인내를 거쳐야 하는 열매라면, 혐오와 멸시는 무성한 잡초다. 어느 순간 불쑥 생겨나고 아주 빠르게 성장한다. 뿌리를 뽑는다고 제거되지 않는다. 토양만 있다면 그것들은 언제 어디서든 자라난다. 그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사람은 땅이다. 무엇이든 자라나는 땅. 드넓은 초원이 아니라 초라한 뒷마당에 불과한 땅이다. 그래서 좋은 것도, 안 좋은 것도 얼마든지 뒤덮을 수 있다. ― 모든 열매가 달콤하고 무해한 것은 아니다. 반대로 모든 잡초가 해롭고 거치적거리는 존재도 아니다. 잡초 또한 지구의 생태계에서는 반드시 필요한 존재다. ―
결국 하고 싶었던 말은 '증오로는 살 수 없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사랑만으로 사는가? 그건 아니다. 누구나 타인을 은연중에 미워하거나 시기하면서 산다. 하지만 사람이 증오만으로 살아갈 수 있는가? 그 또한 아니다. 분명 증오심과 복수심으로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다. 세상은 아주 넓고 그만큼 살아가는 인간도 아주 많으니까. 다만 그것은 삶보다는 죽음에 더 가깝다. 혹은 죽음과 가까워지고 있다. 그것은 누구보다 자기 자신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타인을 해치는 마음은 결국 스스로 파멸에 들어서는 길임을 매 순간 느끼고 있을 테니까.
우리는 모든 사람을 이해할 수 없고, 모든 마음을 포용할 수 없고, 모든 사상을 인정할 수 없다. 하지만 끝내 미움과 시기는 내가 사랑하고 아끼는 대상보다 우선시 될 수 없다. 어떤 증오도 사랑을 이길 수는 없다. 인간의 마음이란 그렇다. 만약 어느 살인범을 나의 가족을 잔인하게 죽였다면 나는 그 추하고 보잘것없는 살인범을 평생 저주하고 증오하겠지만, 끝내 죽을 때 떠올리는 사람은 그 살인범이 아니라 나의 가족일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보고 싶다고 생각할 것이다.
화자인 '나'의 이름은 이야기 후반부에서 밝혀진다. '밝을 소(昭)'에 '웃음 은(听)'을 쓰는 '나(소은)'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이안을 떠나보낸 후 누구든 만나려 애쓰기 위해 여러 번 소개팅을 한다. 소은의 다섯 번째 소개팅 상대는 수영 선수 출신이고 이름은 '최시우'인데, '적절할 때 내리는 비'라는 뜻이라고 해서 '비 우(雨)'를 쓴다는 건 유추했으나 '시'는 잘 모르겠다. 아무래도 '때 시(時)'가 가장 가까운 의미가 아니려나 싶다. 시우는 "눈이 내려야 지층 아래 깊숙한 곳까지 물기가 스며든다, 그래야 다음 해에 싹이 잘 튼다"고 말한다. 봄이 반드시 올 테니 그곳에 있던 것들은 쉽게 얼어 죽지 않을 거라고.
땅이란 그런 것일까. 어쨌든 비바람 혹은 눈보라가 몰아쳐야 하는, 여러 계절을 거치면서 단단해져야 하는 것. 아무것도 자랄 수 없는 황무지 같은 사람이 될 수는 없다. 영원한 계절은 없다고 하지만 일 년 내내 추운 지역이 있듯이, 누군가는 지금도 아주 긴 겨울을 살아내고 있을지도 모른다. 봄이 온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이가 곁에 있다면 좋겠지만 어떤 이들은 혼자 살아가고, 그런 식으로 세상에서 혼자가 된다. 혼자 겨울을 살아내는 게 얼마나 춥고 무서운 일이겠는가.
나는 내가 온전히 '혼자'가 된 순간을 떠올리곤 한다. 그런 순간이 불현듯 닥칠 때마다 몸이 오들오들 떨린다. 애정과 연민을 품더라도 그것들이 누구에게도 향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줄 수 없다면 그 마음이 다 무슨 소용인가! 사람은 혼자 얼어붙은 계절을 혼자 살아갈 수 없어서 함께 살아가야 한다. 곁에 누군가가 없다면 자기 자신의 마음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것이 우리 각자의 이름에 매달린 애정이고, 삶을 향한 나의 마음이다.
