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루시아 Jun 10. 2023

집 앞 횡단보도에 신호등이 생겼을 때

집 앞 횡단보도에 신호등이 새롭게 설치되었다. 원래는 신호등 없이 자유롭게 건널 수 있는 곳이다. 당신이라면?

1. 오! 신호등이 생겼네, 신호 맞춰 건너야지. (아이 ver. 엄마 신호등이 없었는데 생겼어! 이제는 초록불에 건너야 해)

2. 신호등이 생긴 걸 깜빡 잊고 그냥 건넌다.


1번이든, 2번이든 그저 평범한 반응이다. 그렇다면 나는?

3. 음향신호기가 없네. 120 다산콜센터에 전화를 하자. 



집 앞 횡단보도에 신호등이 생겼다.

그런데 신호등에 음향신호기가 없었다. 신호등 자체에서 나는 소리도 없다. 남편은 횡단보도를 건널 때 주변 사람의 동향을 살펴 눈치껏 건너거나 요즘엔 바닥신호등이 있어서 바닥을 쳐다보고 있다가 바닥신호등 불이 바뀌는 것을 확인하고 길을 건넌다. 그런데 바닥신호등도 없다. 남편은 과연 길을 잘 건널 수 있을까. 신호등이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터라 차들도 신호가 없는 것에 익숙하여 그냥 지나가기도 한다. 남편은 과연 차에 치이지 않고 집에 잘 돌아올 수 있을까. 신호등 하나에 별별 생각이 다 든다. 오버하는 것이라 해도 어쩔 수가 없다. 이 정도면 병일까.


02-120에 전화를 걸었다. 서울시 다산콜센터 전화다. 예전에 남편이 새로 발령받은 학교 앞에 갔다가 음향신호기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것을 보고 전화 걸어 수리를 접수한 적이 있어 이번에도 이곳으로 전화를 걸었다. 상황을 설명하니, "고장신고접수는 다산콜센터에서 받고 있지만, 신규접수는 우리 관할이 아니라 경찰서 교통과 담당"이라며 경찰민원접수 182 번호를 알려주었다. 그러면서 "우리 담당은 아니지만 경찰민원 쪽에 우리가 말을 해놓겠다"라고 한다. 그러면 그 민원이 받아들여진 건지 아닌지 회신이 오냐고 물으니, '우리 담당'이 아니기에 회신이 가지는 않는단다. 그럼 그냥 182로 내가 전화를 해보겠다 했다.


182로 전화를 걸어 상황을 설명했다. 그러니 그건 자기들 담당일이 아니고 서울시 다산콜센터로 전화하여 민원접수를 해야 한단다.... 다산콜센터에서 여기로 전화를 걸라고 알려줬다 하니 그럴 리가 없다며 자기들은 아무튼 아니란다. 그래 그렇겠지..... 그럼 나는 어디에 문의를 해야 하나. 갑자기 화가 확 나서 서로 자기 일이 아니라는데 어디에 전화를 걸어야 하는 거죠? 시각장애인이 음향신호기가 없는 상황에서 도움을 받지 못해 길을 건너다 사고가 나도 그 누구의 책임도 없는 거겠죠?  하는 별 쓸모 는 이야기를 상담원에게 해버렸다. 서로 기분만 나빠졌을 뿐 아무 도움도 받지 못했다. 전화 끝에 상담원은 "도로사업소"에서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다며 전화번호를 알려줄까? 하고 물었지만 그 정도는 내가 찾겠다 하며 급히 전화를 끊었다. 인터넷에서 내가 사는 지역 관할 도로사업소의 홈페이지를 찾았고 그곳에서 담당자로 보이는 사람의 전화번호를 찾아 전화했다. 세 번째로 상황을 설명했고, 앞서 두 번의 전화에서 거절당했는데 여기 전화하는 것 맞냐니 드디어 맞단다. "얼마 전에 새로 신호등이 생긴 곳이죠? 음향신호기 설치가 안되었나 보군요"라네. 전화 걸기 전에 신호등과 함께 설치해 주셨으면 얼마나 좋을까. 1~2주 내로 설치할 테니 기다리라는 답변을 듣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일주일 후, 신호등에 음향신호기가 부착되어 있었다.

그 소리 하나가 남편의 안전을 확실히 보장해 준다고는 할 수 없지만, 나의 걱정 하나는 덜었다. 그것으로, 그것으로 되었다.

이전 14화 내가 항상 그의 왼쪽에 서는 이유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