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장애인으로 살아본 적은 없어서 그들이 겪는 모든 것(.. 대체로 불편한 것들. 이를 테면 물리적 어려움과 사회적 편견 등)에 대해 정확히 알 순 없겠지만, 시각장애인의 가족으로 살면서 내 가족이 겪는 어려움들을 지켜봐야 하는 것도 몸과 마음이 고된 일이다.
시각장애인인 남편과 살며 이전까지는 잘 몰랐던 다양한 어려움들을 마주하게 되는데 예를 들자면 이런 것들이 있다.
- 길 아무 곳이나 세워놓은 전동킥보드, 자전거
- 보행을 방해할 정도로 늘어져 있는 상점의 물건들
- 길에 앉아 물건을 파시는 분들(좁은 길이라면 그런 물건들은 시각장애인 발에 걷어차이기 딱 좋다.)
- 보도 공사
- 지하철 계단에 앉아있는 사람들(왜?)
- 질주하는 자전거. 갑자기 방향 바꾸면 완전 hell
- 맥락 없이 끊겨있는 시각장애인 점자블록
(여기에다.. 10년 전쯤에 도입된, 누가 몇 억 해 먹었는지 모를 이상한 구조의 서울 7호선 지하철 열차까지)
시각장애인 남편과 살다 보니 길 위의 모든 것이 거슬리고 불편해졌다. 더 정확히 말하다면 예측불가능한 모든 것. 사실 길 위의 것들을 모두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안다. 하지만 시각장애인의 경우 그러한 것들에 민첩하게 반응하기 어려울뿐더러 위에서 언급한 것들은 어쩔 수 없는 것들이 아닌 '배려'가 부족해서 생기는 것들이다 보니 슬그머니 화가 나는 것이다. 내가 그와 모든 장면에서 함께 할 수 있는 것도 아닌 데다, 남편은 주로 혼자 이동을 하는 편이므로 이런 거슬리고 불편한 마음은 불안함이 된다. 내가 먼저 그런 길을 지나가기라도 하는 날에는 그에게 미리 알려주기도 한다. 이런 세월이 계속되다 보니 이젠 남편과 상관없이 그런 길들이 불편하다.
남편 다리에는 크고 작은 상처가 많다. 종종 얼굴에도 상처가 생긴다. 지난가을에, 그 다리에 또 큰 상처가 생겼다. 휴직하고서 복지관에 자주 갔는데, 복지관 가는 길에 낙엽이 가득 깔려 있어서 길이 잘 보이지 않았단다. 더듬더듬하며 걸어가는데 무언가에 걸려 넘어진 것이다. 이렇게 다치고 나서 남편은 나에게 먼저 말하는 법이 없다. 하지만 나는 매의 눈을 가졌기에 웬만한 상처는 발견해서 추궁하고 상처치료까지 마친다. 그런데 이번엔 긴 바지를 입고 있어 몰랐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가 장난을 치다 아빠 다리를 모르고 발로 차게 되면서 알게 되었다. 그리 세게 찬 게 아니었는데 심하게 아파하기에 다리를 살펴보았더니 정강이에 큰 상처가 있었다. 전후 사정을 알 리 없는 아들은 자신이 아빠 다리에 상처를 냈나 싶어 놀라고 미안한 마음에 엉엉 울었다. (아무래도 장난친 것 때문에 혼이 나서 더 슬펐던 것 같다.)
남편이 이렇게 다쳐서 오는 날엔 너무 화가 난다. 누구에게, 그리고 왜 화가 나는지 모르겠지만 화가 난다. 남편을 향한 화가 아니지만, 결국 남편 앞에서 씩씩대고 있으니 괜히 남편은 죄인이 된다.
하필 거기 있었던 전봇대에, 벤치에, 돌멩이에, 볼라드에, 노점상에, 전동킥보드에 화가 난다.
그 누구도 잘못하지 않았는데 몸이 아픈 사람이 생겼고 그 때문에 마음이 아픈 사람도 있다.
낙엽을 제때 치우지 않은 누군가의 잘못일까? 가을이 되면 나뭇잎을 떨어뜨리는 나무의 잘못인가? 복지관은 왜 거기 있었지? 좀 더 접근성이 좋은 곳에 있을 수 없었나? 왜 꼭꼭 숨어있어서 장애인들이 찾아가기 힘들어야 하나? 남편은 왜 거기에 갔나? 애초에 복지관에 가보라고 한 건 나였으니 내 잘못일까?.. 그냥 이 사람과 만나지 않았다면 화도 안 났을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들을 하다 보면 생각이 안드로메다까지 가 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다시 돌아온다.
마데카솔과 뽀로로대일밴드로 아빠의 다리를 치료해 준 아들은 잠자리에 누워선 "아빠 다음에 또 아프게 되면 나한테 꼭 얘기해야 해요."라고 속삭이고 잠에 들었다.
지난날 블로그에 '시각장애인남자친구, 남편'에 대해 쓴 글을 많은 사람들이 읽었다. 글의 댓글이나 안부게시판에 '관심이 가는 장애인이 있는데 사귀면 어떨까요, 너무 힘들까요?', '장애인남자친구가 있는데 결혼하면 어떨까요, 힘든가요?' 등등의 질문이 올라왔다. 나는 '당신이 하기 나름이다. 처음부터 겁먹지 마라' 류의 조언을 해주었다지. (과거의 나. 왜 그랬니? ㅎㅎㅎ)
힘든 게 뭐가 있냐,라고 했지만 매 순간 어려운 일 투성이다.
연애 때부터 그와 함께 한 지 9년째,
그 시간 동안 가장 힘들었던 건, 그의 상처를 맞닥뜨릴 때였다. 사실 매일을 함께 하기에 그가 시각장애인임을 잠시 잊고 지낼 때가 많다. 그런데 그의 상처를 보는 순간 난 다시 깨닫는다. 아 맞다, 이 사람 장애인이었지. 그런 그의 상처가 다리 위의 빨간딱지일 때도 있고 장애인에 대한 편견일 때도 있다.
내가 그에게 주는 상처는 별개라는 건 비밀이다.
(출근길에 있던 이런 것들. 아주 거슬려. 약 2년 전쯤 안전신문고로 신고했는데도 그대로 있었는데, 이번에 복직하고 보니 없어져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