끝난 연극에 대하여
이야기의 화자인 '나'는 '세계'에 대해 이야기한다. 참고로 세계는 말 그대로 세계(世界)가 아니라 사람 이름이다. 게다가 성까지 합치면 '이세계'가 된다. 사람 이름이 세계라니 의미심장하다. 하기야 하늘, 우주, 태양, 별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도 많은데 세상이나 세계라는 이름이 없을 이유는 또 뭔가. 그들은 이름에서부터 아주 커다란 것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더 부담스럽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만.
세계는 무대에 서지만 연기하는 배우가 아니라 지문을 읽는 목소리다. '나'는 대학 시절에 연극을 전공했지만 관련된 일을 하면서 살지 않는다. 연극을 연출한 선배는 '나'가 대학 시절 내내 따라다니던 사람이었으나 지금은 그저 메마르고 뒤틀린 사람일 뿐이다. 마땅히 이뤄낸 것도 없고 눈에 띄는 성취도 없는 사람. 오래 사귀던 애인은 어느 날 갑자기 공무원과 결혼했고, 친구들과 비교하면 한없이 초라한 연봉과 기약 없는 삶 앞에서 피어난 불안감, 열등감, 수치심을 술에 취해 타인을 모욕하는 것으로 해소하는 사람. 불쌍한 사람이다. 하지만 불쌍하다는 이유로 무례와 모욕을 이해해야 할 이유는 없다.
46p
나는 오랫동안 소망이나 바람, 열정 같은 것들이 아름다운 화단을 만들 것이라고 믿었던 생각을 선배를 보며 버리게 됐다. 감당할 수 없이 그저 뜨겁기만 한 것들은, 가진 것 없이 무한히 자라려는 열망들은 우리 안에 사막을 만든다.
책을 읽다 보면 허를 찌르는 문장을 많이 만난다. 읽는 사람의 마음을 첨예한 손길로 세밀하게 해부하는 듯한 말들. 나는 이 문장이 그런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저 뜨겁기만 한 것들은 결국 사막이 된다. 꿈을 이룬 사람들의 이야기가 영웅담처럼 여겨지는 이유를 안다. 같은 꿈을 가졌던 백 명의 사람 중에서 꿈을 이루는 사람은 한두 명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때로는 백 명 중에서 누구도 자신의 이상에 다다르지 못하고 포기하거나 체념하거나 좌절한 채로 살아간다. 꿈과 희망은 양면성이 있다. 사람을 살게 만드는 동시에 죽어가게도 한다.
사실 노력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라질 때가 더 많다. 내가 정말 너에게 보답하기를 바랐냐고 묻듯이, 그 얄미운 얼굴만 내비치고 혼자 떠나간다. 그래서 최대한 상처를 덜 받고 살아가려면 애초에 기대하지 않는 마음을 가지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또한 얼마나 슬픈 일인지. 기대하고 기다리는 마음, 무언가를 사랑하고 매달리고 열중하고 쏟아내는 마음이, 그 활력이 얼마나 강하게 나를 살아가게 하는지를 알고 있기에 기대하지 않는 삶을 살아가기는 어렵다.
그리고 무언가를 기대하고 기다리는 마음으로 살아왔던 '나'와 세계는 친밀한 관계가 된다. 깊은 사이로 발전하지만 그래서 서로에게 자꾸 상처를 준다. 오디션에서 연이어 불합격 소식을 듣는 세계는 세계대로 예민하다. 어머니를 교통사고로 잃은 후 뇌출혈로 한쪽 발을 저는 아버지, 늙은 할머니와 셋이서 살아가는 나는 나대로 불안하다. 결국 나와 세계는 헤어진다. 그것도 좋지 못한 마지막을 남긴 채로. 영화처럼 아름답고 낭만적인 이별이 현실에 존재할 리는 없겠지만, 한때 서로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한다고 이야기하던 이들이 서로를 가장 경멸하면서 헤어지는 장면은 인간의 삶에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서글픈 모순인 것 같다. 사랑이 사랑으로 식지 못하고 반드시 지저분한 말미를 남긴다는 게. "앞으로도 잘 살아"나 "너와 사랑해서 좋았어"가 아니라, "너 같은 건 지긋지긋해"나 "다 됐으니까 그냥 그만하자"라는 말이 마침표가 되고 만다는 게.
