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실에서 양치질을 하다 무심코 문 밖을 봤다. 남편이 의자에 앉아 무릎에 얼음찜질팩을 대고 있었다. 앗, 또다! 딸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아빠에게 다가와 묻는다.
"아빠 뭐 해? 그건 왜 거기에 그러는 거야?"
남편은 뭐라 둘러대야 할지 동공 지진을 일으키는 눈치다. 나는 보글보글 거품을 물고 양치를 이어가며 남편 대신 딸에게 시크하게 한마디 던졌다.
"또 어디 부딪혔나 보지, 뭐."
남편이 머쓱해하며 화장실 쪽을 쳐다본다.
"엄마는 다 아네."
"그걸 모르는 게 더 이상하지!"
맞다.
또 다쳤다.
남편은 일주일에 두 번 복지관으로 운동을 간다. 집에 돌아오는 시간이 밤 9시쯤이다. 가로등이 켜져 있어도 깜깜한 밤, 야맹증이 있는 남편에게는 블랙홀이나 다름없는 밤이다.
남편 가방마다 흰 지팡이(케인)가 고이 모셔져 있지만, 사용하는 걸 본 적이 손에 꼽을 정도다. 남편 말로는 "지팡이를 꺼내는 버릇이 안 돼서 자꾸 안 꺼내게 된다"라고 한다. 나는 매번 "오늘 입은 착장과 어울리지 않아서 그러는 거냐"라고 핀잔을 준다.
사람들은 시각장애인 하면 으레 선글라스에 흰 지팡이 짚고 더듬대며 걷는 모습을 떠올린다. 거기에 안내견까지 있다면 완벽 세트! 하지만 같은 신발을 신어도 발 사이즈와 발등 모양이 제각각이듯, 시각장애인도 시력, 시야 등 눈의 상황이 다 다르다. 그래서 보행하는 모습도 제각각이다.
남편은 선천적 질병이긴 해도 스무 살까지는 나와 비슷하게 살아왔다. 그러다 20대부터 '장애'라는 이름이 붙고, 눈도 많이 나빠졌다. 안내견도 지팡이도 굳이 사용하지 않고 살아온 남편은 지금도 그것들이 영 어색한가 보다. (아니 20년이 지났다오!) 흰 지팡이를 굳이 꺼내는 때는 투표하거나 공항 갈 때처럼, '나 시각장애인이오!' 하고 알려야 할 때뿐이다.
그런데 이렇게 다치고 오는 날엔 정말 화딱지가 난다! 특히 밤에 나갈 때가 그렇다. 안 그래도 잘 안 보이는 눈, 밤엔 더 안 보일 텐데! 지팡이라도 좀 짚으면 안 되니? 학교 다닐 때 전공 시간에 배운 걸 더듬어 보면 이렇다(사실 구글에 급히 검색했다). 시각장애인들이 사용하는 흰 지팡이는 이런 역할을 한다.
* 탐색 기능: 땅이나 주변 환경을 톡톡 건드려 장애물을 감지하고 안전하게 걸을 수 있게 돕는다. 지형 변화, 장애물 위치, 방향 등을 파악해서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는 내비게이션 역할을 하는 것이다.
* 상징 기능: '나 시각장애인이에요!' 하고 알리는 패션 아이템이자 동시에 다른 사람들에게 '조심하세요!' 하고 경고하는 역할을 해서 안전을 확보해 준다.
* 독립과 자존감: 시각장애인이 스스로 걷고 독립적으로 생활할 수 있게 돕는 슈퍼 히어로 지팡이랄까? 자존감도 뿜뿜, 사회 참여도 뿜뿜이다!
* 안전 보장: 말 그대로 위험으로부터 방패막이가 되어주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아니, 이렇다는데!!! 위험으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데!
양치를 마치고 남편에게 다가가 무릎을 살폈다. 다행히 눈에 보이는 상처는 없었지만, 내 속은 터지는 줄 알았다.
"어디에 부딪혔어?"
"아파트 입구에..." (아주 작은 목소리)
얄미워서 무릎을 찰싹 때려줬다. 남편은 "으악-" 하며 무릎을 부여잡는다.
"밤에는 지팡이 좀 꺼내 쓰라고. 오빠 자꾸 그러면 죽을 때 관에도 지팡이 넣어버릴 거야!"
남편은 이런 내 잔소리가 익숙한 듯 "허허허" 하고 웃어버리고 만다. 도대체가 이해가 안 간다, 이해가!
얼음찜질팩, 반창고, 후시딘.... 어쩌면 흰 지팡이보다 더 필요한 것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