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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야사 Sep 07. 2024

여섯 번째 일기

오랜만에 고등학교 동창이었던 친구를 만나고 돌아왔다


여섯 번째 일기


오랜만에 고등학교 동창이었던 친구를 만나고 돌아왔다. 삼 년 만에 만난 친구는 거의 그대로였다. 특유의 부드러운 말투부터 적당히 유쾌하고 대화를 잘 이어가는 사교적인 성격, 중견 규모의 탄탄한 직장, 크게 모난 구석 없는 외모까지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와 매우 흡사했기에 ― 어쩌면 당연한 말인지도 모르겠지만 ― 하마터면 친구를 저번 달에도 만났다고 착각할 뻔했다. 먼저 연락한 사람은 친구였다. 내년 초에 결혼할 예정이라고 했다. 대학생 시절부터 사귀었던 사람인데 두 번의 이별과 재회를 겪으며 비로소 법적 구속을 통한 관계의 확정을 맺고 싶어 졌다고.


나는 친구의 말을 한참 곱씹었다. 법적 구속을 통한 관계의 확정. 아마 규칙을 넘어선 법률이라는 존재에 이토록 집착하는 생물은 인간이 유일무이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나 자연의 섭리는 잘난 인간들의 법률 따위는 끼어들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하고 견고한 규모다. 나는 컵의 절반이 얼음으로 채워진 커피를 마시면서 사랑하는 사람과 법적 구속으로 얽힌 친구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상상했다. 모난 구석 없이 유순한 친구이니 적당히 잘 살아가겠거니 생각했고, 그러길 바라는 마음이 컸다.


결혼이라는 단어는 생소하게 다가왔다. 나에게 결혼은 마치 진짜 어른이 되어야만 할 수 있는 일련의 자격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하겠다는 생각은 한 적 없었고 애초에 서른 살에 죽을 예정인 내가 구태여 돈과 시간과 마음을 쓰며 연애와 결혼에 매달릴 이유도 없었으므로, 나는 설렘인지 체념인지 모를 정도로 모호하게 웃는 친구 앞에서 비슷한 표정으로 웃음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축복은 하지 못하더라도 저주는 퍼붓지 말자는 마음이었다.


결혼하면 앞으로는 만나기 힘들겠네. 나의 질문 같은 혼잣말 ― 혹은 혼잣말을 빙자한 질문 ― 에 친구는 결혼과 친구가 무슨 상관이냐며 웃었다. 친구가 말한 '그이'는 배우자가 친구 만나러 간다고 할 때 불만을 표출할 정도로 미성숙하고 자기중심적인 사람이 아니라고 했다. 그이라는 예스러운 호칭을 내뱉는 친구가 문득 무르익은 어른처럼 느껴졌다. 남편이나 신랑이라고 말했다면 별생각 없이 넘겼을 텐데 남편도 신랑도 아닌 그이라니. 사랑에 빠진 친구는 누가 봐도 애틋한 모양새였다. 원래도 다정했던 사람이었지만 확실히 우정을 넘어선 이성 사이의 사랑에서는 내가 몰랐고, 그동안 알려고 하지도 않았던 모습이 보일 수밖에 없었다. 색다른 눈빛과 생경한 표정. 나보다 두 달 늦게 태어난 친구가 어느 먼 친척 어른 같았다.


나는 친구에게 행복하게 잘 살라는 말을 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는 축의금을 고민했다. 작년에 결혼했던 직장 동료의 결혼식에서는 십만 원을 냈으니 친구에게는 아무리 못 해도 족히 이삼십만 원은 내야 할 터였다. 모든 속마음을 터놓을 정도로 깊은 사이라고는 말하기 어렵지만 어쨌든 얼굴만 알고 데면데면 지내는 친구도 아니었으니까.


결혼하면 친구는 아이도 낳을까. 친구가 누구의 배우자가 되는 것보다 누구의 부모가 되는 일이 훨씬 낯설었다. 친구의 몸속에 잉태해서 탯줄로 연결된 채 성장하다가 이내 친구의 몸을 비집고 태어나는…… 작은 사람이라니. 탯줄이 잘리면 완전히 독립하여 이 세상에 없었던 인격체로 자라나는 아이라니. 한 생명에게 삶이라는 괴로운 여정을 일방적으로 부여한 대가는 희생과 애정을 책임으로 받들어 베푸는 일. 친구도 아이를 낳으면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는 사실이 도무지 현실처럼 보이지 않았다. 나는 한평생 자식으로만 산 인간이었기에 부모라는 이름이 더해진 무게를 견뎌내는 삶은 더욱이 상상할 수 없었다. 다만 그 이상으로 그들의 미래를, 친구와 친구의 예비 배우자와 태어날 수도 있고 영원히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는 그들의 자식을 생각할 수는 없었다. 나는 더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만약 아이를 낳는다면 나처럼 서른 살에 죽겠다는 계획은 세우지 않는, 그런 사람으로 자랐으면 하고 마음속으로 조용히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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