삶이 하나의 거대한 연극이라고 생각해 보았다. 나는 내가 주인공인 줄도 모르고 엉성하고 우스운 연기만 이어간다. 이것은 연기가 아니라 온전한 나의 모습이지만, 되레 연기보다 부자연스럽고 어색해 보인다. 때로는 '진짜' 연기가 훨씬 분명하고 확실하게 내면을 보이고 사람을 투명하게 만든다. 연기는 없지만 연기보다 못한 삶이다. 극적인 사건도, 북받치는 감정도, 절정으로 치닫는 전개도 없다. 태어나서 서너 번 정도 갔었던 소극장이 떠오른다. 그 작고 밀폐된 공간은 마음 같다. 연극이 끝나기 전까지는 문이 열리지 않는다.
첼시 호텔 세 번째 이야기
이것도 첫 번째 이야기처럼 화자인 '나'가 이별한 애인에게 하는 이야기다. 다만 첫 번째 이야기가 비유적인 편지였다면, 이건 확실히 그 사람에게 이야기를 건네는 문체로 이어진다. 글이 아닌 말로 쓰는 편지다. 함께 살면서 고립된 가난을, 불확실한 미래를 향한 불안을, 사랑하는 일을 제대로 사랑할 수 없는 절망감을 나누었던 시절을 이야기한다. '나'는 시를 썼고 애인이었던 '너'는 기타를 쳤다. 수많은 시를 썼지만 '나'가 기억하는 유일한 시는, 자신이 쓴 수많은 문장과 그럴듯한 옷을 입었던 문장이 아니라 '너'의 기타를 등에 메고 걸었던 순간이다. 사랑하는 이가 사랑하는 것을 업었던 등이 가장 아름다운 시로 남았다.
95p
진짜 벽은, 선은, 수 세기 동안 사람들의 머릿속에 존재해 왔어. 아무리 무너뜨리고 지워도 또 새로운 담이 쌓이고 새로운 선이 그어지지. 오래전부터 우리는 고독이 일으킨 모든 범죄들을 테러로 치부해 버려 왔다. 그렇게 되면 해결이 조금 더 간단할 것이라고 믿었었나 봐. 선과 악, 둘밖에 없다면 악을 때려잡으면 그만이니까. 그런데 고독은, 고독은 악이니? 선이니? 내가 평생 이곳에서 느꼈던 고독은 악이었니? 선이었니?
그런 생각을 한다. 지금 내가 사는 이곳과 전혀 다른 곳으로 가면, 나는 과연 얼마나 달라질까. 애초에 무언가 달라지기는 할까? 거리가 다르고, 언어가 다르고, 음식이 다르고, 풍경이 다르고, 언어가 다르고, 호흡이 다르고, 역사가 다르고, 문화가 다르고, 하늘이 다르고, 목소리가 다르고, 웃음이 다른 세상으로 가면. 그곳에서 나는 지금의 나를 탈피하듯 벗어나고 변태한 생물처럼 거듭날 수 있을까? 더 좋은 사람이 되거나 똑똑해지거나 활발해지거나 시야가 넓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낯설고 두려운 땅에 이 몸뚱이 하나만 옮겨놓는다고 해서?
고독은 결국 모두의 몫이다. 시기와 정도가 다를 뿐이다. 아주 늦은 시기에 미미한 외로움만 잠깐 느꼈다가 떠나는 사람이라면, 분명 행운아다. 하지만 이미 외로움을 느끼며 사는 이들은 불운아인가? 사람은 혼자 살아갈 수 없지만 매 순간 함께여도 살아갈 수 없다는 게 나의 믿음이다. 함께 있되 혼자인 순간이 있어야 한다. 오롯이 자기 자신이 되는 순간이 있어야 한다. 그렇기에 고독은 악이 아니다. 고독에서 태어난 공격성과 파괴력도 악이 아니다. 그러나 고독을 무기로 삼아 무언가를 파괴하는 마음은 처절하게 울면서 자멸하는 악이다.
