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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차 Nov 16. 2021

내가 왜 이러는 것 같아?

어느 미니어처 슈나우저의 독백


오늘도 새는 나타났다. 나는 미친 듯이 따라가며 소리친다. 같이 산책을 하던 엄마는 또 시작이라며 소리를 질렀다. 급기야 도대체 몇 번 째냐고 벌 받아야 한다며 산책 후 주는 간식도 주지 않았다. 슬펐다. 화가 났다. 왜! 도대체 왜 이러는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도저히 알 길이 없었다. 아기 때부터 엄마 아빠와 언니들과 살았고 내가 기억하는 내 인생 최초의 기억들도 언니들이 목욕시켜주거나, 아빠가 나를 안고 아파트 산책로를 같이 산책하는 것들 뿐이다. 내 유년시절의 기억 어디에도 새들과 함께 보낸 기억이나 혹은 새들 때문에 겪은 일이 트라우마로 남을 한 안 좋은 경험은 없었다. 그런데도 새들만 보면 온몸의 세포가 깨어나는 전율이 느껴진다. 딱히 새들이 싫은 것도 아닌데, 목줄에 갈비뼈가 옥죄어서 아픈데도 불구하고 그들이 보이면 전속력으로 달려 그들을 쫒는다. 그들이 보이는 순간, 나에게 이성이란 없다. 마치 마약에 중독된 사람의 눈앞에 마약이 나타났을 때처럼, 이때의 나에게는 내일도, 미래도, 말 안 듣고 짖은 벌로 눈앞에서 사라지는 내 사랑 닭고기 간식도 아무 의미가 없어진다. 새들이 날아가고 정신을 차린 다음에야 새들과 함께 날아간 닭고기 간식을 포기하며 멍청하게 짖기만 한 나 자신을 원망하게 된다.



설명할 수 없는 이 집착에 대하여 산책할 때 종종 만나는 다른 친구들에게 물어보기도 했지만 별 도움은 되지 않았다. 대부분의 친구들이 자기들은 새보다는 길거리에서 만나는 다른 애들이 더 싫다는 것이다. 그 아이들과 싸움이 나서 엄마 아빠에게 혼나는 경우는 많아도 새들은 관심 밖의 존재라고. 도대체 왜 이러는 것일까? 평범한 가정에서 평범하게 자란 나에게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는 이런 이상한 면이 있다는 것이 늘 창피하고 혼란스러웠다. 내가 이렇게도 자제력 없이 막 나가는 존재였다니. 시간이 흐를수록 나의 자존감은 떨어졌고,  어떤 희귀한 정신질환을 아주 약하게 앓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스스로에게 대충 둘러대며 체념하 살았다. 그날 그분을 만나기 전까지는.



그날도 별일 없이 엄마와 아파트 주변을 걷고 있었다. 저 멀리서 나와 비슷하게 생긴 아저씨가 보였다. 갑자기 그 아저씨가 허공을 향해 소리를 지르며 난리를 치기 시작했을 때 나는 알았다. 새를 본 것이 분명해. 나와 같아!



엄마와 이 아저씨의 엄마는 처음 본 사이인데도 우리가 같은 종이라 반갑다며 서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고, 우리들을 번갈아 쳐다보면서 웃으며 반겨주었다. 초면에 예의가 아닌 듯했으나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그분에게 물었다.



"아저씨, 좀 전에 새 보고 그러신 거죠?"


"하하.. 봤구나. 창피한걸.."


"아니에요! 저도 그래요!!"


"어쩔 수 없지. 우리는 농장에서 자라야 하는 사냥 개니까"


".............. 네?"



그날 그 아저씨가 해준 이야기들에 대해 생각하느라 삼일 밤낮을 잠도 자지 않고 먹지도 않았다. 우리 슈나우저는 태생 자체가 쥐 나 야생 동물로부터 농작물이나 가축을 보호하기로 되어있는 종 이기에 당연히 새들이나 고양이들을 보면 짖으며 쫓아간다는 것. 농장을 지키는 사냥개의 역할이 무엇인지 머리로 이해하는 것은 너무나도 힘들었으나 설명을 듣는 내내 나의 온몸이 짜릿해진 걸 보면 오히려 머리보다 몸이 더 빨리 이해하는 듯했다.



내가 이상한 게 아니야. 나는 미치지 않았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 존재 이유가 있다. 내 존재의 이유를 몰랐던 것이 내 잘못이 될 수는 없다. 그 이유에 맞추어, 그 역할에 부합한 인생을 살고 안 살고는 나중의 문제이다.



참을 수 없게 가벼웠고 그러기에 평생 혼란스러웠던 나의 존재가 지금은 명확해졌다. 이젠 새들을 보고 짖을 때도 창피하지 않다. 모멸감을 느끼지도 않는다.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엄마는 여전히 창피하다며 간식을 안주는 벌을 준다. 하지만 나는 떳떳하다. 조물주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고 그것을 알고 있는 나는 더 이상 과거의 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날 이후로 가족들이 나가고 없는 나른한 오후에 낮잠을 자면 종종 꾸는 꿈이 있다. 끝없이 펼쳐지는 평원에 온갖 종류의 농장 동물들이 있고 나는 그들을 바라보며 서있다. 새끼들을 노리는 부엉이나 매가 종종 머리 위를 날고 있지만 열렬히 짖어대는 내가 있는 한 그들은 아무 힘도 없다. 밤이 되면 살금살금 나타나는 살쾡이들도 마찬가지이다. 나의 동물 가족들을 지키기 위해 한밤중에 데시벨 90에 맞먹는 소리를 내지르지만 나는 혼나기는커녕 아빠에게 칭찬을 듣는다. 깨어나고 싶지 않은 꿈이다.



아련한 꿈에서 깨어나면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가끔 외친다.


나, 김버블은 농장을 지키는 용맹한 미니어처 슈나우져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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