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3. 지극히 정치적이지 못한 사람

기억의 화실

by 그냥 그림이

지극히 정치적이지 못한 사람

명절이 다가오면,
어린 시절 명절을 보내러 가던 기억이 문득 떠오른다.

그때 큰집은 사당동에 있었다.
멀지 않은 거리였기에, 가는 길이 유난히 힘들다고 느낀 적은 없다.
아빠는 항상 앞장서서 걸었고,
걸음이 느린 세 자매를 엄마가 뒤에서 챙기며 따라왔다.

어린 마음에 종종 의문이 들었다.
“아빠는 왜 늘 혼자서 빨리 가실까?”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아빠가 우리 속도에 맞춰 걸었다 해도
엄하고 무서운 아빠와 함께 걷는 게

부담이 되었을 것 같다.
차라리 멀찍이 떨어져 걷는 게 더 좋았을지도

큰집에 도착하면,
아빠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
유머러스하고, 조카들에게 용돈을 아끼지 않는 ‘좋은 삼촌’으로 변했다.

고스톱을 치는 아빠의 모습을 구경하던 나는
늘 이런 생각을 했다.
‘참 실속이 없다.’
게임이라면 이겨서 돈을 따야 할 텐데,
아빠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사실, 그 외의 일에서도 아빠는 늘 실속이 없었다.
조금만 자존심을 내려놓으면 좋을 텐데,
그럼 모두가 편할 텐데…
하지만 아빠는 언제나 자존심을 택했다.
그래서 종종 힘든 길을 스스로 선택하곤 했다.

아빠가 돌아가신 뒤,
그를 잘 아시던 분들에게 들은 이야기들도 비슷했다.
“그분은 아부 같은 건 못 하셨지.”
“정치적으로 영 움직이지 못하셨거든.”

아빠는 사회생활에서의 ‘정치’를 완강히 거부하셨다.
인간관계를 잘 다루면 얻을 수 있는 도움이나 즐거움보다는,
“나는 실력으로 보여준다”라는 신념으로 살아오신 분이었다.

오랫동안 그게 이해되지 않았다.
왜 그렇게 사셨을까.
하지만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살다 보니, 나 역시 그런 면을 닮아 있었다.

나도 인간관계 속에서
‘정치적인 생각’을 잘하지 못한다.
타인에게서 이익을 얻기 위해 행동하지 못한다.

아빠가 ‘실속을 챙기지 않았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안 한 게 아니라,
못한 거였다는 걸 안다.

누군가에게 기분 좋은 인사 한마디 건네는 것도 쉽지 않고,
조금이라도 손해 보지 않기 위한 행동을 하려 해도
스스로가 용납하지 못할 때가 있다.
결국, 아빠는 ‘못한 것’이었다.
나 또한 그렇다.

그래도 아쉬운 건 있다.
가족들에게만큼은
조금 더 따뜻했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
그렇게 멀찍이 앞서 걷지 않고
단 한 걸음만 이라도 더 느리게 걸어주셨다면…

아빠를 이렇게 기억하며 글을 쓰다 보면,
나도 모르게 두 가지 다짐을 하게 된다.
아빠처럼 살기 위해,
그리고 아빠처럼 살지 않기 위해.

하지만 이제는 안다.
아빠의 그런 ‘정치적이지 못한’ 면이 있었기에
그는 평생 한 길을 묵묵히 걸으며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사람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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