아무리 많은 사연과 부가설명을 갖다 붙인다고 해도 테러와 살인은 명백한 패륜이다. 다만 어떤 범죄가 일어났을 때, 그 사건의 시초가 아주 먼 곳에서부터 시작된다면 그것은 그저 흉악 범죄로 끝내는 게 아니라 그 줄기를 차근차근 따라가야 한다. 가해자를 처벌하고 끝내는 게 아니라 다시는 같은 범죄와 피해자가 생겨나지 않도록, 최대한 뿌리까지 접근할 수 있도록 되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어떤 정치인이나 법조인도 그런 일을 하지는 않는다. 귀찮고 번거로운 데다가 돈도 되지 않고, 시간만 낭비하고, 책임 소재를 따지기도 애매한 일이니까. 방치하면 방치할수록 고독은 방사되고 사람들은 차별과 학대에 둔감해진다. 정신병을 금기시하는 게 아니라, 정신적인 병도 신속한 진단과 치료가 필요함을 인정하고 권장하는 사회가 되어야 하는데 자꾸 우리는 퇴보한다. 결국 고독이 고립이 되어 극단으로 치닫고 나서야 대충 덮기에만 급급하다. 범죄라는 단어 바깥에 존재하는 배경이 철저히 무시되는 세상이라 애석할 따름이다.
언제나 고독감을 마음에 품고 살아가는 '나'와 '너'는 때때로 차별과 조롱의 대상이 되었고, 어디에도 마음을 붙이지 못했다. 모국으로 돌아가더라도 이방인이 되는 처지였다. 이 단편은 삶의 구석구석에 녹아든 고독을 아주 느리게 노래하듯 이야기한다. 혹은 이야기하듯 노래한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들은 레너드 코헨의 <첼시 호텔 두 번째 버전>을 녹음해 듣는다. 또한 '나'의 배 속에 있었던 아기는 이름을 붙여 주기도 전에 죽는다. 임신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그저 열흘 전 즈음에 이미 심장이 멈춘, 모체와 탯줄로 연결되지 못하고 혼자 떠다니는 태아의 모습을 보았을 뿐이다.
이제 '나'의 곁에 '너'는 없다. 오랜 시간이 지났고, '나'는 뇌의 노화로 기억을 서서히 잊어갈 만큼 늙었다. 육체의 노화가 과연 영혼의 마모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칠까?
105p
어느 날 J가 내게 말했다. 사람만이 나와 상관없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웃고 울고, 거짓말인 줄 알면서 믿어 보고, 실망하고 미워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꿈꾼다고. 그래서 시도 노래도 들을 수 있는 것이라고. 그리고 내게 물었다. "그런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담은 시를 쓸 수는 없는 거야?"
이 문장이 진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사람은 사람이 아닌 다른 존재였던 적이 없기에 다른 존재자의 생애를 명확히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학문과 기술이 발전해도 무언가의 속마음을 완전히 파악하고 마치 눈으로 읽듯이 혹은 귀로 듣듯이 분석할 수는 없다. 만약 그런 날이 온다면, 인간의 범주는 더는 인간으로만 그치지 않을 것이다.
정말 사람만이 자신과 상관없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웃고 우는지, 거짓말인 줄 알면서 믿어 보고 실망하고 미워하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꿈꾸는지 영영 확신할 수 없다. 며칠 전에 보았던 다큐멘터리에서는 어린 코끼리가 사자에게 죽임을 당했는데, 다른 코끼리 무리가 다가오더니 사자를 쫓아내고 아기 코끼리의 시체 옆에 머무르며 눈물을 흘렸다. 우리가 한낱 짐승이라며 하찮게 생각했던 존재들이 사실은 인간보다도 복잡한 사고를 하면서 무수한 감정을 느끼며 살지도 모르는 일이다. 사람은 오직 사람으로서의 삶만을 알기에 사람만이 가능한 일이 있다고 믿는다. 기쁨과 슬픔, 신뢰와 배반, 실망과 증오와 사랑, 그 모든 것들을.
