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歌痕14. 십시일반(什施壹伴): 토요우정담(土曜友情談)

by 이치혜

토요일 아침, 햇빛이 사정없이 내리꽂혔다. 아직 여름 문턱도 제대로 넘지 않았건만 벌써 이 정도라니, 올여름이 걱정스러웠다.

8시 30분에 시작될 일정을 위해 집을 나섰다. 지하철을 한 번 놓치니 계속 환승 열차의 꽁무니만 바라보게 되어 삼양동까지 한 시간 사십 분이 걸렸다. 세상일이란 게 늘 그렇듯 계획대로 되는 법이 없다지만, 본 행사 일정이 한 시간이나 늦춰진 것도 모자라 진행도 중구난방이었다. 행사 순서는 제풀에 넘어지고, 축사를 부탁받고 참석했는데 목례만 했다. 이럴 거면 축사 원고로 만족하시지, 참 나. 그래도 꽤 긴 시간을 함께 일해본 분들이기에 현장에서의 변수에 당황하는 그들의 수고에 괜히 내가 미안해졌다. 괜찮습니다. 마음 쓰지 마세요.

12시에 있던 친구 딸 결혼식은 포기했다. 이 상황에선 시간을 도저히 맞출 수 없었다. 카톡 메시지 한 통과 조촐한 축의금을 보내는 것으로 미안한 마음을 전했다.

오후의 편집 회의에 맞추어 원고 마무리가 급했다. 몸과 마음이 모두 바빴다. 200여 페이지에 달하는 원고를 들춰보니 부족함 투성이였다. 밤에 쓴 연서를 아침에 읽는 느낌이었다. 퇴고를 제대로 해야 할 생각에 부담감이 저만치 앞서 달려 나간다. 글이란 참 묘해서, 쓸 때는 무인가를 얻은 기분이었다가도 시간이 지나고 보면 쓰레기통에 처박고 싶어질 때가 다반사이다.

오후 1시부터 3시간 동안 편집 회의가 있었다. 회의를 마치고 1천 쪽이 넘는 책자 자료 두 권과 내일 행사에 사용할 현수막을 챙겨 나서는데, 햇빛이 더욱 사정없이 내리꽂혔다. 부르르 부르르 휴대전화 진동이 이어졌다. 북한산 간 친구들이 단톡방에 사진을 올렸다. 이 더위에 얼마나 힘들까 싶다가도 그들의 표정에 부러웠다.

흑석역 출구를 나서자마자 햇빛이 달려들었다. 기운이 쭉 빠지고 식은땀이 삐질삐질 났다. 급 저혈당 증상, 겪을 때마다 기분을 더럽게 만드는. 기를 쓰고 편의점에 들어가 콜라 한 캔을 들이켰다. 생각해 보니 이제껏 종일 커피 두 잔밖에 마시지 않았다. 이른바 '자기관리 실패'였다.

시간을 촘촘히 사용한 것은 일견 뿌듯했지만, 한편으로는 이게 뭔가 싶기도 했다. 바쁘게 사는 게 능사가 아니라는 걸 나이 들면서 점점 절감한다. 내가 시간을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에 구애받는다는 자괴로 살짝 부아가 일었다.


현수막을 건네고 내일 행사 관련 준비 미팅을 잠시 가졌다.


업무 단톡방에 올라온 행사 준비 보고 서류를 검토하고 의견을 내놓았다.


공적인 업무는 이렇게 끝났다. 이제, 드디어, 마침내 오늘의 메인 스케줄이 남았다.




생각만 해도 입가에 웃음이 돌았다. 더운 날씨에 한 시간 남짓 걸려 약속 장소에 도착하니, 좋은 얼굴들이 벙글벙글 나를 반겨 준다. 한 달에 한 번씩 만나는 친구들이다. 오늘은 한 명을 빼고 모처럼 10명이 모두 모였다. 근래 들어 가장 뛰어난 참석률이었다. 누군가 들은 부지런히 산행을 다녀왔고, 누군가 들은 부지런히 일을 마치고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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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앉자마자 너무 지쳐 보인다며 걱정과 함께 맥주 한 잔을 따라주었다. 진하고 차가운 맥주 한잔에 정신이 바짝 든다. 입안을 가득 시원하게 하고 인두와 식도를 따라 내려가는 ‘쌉싸름달콤시원까끌부드러운’ 액체의 위치가 가늠되고, 그것이 지나가는 부위마다 세포가 각성하는 느낌이 든다. 문득 링거를 이런 식으로 만들어 투약하면 환자들이 정신적으로 훨씬 고양될 것이란 부질없는 생각을 했다.


특별한 주제나 논점 따위는 없다. 테이블에 앉은 대로 서너 명씩 각각의 이야기를 풀어냈다. 가끔 분위기 못 읽는 나 같은 자가 ‘자, 자!’를 외치며 주의를 환기하지만, 곧 좀 전의 분위기로 돌아가 왁자해 진다.


