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아빠가 시각장애인이라서요,

말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면 더 좋겠지만

by 루시아

*글에 등장하는 아이의 이름은 모두 가명입니다.


“아, 혹시 몰라 말씀드려요. 아이 아빠가 시각장애인이에요.”


이 말은 매번 조심스럽다. 매번 망설이게 된다. 꼭 말해야 하나, 말하지 않아도 잘 지낼 수는 없을까. 하지만 결국은 말하게 된다. 말하지 않으면 생기는 오해와 불편함이 그보다 더 무겁기 때문이다.



올해 두 아이 모두 새로운 기관에 입학했다. 모든 것이 새롭다. 새로운 환경, 새로운 리듬, 그리고 무엇보다 새로운 사람들을 계속 만나게 된다. 선생님, 아이의 친구들, 그리고 그 친구들의 부모들까지.



이처럼 낯선 사람들과 마주칠 때마다 나는 늘 ‘그때’를 기다린다. 남편의 장애에 대해 이야기할 적절한 순간 말이다. 그럴 때면 또 같은 생각이 스친다. 굳이 이걸 말해야 할까?


하지만 이 동네에서 아이와 함께 살다 보면, 우리의 친분과는 상관없이 알게 되고 마주치게 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럴 때 남편이 괜한 오해를 받는 상황은 되도록 피하고 싶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곤란한 순간에 작은 도움이라도 받을 수 있다면 좋겠다는 마음도 있다.


한 번은 놀이터에서 그런 일이 있었다. 둘째와 같은 어린이집에 다니는 아이의 부모님이 남편을 향해 멀리서 손을 흔들며 인사를 했다. 하지만 남편은 당연히 알아보지 못했다. 그분들 눈에는 남편이 자신들을 똑바로 쳐다보는 것처럼 보였을 텐데, 인사를 받아주지 않자 당황하는 눈치였다.


나는 멀리서 그 장면을 보고 있다가 남편에게 다가가 말했다.

“저쪽에서 오빠한테 인사했어. 하민이 엄마아빠야.”

그제야 남편은 반갑게 손을 흔들며 인사를 건넸다.


나중에 하민이 엄마와 대화를 나누다 조심스레 말했다.

“제가 아이 아빠가 시각장애인이라는 걸 말씀드리는 걸 깜빡했어요.

아까는 인사를 못 들었나 봐요.”


그 뒤로 하민이 엄마는 남편을 볼 때마다 이렇게 인사한다.

“안녕하세요, 유주아버님~ 저 하민이 엄마예요~”


또 이런 적도 있었다. 남편이 퇴근길에 어떤 여자분에게 인사를 받았다고 한다.

“안녕하세요~!”

누군지 몰라 인사를 받았고, 마침 가는 길이 같아 함께 걷게 되었다고 했다.


“우주는 학교 재밌대요?”

(아, 첫째를 아는 분이구나. 누구 엄마지?)

“네~ 잘 다니고 있어요.”

“지난주에 성당에서 못 봐서요~ 이번 주는 오나요?”

(아! 주일학교 선생님이시구나!)

“아 네네, 이번 주는 갑니다~”


이렇게 퍼즐 맞추듯 상대의 정체를 유추해 가며 대화가 오가면 그나마 다행이다. 하지만 가끔은 누군지 끝까지 모른 채, 구름 위를 둥둥 떠다니는 말만 주고받고 끝날 때도 있다.


그래서 언젠가부터는 아이가 자주 만나는 친구의 부모님들, 주로 엄마들에게 우리 아이 아빠가 시각장애인이라는 사실을 먼저 말하게 되었다.

“뭘 도와달라고 말씀드리는 건 아니고요. 혹시 모르셔서, 오해하실까 봐요.”


대부분은 순간적으로 약간 당황한 표정을 짓는다. 내가 전하려는 진짜 뜻을 알아차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언젠가 그런 상황이 오면 내 말을 떠올려줄지도 모른다.


가끔 남편이 아이들이 많은 놀이터에서 우리 아이들을 찾지 못해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주변 사람들이 “유주는 그네 타고 있어요!” 하고 도와주는 일도 있다. 말하지 않았다면 생기지 않을 배려들이다.


최근엔 첫째가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다 아빠의 외모 이야기가 나왔다고 한다.

A: “야 우주 너네 아빠 어떻게 생겼었지? 기억이 안 나네.”

B: “아, 우주 아빠는 한쪽 눈을 감고 있는 것 같아.”

C: “아 내가 아는데, 우주 아빠 눈 하나는 가짜 눈이야!”

https://brunch.co.kr/@brunch-of-lucia/58


그 모든 대화를 듣고 있던 우주는 말이 없었다고 한다.

별 생각도 없는 듯. 사실과 다른 게 없어서, 굳이 말하지 않았단다.


아이의 마음이 궁금하기도 하다. 하지만 숨기려는 건 아니고, 정말 별 생각이 없는 듯하다.

그 아이의 단단함이 신기하고, 가끔은 부럽다.


첫째가 어린이집과 유치원에 다닐 때는 남편이 종종 등·하원을 맡았기에 선생님들도 자연스럽게 남편의 장애를 알게 되었다. 하지만 초등학교에 가고 나서는 선생님들과 직접 마주칠 일이 거의 없어 따로 알릴 일이 없었다.

다만 1층의 병설유치원 선생님들께는 꼭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덕분에 인터폰에 덮여 있던 항균 필름을 떼어낼 수 있었다.

https://brunch.co.kr/@brunch-of-lucia/79



이럴 때마다 고민이 된다.

내 이야기를 듣는 친구 엄마들은 이런 내 말이 불편할까? 부담스러울까?


각자의 마음을 다 헤아릴 수는 없지만, 그저

‘아는 장애인 한 명 생겼다’는 정도였으면 좋겠다.


장애인이 곁에 있어야, 그들이 겪는 불편이 비로소 눈에 들어온다.

그제야 그런 배려도 억지로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나오게 되는 것 같다.


도움이 필요해서라기보다는,

그들의 시야가 조금 넓어지는 데 보탬이 되고 싶다.

그렇게 말하면 너무 거창하게 들릴까?


시야가 넓어지는 일은, 아주 작은 만남에서부터 시작된다.

오늘 놀이터에서도 그런 만남이 하나쯤은 이어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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