고독 역시 인간만이 느끼는 감정은 아닐 것이다. 삶의 일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고독'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다. 고독을 아는 사람, 외로운 순간을 관통해 본 사람이 이야기하는 고독은 그런 경험이 없는 이들의 상상이나 지레짐작으로 쓰인 것과는 조금 다르다. 고독을 아는 사람이 이야기하는 고독은 차분한 얼굴을 하고 있다. 고요한 낯과 소란스럽지 않은 몸짓으로, 어찌 보면 진중하리만큼 묵묵히 그 자리에 있다. 나는 고독을 아주 조금 알 것 같기도 하지만 역시 이것은 착각이다. 나는 고독이 무엇인지 전혀 모른다. 고독을 잘 안다는 게 좋은 일은 아니다. 그저 외로운 삶이 얼마나 슬픈지, 조금 더 잘 알고 이해할 수 있다는 것뿐이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고독과 사랑은 공존할 수 있다. 사랑함으로써, 사랑했기에 그 빈자리의 공허와 그리움을 알 수 있다. 마음에 들어찼던 감정이 있기에 마음에 뚫린 구멍을 느낄 수 있다. 사라진 사람과 사그라든 사랑을 아는 이들은 바로 그들을 위해 노래할 수 있다. 사람의 본질은 완벽하고 완전하지 않기에 조금씩 서로 맞출 수 있다. 이상적인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기에 사람은 타인과 소통하고 관계를 맺고 마음을 나누면서 산다. 사람은 사람을 위해 살지만 사람만을 위해서 살아서는 안 된다. 그 마음은 사람을 위한 일을 만들어낼 것이다.
얼룩이 된 것들
화자인 '나(수연)'는 어린 시절에 부모님과 함께 기차를 타고 외진 '그곳'으로 내려왔다. 사실상 야반도주였다. 불도 켜지 않은 컴컴한 방에서 몰래 나와 도둑처럼 말하고 쥐처럼 움직이며 골목에서 지하도를 거쳤으니까. 흔하다면 흔한 이야기다. 부모 중 누군가의 사업 실패, 도박, 사기, 보증 등으로 집안이 망하는 것. 그리고 아직 어린 자식까지 덩달아 부모와 함께 추락의 비굴하고 비참하고 쌉싸름한 맛을 미뢰로 느끼는 것. 어떤 집단에서든 어린 개체는 힘이 없다. 윗사람의 처지와 태도에 따라 그들의 한 시절이 결정된다는 게 마음 아프다.
'나'는 그곳에서 '은희'라는 아이를 만난다. 같은 학교의 같은 반이었고 같은 동네에 여자아이였는데, 두 사람이 살고 있었던 다리 건너편은 흔히 '못 사는 동네'로 여겨지는 곳이었다. '나'는 그 사실을 몰랐다가 은희를 통해 알게 된다. 같은 반 친구들의 부모가 다리 건너편에서 사는 아이들과는 놀지 말라고 한다는 것을. 은희는 그 말을 직접 들었을까? 어느 몰지각하고 무식한 어른이 그렇게 대놓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급을 나누면서 ― 그것도 무려 집안 형편과 사는 동네를 들먹이는 방식으로 ― 멍청한 소리를 하나 싶지만, 그런 몰지각하고 무식한 어른들이 즐비한 세상인지라 착잡한 마음으로 이야기를 읽어 나갔다.
은희는 가난을 싫어했고 담임교사의 부추김으로 '나'와 묶이는 것을 그리 반기지 않는 눈치였지만, 어쨌든 두 사람은 친구가 되고 매일 같이 하교하는 사이가 된다. 은희는 언젠가 동네를 떠나 서울로 가리라는 꿈을 품고 있다. 은희는 술주정뱅이 아버지와 함께 살면서 폭력과 학대에 시달린다. '나'의 부모는 그런 은희를 불쌍하게 여긴다면서도 그 이상으로 은희를 위하지는 않는다. 어머니는 "은희의 집 근처에 절대 얼씬도 해서는 안 된다"고 몇 번을 강조하고, 아버지는 "남의 집 일에는 참견하는 게 아니다"라고 말하며 예의 무관심하고 무책임한 태도만 보일 뿐이다.
