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6. 산수화가 된 마블링

기억의 화실

by 그냥 그림이

초등학교 시절, 학교에서 ‘마블링’ 수업이 있었다.

조별로 물을 담은 대야를 준비하고, 거기에 물감을 떨어뜨려 종이에 찍어내는 수업이었다.

지금이야 마블링이 어떤 건지 알지만, 그때는 ‘마블링’이라는 단어조차 낯설었다.

어떤 결과물이 나올지 전혀 상상이 되지 않았던 수업.




우리가 준비물로 가져갔던 마블링 물감은

조그마한 상자 안에 들어있는 여섯 개의 원색 물감병이었다.


그런데…

설명이 애매했는지,

우리가 그만 용감했는지,

우리는 조원들의 모든 물감을 대야에 한꺼번에 부어버렸다.

'재료는 아껴 쓰는 게 아니다.'

그런 결의로 모든 물감병이 대야로 들어갔다.

그리고 휘휘 저어 섞기까지 했다.

그 순간, 대야 속은 더 이상 마블링이 아니었다.

어느새 흙빛, 그것도 묘하게 붉으스름하고 푸르스름한 흙탕물로 변해 있었다.


6명의 물감이 모두 모여

농도가 매우 짙은 찐득하고 기름진 액체를 바라보며

떨리는 손으로 종이를 찍어낸 순간-


결과는 처참했다.

‘이게 뭔가’ 싶은 결과물이 나왔고

그걸 신문지 위에 조심스럽게 올려놓고 말리고 있었다.



그때, 선생님이 우리 조를 보시곤 얼굴이 하얗게 질리셨다.

“이렇게 하는 게 아닌데……”

말을 흐리셨지만, 이미 손쓸 수 없는 상태였다.


그렇게 우리 조는 더 이상 할 일이 없었다.


다른 조가 마블링을 하는 모습을 구경하며

‘아, 마블링이란 저렇게 하는 거구나.’

고개를 끄덕이며 수업을 마쳤다.




흙빛 마블링 종이를 들고 집에 돌아갔다.

신문지에 싸인 그 종이를 꺼내 말리고 있는데,

아빠가 물으셨다.

“그게 뭐야?”

학교에서 마블링 수업을 했는데,

우리 조는 망쳤다고 설명했다.


아빠는 그 종이를 한참 들여다보셨다.

그리고 말씀하셨다.

“이거, 꽤 멋진데?”

흙빛으로 얼룩진 마블링 종이.

자세히 보면 신문지와 맞닿았다가 떨어져 나온 자국들 덕분인지

산등성이처럼 나무가 빼곡한 산맥처럼 보이기도 했다.


아빠는 문득 영감이 떠오르신 듯

마블링 물감을 다시 사다가 해보라고 하셨다.


나는 학교 앞 문방구로 달려가 물감을 사오고

조원 6명이 쏟아부었던 그 농도를 재현하기 위해

여러 번 물감을 사러 다녔다.




아빠는 계속 마블링을 연구하셨다.

대야에 물감을 떨어뜨리고, 종이를 찍어내고,

다양한 결과물들을 만들어냈다.

그렇게 만들어진 마블링 작업들은

훗날 아빠의 작품 몇 점으로 재탄생했다.

민화 작가인 아빠가 마블링을?


그때는 조금 낯설었지만, 아빠는 언제나 새로운 재료를 탐구하는 분이셨다.

스티로폼을 녹여 작품에 사용하기도 하셨고,

어디선가 돌가루를 구해와 색다른 질감을 더하기도 하셨다.




한번은 화실에 놀러 갔을 때,

아빠는 에어브러쉬를 보여주시며 말씀하셨다.

“종이를 구기고, 여기에 분사하면 배경이 더 특별해져.

지금 그걸 연구하는 중이야.”

훗날, 아빠가 연구하셨던 그 에어브러쉬 기법이

완성된 작품 속에서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는 걸 여러 번 보았다.

그 작품들은 하나같이

아빠가 실험하고 고민했던 흔적들로 가득했다.




언젠가 아빠는 내게 이런 말을 하셨다.

“너는 나이도 젊은데, 더 자유롭게 생각해야지.”

내 생각에도 어떤 면에서는

아빠가 나보다 더 젊고 자유로웠던 것 같다.


아빠에게 나이가 든다는 건,

단지 작품의 완성도를 높여가는 과정이었을 뿐일까.


고지식한 성격이라 생각했던 아빠가

그림 앞에서는 누구보다 자유롭고 열린 사람이었다는 게

지금도 가끔은 신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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