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7. 아빠의 화실 연대기

기억의 화실

by 그냥 그림이

아빠의 화실은, 나의 나이만큼이나 여러 곳에 있었다.

이번 이야기는 어쩌면 조금은 심심한 글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 삶을 돌아보면,

아빠의 화실은 언제나 그 시절의 풍경과 감정을 함께 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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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천화실

아빠의 화실은 부천에 있었다.

그때도 집이 곧 화실이었다.


하지만 이때는 내가 어렸었기에

그 시절의 기억은 내게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다만 몇 장 남아 있는 오래된 사진 속에서

그 공간의 분위기를 조심스레 유추해 볼 뿐이다.


내 기억이 아닌

사진 속 풍경으로만 존재한다는 사실이 조금은 아쉽다.




과천화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아빠의 화실은 과천 시골에 있었다.


마당에는 해바라기 꽃이 피어 있었고,

내가 기억하는 가장 오래된 화실의 이미지다.


햇살과 흙냄새가 가득했던 그 풍경은 아직도 마음 한구석에 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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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한평 화실

1988년,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

우리는 서울 용답역 근처로 이사를 했다.


아빠의 화실은 장한평 쪽 상가에 있었다.

그곳을 가기 위해 지나야 했던 고미술품 가게들.

어린 내게는 시각적 호기심을 자극하던 작은 미술관 같았다.


이후 장한평 근처에서 아빠는 몇 번이나 화실을 옮겼고,

그때마다 공간은 조금씩 넓어졌던 기억이 난다.


중학교에 들어설 무렵, 우리 가족은 분당으로 이사를 했다.

하지만 아빠의 화실은 여전히 서울에 있었다.




청주화실

그리고 중학교 3학년이 되기 전(1996년)

우리는 청주로 또 한 번 이사를 갔다.


그 무렵 아빠의 작업실은 더 이상 따로 존재하지 않았다.

집이 곧 화실이었다.


그 시기는 아빠에게도, 가족 모두에게도 힘든 시절이었다.

가족은 함께 있는 것이 당연하다고 하지만,

우리 가족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할 때 더 평화로웠다.


괴산 선유동 화실

아빠의 예민함과 가족 모두의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던 어느 시점,

아빠는 괴산의 선유동에 화실을 얻었다.


아빠는 이곳을 무척 마음에 들어 했다.

송이버섯이 나는 계절이면 숲을 돌아다니며,

신선이 될 거라며 웃으셨다.


선유동의 쌍곡계곡을 십장생으로 그린 작품도 있을 만큼,

그곳의 환경을 사랑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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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동 6층 화실

그 후, 아빠는 인사동 초입의 6층 건물에 새 화실을 얻었다.

놀랍게도 엘리베이터 없는 6층이었다.


곰팡이 핀 벽, 처음엔 에어컨도 없던 그 공간이

그동안의 아빠의 화실들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공간이었다.


이곳에서 나는 민화를 배우고,

아빠와 가장 많은 대화를 나눴다.


20대 후반의 나에게도 그 계단은 숨이 찰 만큼 힘들었지만,

아빠는 늘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건강관리도 하지 않는 아빠의 건강검진 결과가 멀쩡하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나는 속으로 “6층 화실 덕분이야”라고 생각하곤 했다.


아빠는 그 6층 화실에서 대한명인으로 선정되었고,

궁중장식화 숙련기술 전수자가 되었다.

많은 작품들이 이곳에서 탄생했고, 많은 제자들이 다녀갔다.


그래서일까, 건물이 철거되며 그 화실을 나서야 했을 때,

아빠는 많이 섭섭해하셨다.



대일빌딩 화실

그다음에 옮긴 곳은 인사동 대일빌딩.

가장 세련되고 깨끗한 화실이었다.


높은 층, 비싼 임대료, 전보다는 좁은 공간.


이때는 아빠가 본격적으로 궁중장식화 아카데미를 진행할 때라서

나는 이곳에서 그림을 그릴 수 없었다.

자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화실은 그리 길게 유지되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동일빌딩 화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빠가 인사동에서 얻은 동일빌딩의 화실.


그곳에서 아빠는 뇌졸중으로 쓰러지셨다.

입원 중에도 “전시 준비를 해야 하니 화실에 데려다 달라”라고 하셨다.

우리는 사설 구급차를 불러, 아빠를 화실로 옮겼다.

아빠의 가장 친한 친구분께 이불과 깔개를 얻어다 가져다 놓고

울면서 인사동을 걸어 다니곤 했다.


그 시절을 떠올리면, 마음이 먹먹해진다.




다시 괴산 선유동 화실로

결국 아빠는 고희전 이후 한 번의 전시를 더 마치고,

다시 괴산의 선유동화실로 돌아갔다.


그곳은 생활하기엔 불편했지만,

아빠가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장소였다.

풀이 무성하게 자라나도록 무심하게 대해도

그런 아빠를 기다려주는 유일한 화실.


아빠의 마지막 화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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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인사동은 언제나

재미와 볼거리, 그리고 낭만이 가득한 곳이었다.


아빠의 화실이 있던 시절,

나는 그 거리에서 여유롭게 그림을 그리고,

가끔은 그냥 들러 차 한잔을 마시며 시간을 보냈다.


이제는 아빠가 계시지 않은 인사동은

화려하지만 어딘가 조금은 슬픈 느낌이 들기도 한다.


아직도 ‘인사동’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자연스레 ‘아빠’가 함께 떠오른다.

마치 서로를 설명해 주는 연관검색어처럼,

인사동과 아빠는 내 기억 속에서 늘 나란히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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