가까워지고 싶어도 그 이상 다가갈 수 없는 존재를 바라보기만 해야 하는 마음이 무엇인지, 소중한 존재에게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는 무력감이 얼마나 깊고 차가운지 어린 시절의 '나'도 깨달았을까? 아니다. 깨달았다기보다는 그저 감정의 덩어리로 느꼈을 것이다. 머리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 있다. 책의 바깥에 있었던 나도 그런 걸 처음 알았던 순간이 있을 것이다. 제대로 기억나지는 않지만.
'나'는 다시 겨울이 오기 전에 가족과 그 도시를 떠났다. 그 후로 은희와는 연락을 주고받거나 만난 적은 없다. 어린이집에 취직한 '나'는 여전히 아이들끼리 사는 집이 어디인지를 묻는 모습을 보고, 자신의 자식과 짝꿍인 아이가 어디 사는지 묻는 학부모를 맞닥뜨리며 은희를 한 번씩 떠올린다. 그저 은희가 어딘가에서 잘 살고 있기를 바란다. 술주정뱅이 아버지의 폭력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살아갔으면 좋겠다고. 그것이 찰나임에도 줄곧 잊히지 않는 추억을 공유하며 사랑했었던 이를 향한 '나'의 마지막 애정이다.
134p
드넓은 초원에 늑대가 산다는 것은 어둡고 초라한 우리로 돌아가야 하는 양들을 위한 위로였을지도 모른다.
나는 이 문장의 '우리'를 두 가지 의미로 보았다. 짐승을 가두어 기르는 우리, 그리고 너와 나를 통틀어 말하는 일인칭 대명사 우리. '나'에게 자신과 은희가 함께 있어서 성립되는 '우리'는 어둡고 초라한 세상이었을지 상상해 본다. 가난한 동네에서 사는 아이들, 다른 부모가 자기 자식에게 말하는 "쟤랑은 놀지 마"에서 '쟤'를 맡고 있는 아이들의 세상은, 갑갑한 울타리를 늑대로부터 지켜주는 안전한 보호막이라고 속여야 했던 곳일까.
'나'는 은희가 자신의 볼 수 없는 깊숙한 곳에 작은 얼룩 하나를 만들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은희라는 이름이 얼룩이 되었다. 은희가 아닌 다른 인물들의 이름도 등장하는데, 그 이름이 무엇인지는 책을 읽고 확인하는 게 좋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삶과 세상을 위해 시위운동을 했었던 학생들이다. 시대의 상징으로 남아 후세의 삶까지 이끄는 이름들.
오랜 시간이 지나도 신기하게 남아 있는 기억, 장면, 잔상이 있다. 어떤 사람, 어떤 말, 어떤 시절, 어떤 순간들 역시 내 속에 남아 있다. 비단 기억이 아니더라도 나의 눈빛이나 표정, 어투, 말버릇과 습관, 문체 같은 형태가 되어 나도 모르는 사이의 나의 몸과 마음에 남아 있다. 내가 거쳐온 모든 시절과 나를 스쳐간 모든 사람들은 그런 식으로 나를 조금씩 키웠을 것이다. 내가 이렇다 할 감정의 정체나 이름을 알기 전에도 그렇게 내게 아주 작은 무언가를 남기고 떠났을 것이다. 후회, 죄책감, 수치심, 기쁨, 그리움, 희열, 허무, 슬픔 따위의 이름을 가진 채로. 세상은 끊임없이 변하는데, 정작 그 안에서 제대로 변하고 있는 것은 얼마나 있을까? 사람은 미처 성장하고 성숙하기도 전에 변하는 세상에 맞춰서 자기 자신까지 주무르고 변화시켜야 한다. 그런 세상 속에서 무언가가 자꾸 내 안에 남는다고 생각하면 조금 무섭기도 하다. 그리워할 틈새도 없이 너무 많은 것들이 존재하는 기분이었다.
