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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윽고 슬픈 독서가 Jan 12. 2019

3oz 크기의 커피잔

리스본 여행 에세이 #8. 카페 브라질레이라




18g의 원두를 핸드밀에 넣는다. 왼손으로는 통을 잘 잡아 고정하고 오른손으로 손잡이를 돌린다. 드륵 소리와 함께 천천히 원두가 갈아진다. 그동안 포트에 물이 다 끓으면 컵과 서버에 뜨거운 물을 부어둔다. 남은 물은 드립 포트로 옮긴다. 그리고 다시 원두를 간다. 겨우 18g이지만 손으로 가는 일에는 상당한 체력과 인내가 필요하다. 그 시간을 견디고 마침내 원두를 다 갈았다면 이제는 조금 편한 일이 남아있다. 바로 드립용 여과지를 접는 일이다. 공들여 접을 필요도 없다. 그저 드리퍼에 잘 들어가도록 접으면 그만이다. 이제 준비는 끝났다. 여과지 놓은 드리퍼, 뜨거운 물을 담을 드립 포트, 추출된 커피를 받아 줄 서버, 그리고 손잡이 있는 머그잔. 


다음 단계는 여과지를 물로 가볍게 적시는 것이다. 여과지에는 언제나 종이 냄새가 배어 있기 때문에 미리 그것을 빼두는 것이 좋다. 그 후에 갈아진 원두를 드리퍼에 넣고 평평하게 만든다. 드리퍼를 서버 위로 올리고 아주 천천히 드립 포트의 물을 원으로 돌려가며 물을 붓는다. 그렇게 커피 추출이 끝났으면 서버를 두어 번 흔들어 잘 섞고 머그잔에 조심스레 커피를 붓는다. 그리고 마신다. 



“뭘 그렇게까지…” 

소파에 앉아 커피를 내려 마실 과정을 떠올린다. 생각만 해도 귀찮은 일이다. 게다가 드리퍼, 서버, 머그잔까지… 한 잔을 위해 설거짓거리는 또 얼마나 많이 나오는 것인가. 계산을 아무리 돌려봐도 수지가 맞지 않은 일이다. 아무래도 지금 내게는 무리일 것 같다. 그래도 커피는 마시고 싶다. 어쩔 수 없다. 다시 현관문을 여는 수밖에. 


문을 열자 시아두 거리가 펼쳐진다. 위대한 시인 시아두의 이름을 딴 이곳에는 또 다른 죽은 시인이 있다. 그를 만나기 위해서는 카몽이스 광장으로 향해야 한다. 포르투갈의 특별한 역사와 업적을 노래한 시인 카몽이스. 리스본 사람들의 카몽이스 사랑은 광장에 서 있는 11m의 동상 높이를 보면 알 수 있다. 그의 동상 앞에서 정면을 바라본다. 지금의 나처럼 카몽이스 동상을 바라본 이가 또 있다. 지금은 광장에 또 다른 동상으로 서 있는 시인 페소아다. 문학으로 리스본의 가장 높은 곳에 오르고자 했던 페소아. 그런 그의 앞에 서 있는 것은 카몽이스였다. 포르투갈 최고의 대문호 직위를 놓치지 않던 카몽이스. 그의 명성을 넘어서기 위해 페소아는 문학의 혁명을 시도한다. 그리고 혁명의 시작은 3oz 크기의 커피잔 속에 든 브라질 커피로 시작된다. 


시아두 거리에서 가장 사람이 붐비는 곳을 찾아간다. 그곳이 바로 ‘카페 브라질레이라’일테니까. 1905년에 문을 연 이 카페의 주인은 브라질 커피를 전하고 싶은 마음으로 카페를 시작했다. 덕분에 리스본 사람들은 작은 데미타세 잔에 진한 브라질 커피를 마음껏 담아 마실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에서는 그런 사실이 중요치 않다. 지금 이곳을 찾는 대부분 사람들은 페소아와 그의 문학 혁명의 자리에 함께하고 싶은 마음으로 이곳을 찾는다. 



페소아는 지금은 없어진 호시우 광장의 ‘카페 브라질레이라’ 분점을 자주 찾았다. 하지만 그곳이 문을 닫은 후에는 본점인 이곳을 이용했다. 바이샤에 있는 호시우 분점을 다니다 그곳이 사라지자 구태여 바이후 알투 지역의 본점으로 발길을 옮긴 것을 보면 그가 이곳의 브라질 커피를 좋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페소아의 방문 덕분인지 ‘카페 브라질레이라’에는 다양한 예술가들이 모여들었다. 페소아는 이곳에서 그간 리스본에서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던 새로운 문학 작품을 모아 잡지 <오르페우>를 발간한다. 


<오르페우>는 창간호가 나오자마자 카페의 브라질 커피보다 유명해진다. 그 소식을 ‘카페 브라질레이라’에서 들은 페소아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옆 테이블에서도, 지하의 식당에서도, 시아두 거리 곳곳에서도 페소아와 <오르페우>이야기가 넘쳐 흘렀다. 

“리스본의 모든 이들이 우리 이야기를 하고 있어.” 

그의 흥분은 지금도 유효한지 카페에서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누군가 지금도 <오르페우>이야기를 하는 것이 들린다.



카페 앞에는 많은 관광객이 카페의 사진을 찍고 있다. 이 역시 페소아의 이름 때문이다. 문제는 페소아도 페소아지만 커피를 마시기 위해 이곳에 온 이방인들은 이 모습에 당황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커피를 마시는 것은 무리겠는걸?”


쓴웃음을 지으며 일단 입구로 들어선다. 카페 안은 예상대로 손님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입구 밖 인파에 비하면 한적한 편이다. 대부분 사진만 찍고 걸음을 옮기기 때문이리라. 잠시 기다리자 자리가 난다. 좁지 않은 테이블과 고풍스러운 나무 의자는 옛 모습을 간직한 채 우리를 맞아준다. 메뉴는 앞에 있으니 천천히 고르면 된다. 누구도 재촉하는 눈빛을 보내지 않는다. 비카(에스프레소 한 잔)를 주문한다. 음료는 테이블 옆 긴 바에서 만들어진다. 그 모습을 한참을 바라본다. 


뜨거운 물로 잔을 데우며 원두를 간다. 잘 갈린 원두는 포터 필터에 넣고 고르게 펴기 위해 템핑을 마친다. 에스프레소 기계에 포터 필터를 끼우고는 곧장 추출을 시작한다. 3oz정도의 양이기에 몇 초 지나지 않아 추출이 완료된다. 바리스타는 잔을 테이블에 올리고 곧장 포터 필터와 서버를 뜨거운 물에 씻는다. 그사이 서빙을 하는 점원이 테이블로 3oz 크기의 데미타세 잔에 담긴 비카를 가져다준다. 


커피를 주문하고 받을 때까지의 과정. 이 모든 것을 그들은 익숙한 의식을 행하듯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완료했다. 기계 같은 그 모습을 보니 왜인지 마음이 조급해진다. 어서 집으로 돌아가야만 할 것 같다. 


나는 아직 마치지 않은 의식이 있었다.



글 | 최동민

제작 | Studio 1.9.8.4

메일 | groscalin8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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