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회에 다녀왔다
다섯 번째 일기
전시회에 다녀왔다. 평소에 관심 있게 보던 사진작가의 첫 전시회였다. 종종 SNS 계정까지 훑어볼 정도로 좋아하는 사진작가는 두 명인데 두 작가의 스타일은 정반대에 가깝다. 한 사람은 다채롭고 선명한 색감과 활동적인 장면을 선호하지만 다른 한 사람은 어둡고 칙칙한 색감에 정적으로 멈춘 것들을 좋아한다. 완벽한 이면. 나는 그런 극단적인 것들을 되레 유사하다고 느끼곤 하는데, 명확한 기준은 없다.
이번에 다녀온 전시회의 주인공은 후자였다. 그의 사진은 얼핏 보면 전체적으로 어두운 탓에 분위기도 어두컴컴하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명암 대비가 분명하고 작가의 의도에 맞춰서 초점이 잡혀 있다. 엄숙하고 진중한 영화의 오프닝 장면처럼 보이기도 한다. 뭉근하게 뜨거워지는 가슴을 억누르고 조용하지만 미묘하게 어수선한 전시회장을 천천히 느린 걸음으로 배회했다. 그러고 있으면 사진 속에 영원히 박제된 세상에 발을 잘못 들여서 고요하게 뒤틀린 세계를 방황하는 기분이 든다. 맞다, 이건 헛소리다. 그리고 나는 헛소리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이 되고야 말았다.
괜히 뜨끔한 마음이 들어 고백하는 것인데, 그저께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을 모두 책장 가장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읽다 보니 자꾸 그의 문체가 말투에 전염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다자이 특유의 자괴감과 우울감과 인간 혐오와 연민이 그득한 소설은 호불호가 갈린다. 나는 인간 실격을 상당히 재미있게 읽었지만 작가의 말투 혹은 습관, 그걸 넘어 사상까지 옮아버리는 일은 제법 큰 문제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큰 문제도 아니고 제법 큰 문제다. 문제가 되는 것도 아니고 문제가 될 수도 있다. 이건 뭐든 확정하기를 두려워하는 나의 화법이다. 작가처럼 자살하기 위해 몇 번이나 시도하는 일은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작품은 작품대로 보고 작가는 작가대로 보는 시선의 분리. 그건 몰입력 좋은 독자의 숙제로 남는다.
인간은 철저하지 못한 존재라서 어떤 일을 결심하고 실행하기까지 너무 많은 시간이 걸린다. 나도 인간이기에 당연히 그런 부분에서는 몹시 비합리적인 일을 많이 저지르고, 아까운 시간을 덧없이 낭비한다. 가끔은 시간 낭비가 무엇인지 생각한다. 무엇을 할 때 사람들은 시간을 낭비한다고 생각할까. 중요한 시험이 있는데 공부하기 싫어서 온갖 소셜 미디어 계정을 돌아보거나 유튜브에서 철 지난 예능 프로그램 영상을 찾아볼 때, 그럴 때 사람들은 시간을 낭비한다고 생각할까? 아니면 목적지까지 빨리 도달할 수 있는 지름길이 있는데도 굳이 길을 돌아서 갈 때 시간이 낭비된다고 생각할까? 그렇다면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 방법을 잘 알면서도 굳이 시간을 버려가면서 의미 없는 짓을 저지르는 이유는 무엇인가. 나는 사람이기에 같은 사람을 알지 못하고, 사람이기에 다른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알 수가 있다.
다만 이것은 인간 고찰 일기가 아니라 엄연한 유서 겸 일기다. 그러므로 나는 죽을 때까지 인간이 무엇인지, 그들은 어떻게 사는지, 인간이 느끼는 감정의 정체가 무엇이고 그게 인생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알지 못할 것이다. 분명 내가 인간임에도 그렇다. 그 이유도 똑같다. 나는 인간이니까. 같은 부류를 가장 잘 알고 있다고 가장 쉽게 착각하는 존재로 태어나고 말았으니까.
존재와 인생에는 어떠한 기준이나 공통점이 없다. 교집합이 특별한 의미라는 생각은 사람이 가장 쉽게 품고 살아가는 오류다. 물론 이것은 그저 살아가는 동시에 죽어가는 나의 단상. 살아감과 죽어감이 동시에 공존한다는 것은 생명의 영원한 아이러니다. 내가 하는 모든 말들은 정답이 되지 못한다. 오답이거나 좋게 봐야 부분 점수를 받을 서술형 해답일 테지. 어쩌면 내가 살아온 모든 시간은 그렇게,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동그라미와 빗금으로 칠해져 이도 저도 아닌 시험지로 남아 영영 잊힐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