바다에 빠지지 않도록
이야기의 화자인 '나'는 유일하게 한국인이 아니고, 유일하게 여성이 아니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프랑스 북서부에 위치한 '브르타뉴'라는 지방에 있는 항구 도시 '팽폴'에서 여름휴가를 보냈다. 특유의 고즈넉하고 평화로운 분위기가 있는 곳. 그곳에는 '나'와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라다가 고등학교 때 이사를 가면서 잠시 연락이 끊어졌었던 친구 '세드릭'도 있었다. 세드릭은 아버지의 트램펄린 장사를 물려받기 위해, 나는 대학에 들어간 이후 첫 여름 방학을 할머니 댁에서 보내기 위해 팽폴에 왔었으며 이후 두 사람은 여름이 될 때마다 팽폴에서 만나 술을 마시는 사이가 된다.
'나'에게는 여자친구 '리사'가 있고, 세드릭에게는 아내 '실비'와 어린 아들이 있다. 니스 출신으로 지중해밖에 모르는 리사는 에메랄드색에 고기잡이 배가 아닌 요트가 떠 있고, 장화를 신은 어부가 아닌 비키니 차림의 여자들이 태닝하는 바다에 익숙한 사람이다. 리사와 연애하는 동안 '나'의 바다 역시 지중해가 되었지만 작은 항구의 비릿한 냄새를 그리워했던 '나'는 결국 쿵쿵 울려 대는 음악에 파도 소리조차 제대로 들을 수 없었던 지중해에 완전히 질려 버렸고, 리사와의 관계도 소원해져서 혼자 브르타뉴에 휴가를 보내러 온다.
세드릭은 알코올 중독자다. 약을 한다는 묘사도 나온다. 예전에 했다가 지금은 끊었다고 하지만 거짓말이다. '나' 역시 금연을 시도하고 있으나 끊임없이 실패한다. 정확히는 '금연해야지' 생각만 하고 담배가 피우고 싶어지면 매번 숨겨 놓았던 담배를 피워 꺼낸다. 중독이란 그토록 무섭다. 중독된 사람들 중에서도 여전히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그만둘 수 있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그리고 그 마음은 죽기 직전까지도 먹지 못한다. 이렇게 보면 인간의 뇌는 참 나약한 존재다. 도파민에 절여지고 둔감해지고 고집이 세지고 더 강한 자극을 쫓다가, 결국 자신이 누군지도 모른 채로 서서히 쇠락하는 것 같다.
인생은 단조로운 일련의 과정이지만 그 안에 들어 있는 것들을 하나하나 꺼내서 보면 징그럽게도 뭐가 많구나 싶다. 기억나지도 않을 만큼 아주 사소한 순간부터 수십 년을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까마득한 시절의 감정들까지. 나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태어나고 몇 개월 지나지 않았을 때의 나도 분명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실상은 외부 자극에 자연스러운 반사 반응을 보이는 것뿐이라고 해도, 분명 한두 살 때의 나는 엄마를 보면서 웃고 새로운 장난감이 보이면 엉금엉금 기어가 그것을 입 안에 넣고 빨다가 빼앗겨서 울었을 것이다.
성장하면서 자아가 형성되고 내가 나인 것을 알면서 타인의 눈치를 보는 방법도 배웠다. 타인의 고통에는 무관심하지만 타인의 수치에는 지나치게 관심이 많은 사회에서 자란 탓에 그걸 너무 잘 배워서 일상생활이 조금 고단하기도 했고 지금도 그렇다. 사랑, 우정, 애정, 연민, 경멸, 증오, 불가해, 자괴감, 수치심, 죄책감, 반성, 성찰, 갈등, 긍정, 부정, 합리화, 고독, 소외감…… 그렇게 표현할 수 없는 복합적이고 난해한 마음을, 무료하고 지지부진한 시간을, 충격적이고 두려웠던 일들을 쌓으면 지금의 내가 된다. 많은 것을 기억하고 또 망각하면서 나는 내가 되었다. 하지만 그 안에 있는 무엇도 완전히 나를 상징할 수는 없다. 나는 한 덩어리 같지만 사실은 아주 잘게 쪼개져 있고 그 조각들은 저마다 나를 이루고 있는 요소들이다.