오늘은 단주를 선언한 신 총수가 석 달 만에 특별히 참석했다. 반가웠다. 그의 결심을 깨뜨리려는 마구니들의 집요한 공격이 이어졌지만, 그는 요지부동, 장장 6시간 동안 생수와 안주 나부랭이만 먹으며 꿋꿋하게 버텼다.

신 총수여, 건강이 최고이니 그 결심 견지하시게. 자네보다 먼저 가는 친구들에게 두둑이 부의하겠다는 결심도 끝까지 견지하시게.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조건에 맞춰볼라니까~


최 회장은 직원들과 풋살 경기를 하다 인대를 조금 다쳤다고 했다.

嗚呼好哉라, 우리 나이쯤 되면 작은 힘줄 부상 따위가 종종 곧잘 악화되어 자리보전하기 십상이고, 누우면 근육이 소실되고 욕창이 발병하여 삶의 의지를 내려놓게 되기 마련이며, 그러다 종종 몇 개월 만에 부고를 돌리는 경우가 드물지 않으니 '꿈과 용기를 잃지 말고 꼭 이겨내라', '쾌차하시게'라는 응원의 덕담이 건배사를 대신했다. 응원인지 놀림인지 혼동된다면 당신은 엑스트라 오디너리이다. 우리는 수차례 이 주제로 건배하며 낄낄거렸다.


이천년 전 중동 땅에 예수라는 분이 계셨다. 그가 어느 혼인 잔치에 가서, 마셔도 마셔도 끝없이 솟아나는 포도주의 이적을 행하셨다고 들었다. 보지 않았으니 못 믿었는데 어제부로 믿게 되었다. 막걸리 한 통으로 자리가 끝날 때까지 끝없이 건배를 외치고, 건배만으로 일행들을 소주 한 병씩 마시게 만드는 '반도의 지저스'가 우리 벗 중 하나였다!

이 모임이 이렇다. 그냥, 보면 반갑다. 나이 깨나 먹은 친구들이 수다로 꽃을 피운다. 과음하기 십상이고 헤어질 때면 늘 아쉬움이 앞선다. 굳이 생산성을 따진다면 제로에 가깝고, 조국의 GDP 증진에 별로 기여할 바 없는 모임이다. 우리끼리는 젊다고 여기지만 주위에서 분명 소란스러운 늙은이들이라고 흉볼 가치가 충만한 늙다리 아저씨들의 모임인 갓이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떠올리기만 해도 힘이 나고, 카톡 하나 전화 한 통으로 위안이 되고, 사소한 이야기로도 웃음꽃이 번지는 모임이라는 것이다. 놀림인 것 싶은데 응원이 되고, 응원인 것 같은데 놀림처럼 들리는 절묘한 반전이 끝이 없다. 진지와 농담이 두서없이 엮이는데 ‘결론은 버킹검’, 힘내자, 좋다 이다.

개인적으로, 세상의 기준으로 내가 가장 처진다. 그러나 굴함 없이 헛소리하고, 기억을 더듬어 추억을 공유하고, 그러다 문득문득 미안해하고 고마워하고, 그래서 빠르게 흐르는 시간을 야속해해도 늘 너그럽고 풍요롭게 나를 받아주는 친구들이다. 어제처럼 힘들고 지쳐버린 상황에도 주저 없이, 아니 악착같이 찾아가 몸을 기대고 마음을 위로받는 모임. 바로 우리 '몽떼'다.

고맙소 친구들이여. 부디 모두 나보다 오래 살아라. 아픈 안녕은 내가 먼저 고할 테니.


일전에 구우일모(九友溢慕)라고 억지를 썼다. 아홉 명의 벗이 있어 사모하는 마음이 넘친다.

https://brunch.co.kr/@8037493a8fa945d/73

이제 11명이 모이니 십시일반(什施壹伴)이라고 또 다른 억지를 부려본다. 什施壹伴, 열 사람이 사랑을 베풀어주니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평생의 반려이다.

세상에는 많은 모임이 있다. 가족 친지 모임, 친목모임, 신념을 기반으로 한 모임, 취미와 기호를 위한 모임, 외로움을 위한 모임, 서러움을 위한 모임, 업무상 모임, 이익을 위한 모임, 체면을 위한 모임. 그냥 모임. 하지만 그저 만나는 것만으로도 좋은 모임은 흔치 않다. 나이 들어 깨닫는 것 중 하나가, 좋은 친구란 함께 있을 때 피곤하지 않은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토요일 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생각했다. 오늘 하루도 참 알차게 보냈구나. 비록 몸은 지쳤지만 마음은 충만했다. 내일 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지만, 오늘 같은 날들이 쌓여 인생이 되는 것이리라.


오늘, 좋았다.


https://youtu.be/EX66ZtKnmYU?si=XMe--sri1J2KktzB

Gladys Knight & The Pips "Help me make it through the n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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