이야기 속 인물들, '나'와 세드릭과 은퇴한 선원인 '장'과 그의 주변인들이 겪는 혼란, 방황, 지나간 것들을 향한 그리움과 인간관계 속에서 태어나는 체념은 비단 소설 속 이야기만이 아니다. 사람은 망가지는 걸 알면서도 고치지 못하고 ― 혹은 고치지 않고 ― 뻔한 미래를 애써 외면하는 이상한 버릇이 있다. 몰려오는 파도를 그저 관조하는 태도가 있다. 나 자신마저 망치는 삶은 누구의 손에 달려 있는 것일까?
사랑하면 조금 더 나아질 세계
다시 작가의 말로 돌아간다. 사랑하면 조금 나아질 세계. '인생 별거 없다'는 말이 때때로 위로처럼 들린다. 사람은 위대하고 삶은 아름답다고 말하고 싶지만, 반대로 사람은 초라하고 삶은 누추하다고 말하게 된다. 그건 애초에 인생, 그러니까 '인간의 삶' 자체가 구태여 추앙하거나 헐뜯어야 할 존재가 아님을 알고 있어서이다.
나는 인간이라서 인간이 아닌 존재들의 속마음을 알 수는 없으나 멋대로 하나 확신하자면, 인간이 아닌 동물들은 결코 자신의 존재를 과장해서 바라보거나 비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포식자는 피식자를 잡아먹는 자신의 처지를 우쭐해하지 않고 피식자는 포식자를 피해 도망치는 자신의 처지를 원망하지 않는다. 그저 포식자는 살기 위해 피식자를 쫓고, 피식자는 살기 위해 포식자로부터 도망친다. 그리고 그 사이에 무수한 생태와 순환이 존재한다. 그렇게 지구는 지금까지 살아 있다. 지구의 연명에 인간이 미친 이익은 아무것도 없다. 그나마 인간이 만들어내는 파괴와 오염을 같은 인간들이 막아내고 저속화하는 줄다리기가 있을 뿐이다. 멀리서 바라보면 우스운 꼴이다. 닭장을 부수는 닭과 부서진 닭장을 보수하는 닭이 함께 사는 모습을 본다면 인간들도 재미있는 장면이라며 웃지 않겠는가?
인간의 삶은 그 자체로 전부이다. 숨겨진 의미나 숭고한 가치는 없다. 개의 삶, 고양이의 삶, 말의 삶, 비둘기의 삶, 고등어의 삶이 있듯이 인간의 삶도 그저 그 자체로 존재할 뿐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이것은 허무주의나 염세주의에서 태어난 사상이 아니다. 그저 인간중심주의가 꼴 보기 싫을 뿐! 나는 인간을 사랑하지도, 증오하지 않는데 동시에 사랑하지 않는 것도, 증오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애증이라고 하기에는 무관심이고 완전한 무관심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많은 것들을 보고 듣는다. 모순적인 일이다. 나도 내가 하는 말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것처럼, 함께 사는 사람들이 어떤 존재인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다만 인간은 사랑함으로써 조금 더 나아질 수 있다는 말에는 박수를 보내고픈 심정이다. 이해와 존중에서 시작되는 사랑 말이다. 세상에는 휠체어를 탄 장애인을 내쫓는 지하철역이 아니라 장애인과 노약자가 눈치 보지 않고 이용할 수 있는 엘리베이터가 필요하고, 뒤에 사람이 있다면 문을 잡아주는 마음과 쓰레기를 길거리에 버리지 않는 도덕의식이 필요하다. 이런 당연한 말을 하고 있는 것조차 부끄럽다. 타인에게 최대한 관심을 두지 않되 어려운 상황에 놓인 사람을 보면 '나 말고 누가 도와주겠지'라는 생각이 먼저 솟아오르지 않는, 그런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물론 현실적으로는 힘든 부분이 있다. 당장 나조차도 그런 식으로 살고 있지 않으니 말이다. 그래도 길거리에 쓰러진 사람이 있다면 의식 여부를 확인하고 119에 신고는 하겠다.
모든 사람에게 모든 삶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려 한다. 모두가 자신만의 이야기를 가지고 살고, 나의 이야기가 받아들여지기를 원한다면 나 역시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무시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사랑하자. 실행하지는 어렵겠지만,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역시 무엇이라도 아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